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7cee8475b18468f73b80c6e558c12a3a21ce7d64ed549b5ba60b5e1970b4

들어가며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철학자의 밀실』 간행에 맞춰, 전국지에 기고한 에세이 「대량 죽음과 탐정소설」에서 가사이 기요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류가 처음 체험한 대량 살육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로 생겨난 방대한 시체의 산이, 포(Poe)에 의한 미스터리 시학의 극단화를 가져온 것이다. 전장의 현대적인 대량 죽음의 체험은, 이제는 과거의 것일지도 모르는 존엄하고 고유한 인간의 죽음을 픽션으로서 복권시키도록 강요했다.

기관총이나 독가스로 대량 살육당해 피투성이 고기 찌꺼기로 변한 참호의 사자에 비해, 본격 미스터리의 사자는 이중의 광륜(光輪)으로 장식된 선택받은 사자다. 범인에 의한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巧緻) 범행 계획이라는 첫 번째 광륜, 그것을 해명하는 탐정의 정치(精緻)하기 그지없는 추리라는 두 번째 광륜. 제1차 대전 후의 독자가 본격 미스터리를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은, 현대적인 익명의 죽음이라는 필연성에 대해, 그것이 비록 허구적일지라도 혼신의 힘으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사히신문 석간」 1992년 9월 1일)


이 글은 『철학자의 밀실』 중 「역(逆)의 밀실」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야부키 가케루가 이야기하는 ‘전간기(interwar) 탐정소설’론을 요약한 것이다. 『철학자의 밀실』이라는 소설의 사상적 주제는 하이데거의 ‘죽음의 철학’을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저 있음(il y a)>의 지점에서 비판하는 데 걸려 있지만, 오히려 가사이 사유의 독자성은 ‘전간기 탐정소설’과 하이데거 철학이 같은 뿌리라고 단정하는 점에 찾아져야 할 것이다. 가사이는 가케루의 입을 빌려 이렇게 주장한다.


“쌓아 올려진 병사의 시체 산은 산업 폐기물의 산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한 대량 죽음의 사실에 직면하여 전율하고, 시체 산이 풍기는 불길함에서 눈을 돌리려 날조된 것이 요컨대 할바흐(작중 하이데거를 모델로 한 인물)의 죽음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의 탐정소설 또한 할바흐 철학과 마찬가지로 제1차 대전을 통과한 시대정신의 산물이 아닐까요. 할바흐가 죽음이라는 것에 화려하고 엄숙한 왕관을 씌운 것과 마찬가지로, 탐정소설 또한 사소하고 평범한 대량 죽음으로부터 자기 구별되는 것으로서, 선택받은 죽음을 복권시키려 노력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20세기의 탐정소설’이란 문자 그대로의 넓은 의미가 아니라, 양차 대전 사이에 쓰인 영미의 본격 탐정소설군, 즉 ‘전간기 탐정소설’로 한정된다. ‘전간기 탐정소설’이라는 말도 귀에 설지만, 여기서는 일단 ‘전간기’이란 ‘장편 본격 미스터리의 황금시대’와 동의어라고 해두자. 가사이가 가능한 한 후자의 표현을 피하고 있는 것은, 손때 묻은 ‘황금시대’라는 표현에 고착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였음에 틀림없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만, 나는 여기서 주로 철학적 문제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아카데믹한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고,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사상적 대치에 대해서도 마르틴 할바흐와 에마뉘엘 가도나스라는 작중 인물에 가탁하여 이야기 작가가 외삽(外揷)한 친절한 요약 이상의 지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가사이 자신이 최종적으로는 하이데거를 물리치면서도, 그의 철학과 같은 뿌리라고 단정했을 ‘전간기 탐정소설’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이 품은 과잉된 도착에 깊이 빠져드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불가사의하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그 자세의 근거를 구하는 것, 나아가 ‘전간기 탐정소설’이라는 가사이의 문제 설정이 어떤 장소에서 발생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도저히 내 손에 감당될 작업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철학자의 밀실』이라는 책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철학자의 밀실』은 무엇보다도 본격 미스터리로 쓰인 책이다. 작가 자신도 반복해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탐정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단, 탐정소설 마니아가 빠지기 쉬운 시야협착의 함정에 빠져 탐정소설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을 나누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물론 “트릭은 별로지만, 그보다 형이상학적인 지(知)와 추리의 화려한 투쟁에 취했다”는 식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단평과 줄거리 소개로 얼버무릴 생각도 없다. 나는 오히려 소설에 즉하여 우직하게 이야기하겠다. 따라서 주워들은 얄팍한 지식으로 보일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능한 한 철학적인 논의도 주워 담기로 한다. 앞서 게시한 두 개의 인용문은 그것을 위한 실마리 같은 것으로, 그것들이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여기서는 탐정소설사적 측면에서 ‘전간기 탐정소설’과 대량 죽음의 문제에 대해 검토한다. 그리고 가사이가 채용한 두 개의 밀실 트릭 자체가 표상하는 탐정소설사적 인용의 필연성을 밝힌 뒤, 이 시론(試論)의 최종적인 도달점은 무명성(無名性), 혹은 ‘이름’의 문제로 귀착될 것이다.


