III
데콩브가 지적했듯이:
“프랑스에서 정치적 입장의 전개는 결정적인 테스트로 남으며, 이는 한 사고방식의 결정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마치 일자와 다자, 혹은 지식의 본성에 대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다음 선거의 이슈나 공산당의 태도로 주제가 옮겨가기 전까지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13]
마르크스주의의 붕괴, 인권의 ‘발견’, 이론주의와 과학주의가 도덕주의와 예언의 수사학으로 대체된 것은, 명백히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중요한 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정치적 또는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한 헌신은 그 자체로 철학을 대신할 수 있고, 논증과 비판적 토론의 가장 기초적인 규칙을 준수할 필요성을 면제해 줄 수 있다고 계속해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학에서 정치의 이러한 편재성이 정치라는 주제에 대한 이름에 걸맞은 철학적 성찰의 거의 전적인 부재와 항상 나란히 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축적된 실망과 오류들, 특히 정치적 문제에서의 그것들이, 비판적 명석함을 자신들의 기본적인 직업적 미덕으로 단번에 간주하여 결국 그들에게 그것의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속 좁고 부적절한 일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특징적인 경향에 대해, 진정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철학이 탁월하게 비판적인 학문이라는 공리에 의해 보여지는, 결과에 의한 그 어떤 반박에도 저항하는 능력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퍼트넘은 프린스턴에서 문학부 동료들이 과학자들의 사례를 논의하며, 그들의 교양 부족, 편협함, 오만함, 그리고 과학적 직함과 추정된 전문성에 너무 쉽게 감동하는 권력자들의 선호 때문에 그들의 ‘단순한’ 개념들이 사회적, 정치적 수준에서 나타내는 위험을 놀라운 만장일치로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문학하는 사람들, 특히 철학자들의 세련된 개념들이 인류에게 이런 종류의 위험을 초래한 적이 없으며, 결코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경향은 경우에 따라 뒤집힐 수도 있는데, 최근 프랑스에서 ‘신철학’의 경우에 목격했듯이, 철학과 문학의 ‘지적 스승들’이 그들 차례에 전체주의와 억압에 대해 다소간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이 사회 변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과학적, 정치적 기득권 세력에 맞서 위태로운 것들과 위험들에 대한 깨어 있는 사심 없는 인식을 대변해야 하는 학문으로 여겨지는 프랑스에서, 철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는 결의와 실제로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 사이에서 끊임없이 찢겨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모든 종류의 잠재적 반례에 대한 면역 현상이 아니었다면, 퍼트넘이 전한 발언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그가 했듯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일 터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학 학자들은 생각 없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선언을 하고 입장을 취하는 데 있어 과학자들에게 뒤지지 않으며, 과학계에서 나온 발언들은 그 공동체 전체의 탓으로 돌리면서 문학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발언들은 완전히 예외적이고 소수의 관점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이죠.[14]
퍼트넘은 오늘날 철학의 전문주의, 아카데미즘, 비전(秘傳)성, 그리고 증가하는 기술적 성격에 대해 점점 더 커지는 항의들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각 철학적 세대가 ‘진정한’ 문제들, 즉 “물론 논의가 흥미로울 것이고 결코 기술적이 되지 않을 문제들”[15]을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소간 똑같은 의심을 받아왔다고 매우 정당하게 지적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언어 문제의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부인할 수 없이 악화되었는데, 이는 어쨌든 분석 철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철학이 ‘너무 기술적’이라는 이 영속적인 비판 경향은 현대 철학의 ‘언어적’ 성격에 의해 매우 강화된다. 왜냐하면 언어는 [...] 일반인에게 그 자체로는 흥미롭지 않고 위대한 질문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16]
명백한 이유들로 인해 과학이 빠르게 전문가들의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정상으로 여겨지는 반면 철학은 원칙적으로 끝까지 만인의 관심사로 남아야 한다고 여겨진다면, 전문 철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제기되지도 않은 질문에 답하려 하고, 비전문가 대중이 실제로 요청했는지 확실하지 않은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유혹에 너무 빨리 굴복하는 것은 아닌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르 몽드(Le Monde)』와의 인터뷰에서 데상티(Desanti)는 두 종류의 철학을 대조했는데, 하나는 우리 모두의 문제와 성찰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 것입니다.
