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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행하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숙부 수양의 왕위 찬탈인 계유정난에 의해 고지 영월로 유배당한 단종, 노산군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몇백 년 전의 역사가 끊임없이 창조되고 계승되는 이유는 단순히 비극적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소재일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그에 따른 군주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본질적인 인간의 심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잉글랜드 또한 왕위와 그에 얽힌 수많은 비극들이 피로 쓰여졌다. 어린 왕을 죽였다고 알려진, 또 다른 역사극 <리처드 3세>의 동명의 주인공 이전에 이미 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역사를 반복한 왕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플랜테저넷 왕조의 마지막 주인공인 리처드 2세와, 리처드 2세의 어린 시절 섭정이던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루크 경, 훗날 헨리 4세 사이의 권력에 대한 깊숙한 숙고를 담담하면서도 인상적인 필체 속에 녹여넣고 있다.

리처드 2세의 말년, 두 신하인 볼링브루크와 모브레이는 서로를 반역죄로 기소한다. 왕은 이 둘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으나 둘 사이에는 결국 결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왕은 결투를 성사 직전에 뒤앞고 대신 '평등'하게 모두를 국외로 추방시킨다. 단호한 결단력 없이 오직 낡은 권위에 일생을 맡겨 온 리처드 2세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망과 동시에 권력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볼링브루크의 아버지인 곤트의 존이 별세하고 난 뒤 남은 유산을 아일랜드 원정에 사용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반감을 더욱 가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리처드 2세가 이처럼 우유부단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집착하는 왕이라면, 쫓겨난 볼링브루크는 민심을 파악하는 동시에 재빠른 판단력과 실행력을 갖춘 야망이 가득한 인물이다.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휘말려 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그저 눈 앞의 먹잇감일 뿐이다. 새로운 세상에 맞춘 새로운 권력이 등장한다. 반란이 성공한다. 그러면서도 영리하게, 그동안 영국의 정치를 이끌어온 축인 의회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볼링브루크는 결국 헨리 4세라는 왕으로 오르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알듯이, 이 모든 비극은 결코 끝이 아닌 장미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왕위 쟁탈전이라는 비극의 또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명분과 실리가 서로 구분되지 않고 얽히고 섥히면서 각자의 시선에 따라 이 모든 진실은 마음대로 조작되고 알맞게 요리된다. 극은 폐왕 리처드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만, 언제나 왕관의 무게와 함께 도사리는 보이지 않는 욕망과 그 음모는 사라지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에 헨리 4세가 죽은 리처드를 애도하라 명하는 장면은 단순한 과거의 지배자이자 적수였던 상대에 대한 예가 아니라, 반란의 교훈은 절대로 자신만의 것이 아닌 자신을 상대하는 모든 자의 유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작중의 4막 1장에서 폐위되어 유폐당한 리처드의 'I am still king of my griefs(여전히 나는 내 슬픔의 왕)' 라는 대사는 400년 뒤 물건너 한 시의 소재가 되는데....



















40년*의 리처드 2세
Richard II Quarante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내 조국은 뱃사공들이
버리고 떠난 나룻배처럼 비참하며
나는 불행보다 더욱 불행한
제 슬픔의 왕으로 남아있던
저 임금 같다

산다는 건 오직 책략에 지나지 않고
바람은 흐르는 눈물 거두지 못하고
사랑하는 내 모든 것 미워해야 하며
내게 더 이상 없는 것들도 저들에게 내주어라
여전히 나는 내 슬픔의 왕

심장은 뛰지 않을 수도 있고
흐르는 피는 생기 없을지도 모른다
도적들의 유희*에서는
이미 2 더하기 2는 4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내 슬픔의 왕

태양이 죽든 다시 떠오르든
하늘은 그 빛깔을 잃었다
내 젊은 나날 다정한 파리여
케-오-플뢰르**의 봄이여 안녕
여전히 나는 내 슬픔의 왕

숲과 연못들을 멀리하라
새들이여 언성을 다물어라
너희들의 노래는 격리되었다
새잡이들이 날뛰는 치세로다
여전히 나는 내 슬픔의 왕

고통스런 시대야말로
잔이 보쿨뢰르에 당도한 때***
아아 프랑스를 잘게 찢어버려라
그 날도 그처럼 창백하였도다
여전히 나는 내 슬픔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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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당한 1940년.

** 원문은 Pigeon-vole. 직역하면 '비둘기 난다'라는 프랑스 어린이들의 게임으로 술래가 날개 달린 동물을 말할 때만 나머지가 손을 들어야 하며 나는 동물이 아니면 벌을 받는 게임이다. 한국의 '가라사대' 놀이와 비슷하다. 아라공은 이 손드는 동작을 독일군의 경례에 빗대고 있다. 또한 voler란 동사에는 '날다'라는 뜻 외에 '훔치다'라는 뜻도 있어 이러한 행태를 더욱 비꼬고 있다.

*** Quai-aux-Fleurs. 프랑스 파리 4구 센 강을 따라 난 유서깊은 산책로.

**** 1429년 잔 다르크는 보쿨뢰르 성주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샤를 7세를 알현하러 나섰으며, 즉 이는 백년전쟁의 전세를 뒤집을 만큼 중요한 시기가 도래한다는 예지가 된다.

각주는 故 최완복 선생의 <프랑스 詩選>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