동시에 나의 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 주위를 계속 맴돌 것이다. 애초에 내가 『철학자의 밀실』에 대해 이야기하려 마음먹은 것은, 이 작품과 퀸이 양차 대전 사이에 발표한 어떤 밀실 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합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내게는 가사이-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이 제2차 대전 후 퀸의 변모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주석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그러므로 이 시론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몇 가지 부합을 발견했을 때의 내 놀라움을 나열하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 평론인 척하는 말투도 그때의 놀라움에 비하면 덧붙인 뒷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 외에 이 놀라움을 기록할 방법이 없다. 『철학자의 밀실』 그 자체보다 퀸에 관한 기술이 많아질 것도 뻔히 보이지만, 미리 독자는 그 점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조금 우회해야만 한다.






1

『철학자의 밀실』에는 나치 친위대 장교가 제복에 차는 단검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모리(森) 저택’의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흉기인 단검의 칼날이 부러져 있었던 것에서 파리 경시청의 모가르 경시는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를 떠올린다. “보탄은 아들 지크문트에게 마검 노퉁을 준다. 하지만 오누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지크문트는 아버지의 분노를 사, 절대 부러지지 않을 터인 검 노퉁은 보탄의 벼락을 맞고 부서진다. 그리고 용사에 어울리는 검을 원한 지크프리트가 마침내 노퉁의 파편을 다시 단련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인용되는 게르만 신화의 에피소드는 단순한 현학적 소도구에 그치지 않고, ‘용의 밀실’과 ‘지크프리트의 밀실’이라 명명된 두 종류의 밀실 본질의 대비를 이끄는 우화적인 복선이 되고 있지만, 나아가 탐정소설적인 플롯에서 이 <부러진 단검>은 범인의 동기, 즉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복수를 상징하며, 또한 그것을 피해자에게 알1리는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다. “단검은 자루도 칼날도 의도적으로 환기창 내부에 놓여 있었던 걸 거야. 범인은 미리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 그것을 창문의 쇠창살 안쪽까지 밀어 넣어 두었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잠시 후 닥쳐올 죽음의 운명을 후덴베르크에게 알1리기 위해서. 한때 그의 것이었으며, 그것이 부러졌던 밤의 일, 즉 1945년 1월 12일 밤의 사건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나치 친위대(SS) 단검.”


그러나 후덴베르크가 아닌 우리 독자는 이 <부러진 단검>이라는 모티프를 접한 순간, 어쩔 수 없이 하나의 탐정소설사적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신본격’을 읽기 시작한 젊은 독자라면 모를까, 대충이라도 본격 미스터리의 명작을 손에 든 적 있는 독자라면 <부러진 단검>이라는 말에서 G. K. 체스터턴의 불후의 단편을 상기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다.


『브라운 신부의 순진』에 수록된 「부러진 검(The Broken Sword)」이 기상천외한 역설의 보고인 브라운 신부담 중에서도 유달리 빼어난 빛을 발하는 명작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1911년, 제1차 대전 발발 3년 전에 쓰인 이 단편은 19세기 중반에 태동한 탐정소설이 사상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대량 죽음이라는 테마를 정면으로 다룬 선구적인 작품으로서 한층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잎새를 어디에 숨기는가? 숲속에 숨기지.”

상대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숲이 없는 경우에는 스스로 숲을 만든다네. 그래서 마른 잎 하나를 숨기려는 자는 마른 나뭇가지 더미를 만들어내겠지.”

여전히 대답은 없다. 신부는 더욱 온화한 어조로 덧붙인다.

“시체를 숨기려는 자는 시체의 산을 쌓아 그것을 숨길 것이라네.”

조국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브라질 전역 와중, 돈 욕심에 저지른 이적 행위를 부하에게 들켜 협박당하자 보신을 위해 그를 찔러 죽이는데, 그때 운 나쁘게도 부러진 자신의 검 끝이 죽은 부하의 몸 안에 남고 만다. 부하의 죽음에 의심을 사서는 본전도 못 찾는다 생각한 끝에, 장군은 패배 필연인 전투를 부대에게 명령하고, 전사자의 시체 산 속에 자신이 죽인 남자의 시체를 마치 적병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섞어 넣으려 한다── 여기서 브라운 신부가 말하는 역설은 이미 제1차 대전 전야의 시점에서, 대전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대량 죽음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즉 가사이의 지적에 있듯이, 20세기 전장에서의 대량 살육은 사자(死者)의 고유명을 빼앗아버린다는 것. 더 이상 영웅적인 죽음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부러진 검」이라는 제목 자체가 영웅의 죽음, 영웅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체스터턴의 통찰을 인정한 위에서, 우리는 그 한계──역사적인──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부러진 검」이라는 작품은 영웅이라는 존재 양식을 부정하고는 있으나, 아직 간신히 영웅적인 죽음이 믿어지고 있던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도 사실인 것이다. 작중 브라운 신부는 냉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근대 전에서 칼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드물지── 그런데 유독 이 사건에서만큼은 도처에 이 고마운 칼이 얼굴을 내밀고 있단 말일세.” 신부의 역설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검과 그의 명성, 그리고 적장인, 역시 영웅적인 지휘관의 심리를 둘러싼 고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조국에 대한 장군의 배신은 최종적으로 영국적인 신사도에 입각해, 영웅이자 매국노인 남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 지어졌음이 밝혀진다.


