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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보다 수필이라는 말이 참 즐겁다. 두 단어는 어느정도 같은 의미를 공유하지만, 경수필이니 중수필이니 하며 나뉘기도 한다. 그럼 피천득은 수필을 쓴 것이다. 그의 영문학적 소양과는 별개로, 그는 즐겁게도 수필이라는 단어가 붙기 좋은 글들을 써왔다.


 물론 분류 기준에서 그러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너무 어리숙한 생각으론 그 청초함을 말하고 싶다. 난 수필(隨筆)의 수 자에서 따를 수보다 맑디 맑은 물(水)이나 손(手)을 자주 떠올리곤 하는데, 그건 질 좋은 수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필은 자기 내면을 관조해 있는 생각과 마음을 끄집어내야 하며, 그를 통해 어떤 문학보다도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양식은 수필이란 갈래 외엔 존재치 않는다. 그 덕에 수필은 순수한 것이며 사랑스러운 것으로 변모하며, 그렇기에 솔직하지 못한 수필은 수필이 아니요, 풍경을 바라보지 않는 수필은 수필일 수 없게 된다.


 이 솔직함과 내면의 풍경은 정성 들여 적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것이기에, 수필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전통의 느낌이 강하게 피어날 수 있게 손으로 한땀 한땀 아름다운 글을 적어줘야 한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고 맑은 물처럼 꺼내놓고, 그걸 손으로 정성들여 쓴다. 이렇게 보면 이 수필이라는 것은 참 청초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자주 들곤 한다. 


 소위 에세이라 부르는 것들은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할때가 있다. 담담하지만 솔직하진 못하고, 깔끔하지만 정성 들어있진 못하다. 그런 글은 에세이로선 상등품이지만, 수필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참 어긋난 까다로움이다.


 그런 치기어린 차별에 따르면 이 작품, <인연>은 명백히 수필일 것이다. 4페이지 내로 울림을 줄 수 있는 글은 아마 세상에 몇 되지 않을텐데, 이런 식의 작품을 읽다보면 한국에서 이런 글이 나왔다는 것과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몹시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이 수필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연은 불교 용어의 익숙치 못한 그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낭만적으로 여기기만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인연은 자기 만의 회고로 이루어져있다. 우린 이를 짐작할 수 있어도 완벽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수필이 청초하니 뭐니 표현해도 결국 개인의 감상이다. 다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화자의 인연 아사코는 성심 여학원에 다녔다. 그는 이 성심이란 단어를 못잊어 굳이 힘든 출강을 해가며 춘천까지 갈 정도로 인연을 중요시 하는 인물이다. 우리의 인연은 총 세 번 이어진다.


 첫번째는 격조없고 풋풋한 사이였다. 나는 너를 여동생처럼, 너는 나를 오빠처럼 여겼다. 우리는 자주 함께 나들이를 갔고, 하얀 운동화를 자랑하던 너는 참 어렸다. 나도 참 어려 10년 뒤에 잘 어울릴 것이란 농담에 얼굴이 빨개지기도 한다. 나는 그때 너와 처음 만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예쁜 여자아이만 보면 네가 떠오르곤 했다.


 두번째는 조금 성숙한 사이였다. 다시 만난 너는 성숙했다. 나는 옛날 기억을 되살려 어떤 신발장을 쓰냐 물었지만, 조금 더 성숙해진 너는 교실에 구두를 신고 들어간다 이야기한다. 옛날보단 서먹함이 많아졌지만, 그건 불편한 변화라기보단 차라리 조금 더 완숙한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이였다. 초록 우산을 가지고 온 너는 내 기억에 오래도 남는다. 나는 그때 너와 두 번째로 만난 것이다.


 마지막은 예의를 차려야하는 상대가 되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 집에서 마주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가는 너다. 여기에 이르러선 내가 너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조차 서술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서 늙어버린 나를 보았고, 우리는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나는 너와 여기서 세 번째로 만났다. 


 만나야할때 만나지 못하고, 만나지 말아야할때 만나는, 인연이란 이런 것이다. 그렇기에 인연이란 아름다운 것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 어두움까지 모두 표현한 씁쓸한 말이기도 하다.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한다. 함께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 짧은 악수를 나누던 아사코와 나는 이제 절을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친구 사이의 악수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는다. 우리 사이엔 격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버렸고, 어쩌면 우리의 인연은 이제 영영 끊어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그건 영락일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발생하는 이치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의 인연이였던 아사코는 멀어져간다. 주고 받아야하는 인연이지만, 주고 받을 수 없었기에 그렇다. 세번째 만남으로 우리는 추억조차 되지 못했다.