“이와 나란히, 그리고 이에 반대하여, 내가 전문가들의 철학이라고 부를 것이 있다. 자, 이 철학은, 만약 오늘날의 지배적인 철학인 ‘분석 철학’이라고 알려진(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영미 언어 철학을 고려한다면, 제도화된 지식의 체계로 제시된다. 그것은 다양한 학파들을 포함하고, 종종 경쟁하지만 또한 자주 협력하며, 엄격한 학습 형식과 입문 의식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극히 중요하고 미묘하며 유용한 저작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 저작들은 학구적으로 남는다. 대수학이나 미분 위1상수학이 그들만의 장(field) 안에서 발전하듯이, 이것들도 그 분야의 장 안에서 발전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보통 사람들에게 최악의 경우 위압감이나 배제의 느낌을, 최선의 경우 무관심, 즉 상관없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17]
데상티에게 있어(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에게 동의하겠지만),
“[...] 철학이 일상의 인간의 필요와 연결되려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성직자 집단(clergyship)’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철학은 자신의 사형 영장에 서명하는 셈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18]
일반 대중을 의도한 이러한 성찰은 프랑스에서 꽤 흔한 유형인데, 제가 보기에 세 가지 주요 이유에서 특히 흥미롭습니다. (1) 분석 철학이 프랑스에서는 거의 가르쳐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철학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는 자신의 두려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일반적 경향을 매우 잘 보여줍니다). (2) 조직된 지식 체계로서의 철학의 전문화와 제도화가 새로운 현상으로 묘사되며, 현대 철학에 특정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 (3) 이런 종류의 위험을 비난하는 철학자가, 그 자신의 생산물 중 진정으로 중요하고 지속적인 부분은 특히나 엄격하고 전문적이며 난해한, 본질적으로 수학의 역사와 철학을 다루며 오직 매우 제한된 대중에게만 흥미로울 수 있는 저작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아마도 가장 먼저 인정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자신이 채택한 해결책은 다른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해결책과 같습니다. 즉, 그가 구분한 두 가지 유형의 철학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문가 대중을 위한 담론과 일반 대중을 위한 담론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철학의 두 가지 개념과 그 요구사항, 두 가지 철학적 스타일, 그리고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출판물이 대응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필연적으로 철학 자체 내부에서, 전문가로서 말하는 ‘성직자’의 담론과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평판이 난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 철학자의 담론 사이에서 이제 만들어져야 할 연결의 형태로 다시 나타납니다.
확실히, 아무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혹은 헤겔의 관심사 같은 것들에 대해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혹은 그것이 단순히 이런 종류의 반응의 문제일 수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게다가 위대한 도덕적, 정치적 질문들이 보통 사람의 관심사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토론은 결국 지식 이론이나 인식론을 다루는 질문들 못지않게 기술적이고 난해하게 된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사실, 왜 전문가들의 철학과 일반 대중(정의상 결코 자문받지 않는)의 추정된 기대 사이의 간극이, 실제로는 본질적으로 전문가들 자신의 관점인 시각에서 볼 때, 과거보다 오늘날 더 근본적이고 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일 터입니다.
데상티가 말하듯 “삶과 죽음, 욕망의 질서, 사회의 악”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른 것들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철학자들의 대중은, 비록 그 수가 의심할 여지 없이 훨씬 더 많다 하더라도, 논리학자나 인식론자의 대중보다 데상티가 말하는 ‘보통 사람들’에 반드시 더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르트르, 마르쿠제, 푸코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다소간 변화시킨 듯한 인상을 주는 철학자들과, 대부분의 분석 철학자들, 그리고 사실상 동료들에게만 거의 전적으로 말을 거는 일반적인 철학자들 사이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가 오늘날의 철학이 그 전통적 소명(혹은 더 정확히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형성한 관념)에 충실하려면 되어야 할 모습에 더 가깝게 부합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이해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 철학자들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형식화되지 않은 요구들은, 그 요구들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것보다는 철학자들 자신이 그것이 무엇이라고 믿거나, 다양한 이유로 그것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판단하거나 원하느냐에 의해 훨씬 덜 결정됩니다. 게다가 철학자들이 우리 모두가 가진 문제를 다룬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실제로는 많은 경우 그들 자신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최근 수많은 사례에서 보았듯이 정치에 대한 그들 자신의 관계에 대한 문제 같은 것들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이 그 시대의 위대한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심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정상이라 할지라도, 어떤 특정 철학자에게 그가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꽤 사소하고 별 흥미 없는 이런 종류의 기여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확실히 전적으로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데상티처럼 현대 철학자들이 비전문가 대중에 대한 근본적인 의무를 간과하고 순수하게 기술적인 과업에만 틀어박히는 어떤 성향을 비난하기보다는, 이 점에 대한 그들의 명백한 항복이 객관적인 상황, 즉 오늘날 전문가들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 측면에서 가장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로 구성된 상황에 대응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대답이든 제시하는 사람들은, 보통 생각하듯이 소심함 때문이 아니라 ‘직업적’ 정직함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고백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보다, 어쨌든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 기회가 분명 더 많습니다. 