 나는 10년쯤 미리 전쟁이 났으면 같이 살았을지도 모른다며, 지나치다 싶은 솔직함으로 지나간 인연에 아쉬워한다. 삶이란 아마 그런 것이다. 피천득이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도 그럴 것이다. 그는 삶을 표현한다기보단 삶이 묻어나오는 글을 적었다.


 작가는 이제 그 모든 감상을 꽤 재밌는 말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아주 조금 돌려, 직설적이다 싶을 만큼 강하게 표현한다. 그게 바로 인연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앞에서 작가는 인연의 묘함을 설명한다. 뒤에서 그는 아사코를 원망하지 않는다. 행복을 빌어주지도 않는다. 그냥 아쉽다는 식의 회고를 남길뿐이다. 이상하고 이기적인 이야기다. 아사코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딱히 중요치 않고, 적극적으로 되살리려 노력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떠나갔다며 속단하는게 끝이다. 다만 그건 수필을 적고있는 지금이 아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생각이 아니다. 작가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마음 가는 미문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 뒷문장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작가는 이제 다시 춘천에 가고자 한다. 다만 이번 방문의 주안점은 나만의 추억에 물든 성심 여학원이 아니다. 가을 풍경으로 물든 소양강이다. 어쩌면 성심 여학원을 방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진정 방문하고자 하는 것은 소양강이다.


 그는 이제 이기적이였던 자신만의 옛 인연을 되살리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와 이해하려한들 더 이상 고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만남까지 멋대로 재단해오던 것을, 나는 아쉬웠던 세 번째 만남을 회상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을 것이다.' 그 말대로 세 번째 만남은 이뤄지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아니 만났다면 내 아집을 그대로 두어 아사코는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수 있었고, 인연은 그렇게 내게 좋은 형태로만 남았을지도 모르기에.


 다만 세번째 만남이 이루어져 우리의 인연은 애초에 이랬을지도 모른다는걸 깨달아 버린 이상, 이런 인연은 깨어질 수 밖에 없다. 젊었던 나는 끝까지 악수조차 나누지 않고 헤어졌기에 이런 과오를 마주할 수 밖에 없었고, 그건 정말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자조적인 후회를 부르는 일이다. 과오를 마주하는건 당연하게도 슬픈 일이다.


 이제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옛날의 관념을 유지한 채 과오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그 과오를 담담히 마주할 것이냐. 인연이란 수필이 나온 것을 생각해본다면, 피천득이 택한 선택지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는 이제 수필을 말미암아 모든 것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설명하고, 그저 거짓되지 않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를 희망할 뿐이다.


 젊은 날의 망집을 버린 그의 앞에 펼쳐질 소양강 가을 경치는 분명 본 데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어쩌면 나는 너와 첫번째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시골에 한번 내려갈 생각이다. 저번에 악수도 없이 헤어졌던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이번에는 바람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을까 한다. 아니라면 내가 반갑게 인사하면 될 일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원래는 단순히 인연이란 이런것이다 하는 식의 수필인줄 알았는데, 댓글 보고 떠오른 생각이 많았음.


아사코에 대한 평가가 너무 자기 위주 관점이였던 것은 아닌가. 


근데 세 번째 만남에서 아사코와 했던 대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나치게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건 젊은 때에 저질렀던 과오에 대한 피천득 나름의 반성문이 아니였을까 함.


물론 아사코를 세 번째에 안만났다면 좋았을 확률이 높음. 아사코와의 첫번째 두번째 만남은 명백히 추억으로 불릴만한 좋은 일이였으니까.


그렇지만 세번째 만남을 겪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는 끝까지 자기 아집을 버리지 못하며 자기만의 인연에 빠져 속단하고 미성숙한 관계를 유지한 채로 그 좋았던 첫번째와 두번째 만남에 매몰되었을 확률이 큼. 


아니 만났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아프고 쓰더라도 마주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이 경지를 우리는 성숙이라 부름.


그래서 성숙해진 그는 더 이상 성심 여학원에 가고자 하지 않음. 그게 거짓된 일임을 알았으니까. 대신 그 전까지 아집에 가려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풍경에 집중하며, 새롭고 진실된 인연을 쌓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글은 끝맺음됨.


그렇기에 피천득은 이 수필에서 인연이라 불렀던 아집을 성숙으로 되짚어 진실된 인연을 이야기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최종적으론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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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냥 간단하게 인연이란 글을 평가하기만 해도 충분히 좋은 글 같음


다만 요런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거야


이런 개쩌는 글들이 수록되어있는 피천득의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꼭 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