무질이 지적했듯이, quod licet bovi non licet Jovi, 즉 “현자들이 세계관에 도달하는 능력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는 시대는, 세계관을 모든 사람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렸다.”[19]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무서울 정도의 양의 철학연구가 작은 조각들로 나뉘어 행해지고 있어서, 철학적 견해가 개입되지 않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은 상점뿐인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큰 덩어리의 철학에 대해서는 분명한 불신이 존재하며, 그것은 단순히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20]
저로서는 분석 철학의 실천이나, 더 일반적으로 상대적으로 기술적이고 전문화된 유형의 철학의 실천이 그 자체로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관심 부족이나 이런 종류의 문제들에 대한 특히 순응적이거나 보수적인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고 확신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심지어 ‘일상 언어 철학’ 자체가, 명시적으로 규범적인 관점이 없다는 끊임없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가장 실천적인 철학적 질문들(정치적인 것들을 포함하여)을 공식화하고 토론하는 우리의 방식을 개선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철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어떻게 보든 간에 최근 대다수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가장 추상적인 철학적 성찰에 즉각적으로 요구하는 (제 생각에는 가장 유감스러운) 습관을 들이게 된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간접적이고, 더 모호하고, 덜 실질적이며, 솔직히 말해 명백히 더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분석 철학자는 데콩브가 언급한 “선의 이데아에서 감각할 수 있는 선으로의 갑작스러운 도약”[21]을 실현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들이 분석 철학이 기성 의견과 권위에 대한 복종을 조장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대개 단순히 그것이 사람들을 가장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조금 덜 확신하고, 조금 덜 유창하며, 조금 더 신중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해 전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의 학생들은 제게 현대 프랑스 철학의 눈부신 우월성을 설명해 주었는데, 그들에게 프랑스 철학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과 훨씬 더 고양된 전망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이 지극히 뛰어난 개인들과, 제가 이 에세이의 시작 부분에서 인정했듯이, 다른 맥락에서는 아마도 상상할 수 없었을 현대 철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받을 만한 독창적인 저작들을 배출했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명백히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한다는 그 개인적인 성공들이 안고있는 그 심층적인 사고 구조의 극적인 취약성, 불안정성, 일관성 결여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습니다. 즉각적이고 다소 스펙터클한 결과를 낳아 일반 대중 수준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증폭될 가능성이 없는 지적 기업에 대한 취향의 결여, 절충주의, 관심사와 유행의 피상성과 혼란, 체계적인 과장과 도발에 대한 다소 유치한 편애, 윤리적,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지는 경솔함과 무책임함을 설명해 주는 이유와 결과에 대한 심오한 무관심 등을 말입니다. 저에 관한 한, 저는 ‘갈리아적(Gallic)’ 사고방식의 가장 짜증 나는 결함들, 특히 유치한 쇼비니즘과 국수주의, 정치적 과대망상, 비판적 감각 및 정신적 유연성과 혼동되는 변덕, 그리고 비극적 모드로 일관되게 해석되는 영웅-희극적 에피소드들의 주기적인 반복(제 말은 다소 호기로운 체제 전복적 태도와 가장 상투적인 자명함으로의 비참한 회귀 사이의 끊임없는 시계추 운동을 의미합니다)을 전적으로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간주해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상황의 본질을 뒤늦게 인식하거나 거창한 자기비판을 내놓는 것만으로, 잃어버린 시간과 저질러진 불의, 그리고 철학이라는 대의 자체에 입힌 깊은 잘못들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국의 ‘새로운 만다린’들의 멘탈리티가 정말로 촘스키의 아첨 없는 묘사에 부합한다면,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들의 선언과 입장의 빈도와 성격으로 판단할 때, 도덕적 책임에 대한 분명히 더 발전된 비판적 감각과 의식을 자랑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지지하기 위해 그토록 기꺼이 언급하는 이 부인할 수 없는 이점은 사실 실질적이라기보다는 아마도 훨씬 더 상징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 많은 양심의 가책이 너무 자주 효과적인 행동을 대체하고, 남용과 불의에 대한 말뿐인 비난이 그것들의 철폐에 실제로 기여하려는 결의를 대체하며, 본질적으로 내수용인 정치적 신화의 생산이 사태가 실제로 전개되는 방식에 어떤 무게라도 실을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정교화를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지식인에게 정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짜 논거로 정당화하거나 나중에 책임을 질 필요 없이 매 순간 이행해야 하는 일종의 법정 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데상티의 방식으로 사태를 고찰하자면, 역설은 정확히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거나 그래야 할 것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지식으로 그리고 자신의 위험 부담 하에 해결해야 한다고 선언된 질문들에 대해 ‘전문가적’ 의견을 공식화하는 것이 주된 기능인 준(semi)-전문가 집단의 구성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요?
이전 시기에 정치적 폭력과 혁명을 믿었던 프랑스 철학은 오늘날 아주 단순히 도덕과 권리(right)로 회귀한 듯 보이며, 그들이 첫 번째 해결책을 채택하고 찬양했던 이유가 두 번째 해결책의 실제적 혹은 추정된 불충분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습니다. 결국 다음번 ‘혁명’이, 수사학의 더 분명한 유혹에 가려 한동안 빛을 잃었던 진리의 은밀한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이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유행이 언젠가는 그것과 가장 직접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포함한 모든 아이디어에 기회를 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최악이 결코 완전히 확실하지 않다면, 최선 또한 아마도 결코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주
1.이 에세이가 수록된 책(French Philosophy Today, Cambridge UP, 1983)의 표지에서 편집자 앨런 몬트피오레(Alan Montefiore)는 이렇게 쓴다: "열한 명의 선도적인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여기에서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다소간 직접적인 프레젠테이션과 예시를 제공한다. 모음집으로서 이 에세이들은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프랑스 철학적 사고의 스타일, 어조, 관심사뿐만 아니라 그 범위와 다양성을 전달한다." 다른 열 명의 저자는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장-투생 데상티, 뱅상 데콩브, 클로드 르포르, 에마뉘엘 레비나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피에르 마슈레, 루이 마랭, 폴 리쾨르였다. [편집자 주]
2.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The Philosophy of Nietzsche, New York: Modern Library, 1927, 1954, p. 508-9.
3.로베르트 무질, Tagebücher, Adolf Frisé (ed.), Reinbeck bei Hamburg: Rowohlt Verlag, 1976, vol. 1, p. 664.
4.뱅상 데콩브, 『동일자와 타자: 프랑스 철학의 45년(1933-1978)』(Le Même et l’autre: quarante-cinq ans de philosophie française (1933-1978)), Paris, Minuit, 1979, p. 13. 영역: Modern French Philoso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p. 3.
5.오스발트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 trans. Charles Francis Atkinson,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34, p. 41.
6.같은 책, p. 45.
7.Cf. Michael Ayers, "Analytical philosophy and the history of philosophy", in Jonathan Rée, Michael Ayers and Adam Westoby, Philosophy and its Past, Hassocks: Harvester Press, 1978.
8.힐러리 퍼트넘, "Language and philosophy", in Philosophical Papers, vol. 2, Mind, Language and Real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p. 20.
9.Ibid.
10.Ibid.
11.Cf. 하오 왕(Hao Wang), From Mathematics to Philosophy,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4.
12.로베르트 무질, "Geist und Erfahrung. Anmerkungen für Leser, welche dem Untergang des Abendlandes entronnen sind" (1921년 3월), in Robert Musil, Gesammelte Werke, Adolf Frisé (ed.), Reinbeck bei Hamburg: Rowohlt Verlag, 1978, Band 8, Essays und Reden, p. 1043.
13.뱅상 데콩브, 『동일자와 타자』, op. cit., p. 17 (영역: Modern French Philosophy, p. 7).
14. Cf. 힐러리 퍼트넘, Meaning and the Moral Sciences, London, Henley and Boston: Routledge & Kegan Paul, 1978, p. 88.
15.힐러리 퍼트넘, "Language and philosophy", op. cit., p. 2.
16.Ibid.
17."Entretien avec Jean-Toussaint Desanti" (장-투생 데상티와의 인터뷰), Le Monde, 1978년 3월 8일, p. 2.
18.Ibid.
19.로베르트 무질, Gesammelte Werke, op. cit., vol. 7, Kleine Prosa, Aphorismen, Autobiographisches, p. 932.
20.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The Man Without Qualities), London: Secker and Warburg, 1953, vol. 1, p. 300.
21.뱅상 데콩브, 『동일자와 타자』, op. cit., p. 17 (영역: Modern French Philosophy,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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