체스터턴은 ‘근대전’이 확실히 영웅의 시대를 끝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20세기의 전쟁이 지금까지 세계가 경험한 적 없는 미증유의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일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벅찼다. 「부러진 검」에서 다루어지는 전장의 대량 죽음은 전술적으로는 무의미한 죽음이지만, 적어도 장군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즉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이름을 씌움으로써 간신히 의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대량 죽음이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11년, 유럽은 아직 최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부러진 검」의 역사성, ‘대전 전(前) 탐정소설’로서의 역사성은 여기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제1차 대전이 남긴 시체의 산은 영웅의 존재를, 나아가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뿌리째 무효화해버리는, 단순한 ‘물건(모노)’의 집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체를 숨기려는 자는 시체의 산을 쌓아 그것을 숨길 것이라네.” 체스터턴의 이 역설은 그 자체로 매우 뛰어난 탐정소설적 발상이었기에 대전 후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전형적인 작례로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1935년)을 들 수 있다. 무차별 연쇄살인물의 고전적 범형(範型)을 만든 크리스티의 대표작이지만, 이 소설 플롯의 근간은 「부러진 검」에서 유래했다. 그 점은 해결 부분에서 포와로의 다음 대사에도 명백하다. “그것은 수많은 살인—한 그룹의 살인에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귀국의 위대한 셰익스피어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숲 때문에 나무를 볼 수 없다’라고 말이죠.”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크리스티가 사용했고 이후 많은 아류를 낳은 연쇄살인 트릭에 대해서는 훗날 엘러리 퀸이 『꼬리 아홉 고양이』(1949년)에서 과부족 없는 요약을 쓰고 있으므로, 조금 길지만 그 부분을 인용해 두겠다.


엘러리는 식어가는 커피를 응시했다. “지미, 자네는 대량 살인의 ABC 이론을 들어본 적 있나?”

“무슨 이론이라고요?”

“X가 D를 죽이고 싶어 하네. X의 동기는 언뜻 보기에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그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D를 죽이면, 경찰 수사를 통해 결국 D를 죽일 동기를 가진 유일한 인물, 혹은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이 X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마네. X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동기가 눈에 띄지 않게 D를 죽여 목적을 달성하느냐 하는 것이지. X는 이를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D의 살인을 다른 살인 사건의 연막으로 감싸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일부러 똑같은 수법을 사용해 서로 관계가 있는 일련의 범죄로 꾸미는 걸세. 따라서 X는 먼저 A와 B와 C를…… 전혀 죄가 없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네. 그러고 나서 D를 죽이는 거지.

이 방식의 노림수는 D 살해를 일련의 범죄 사슬 중 한 고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네. 경찰은 D를 죽일 동기가 있는 자를 찾는 대신, A와 B와 C와 D를 모두 죽일 동기가 있는 자를 찾으려 하겠지. 하지만 X는 A나 B나 C를 죽일 동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므로 D에 대한 동기도 간과되거나 무시되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한 번의 짧은 강의로 탐정이 되는 법이군요.” 지미 마켈이 말했다. “연쇄 살인 사건에서는 마지막 동기가 있는 녀석이 범인이다. 수강료는 마약 주삿값만 내면 되겠네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엘러리는 화내지 않고 말했다. “X는 더 영리해. 자신에게 의심이 갈 만한 살인에서 멈춰버린다면, 공들여 연쇄 살인의 하나로 보이게 하려던 사건이 오히려 눈에 띄게 될 테니까. 그래서 X는 목적인 D 살해에 이어 관계없는 E나 F나 G나—그리고 필요하다면 H나 I나 J를 죽이네. 그는 자신의 동기를 숨기는 데 성공했다고 느낄 때까지 관계없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죽여나가는 걸세.”


크리스티가 이 작품에서 이룩한 첫 번째 공적은 전장에서 다반사화되어 있던 대량 살육의 현실을 고스란히 평시의 도시 공간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체스터턴의 작품에서는 이야기가 바다 건너 이방의 땅을 무대로 한 옛날이야기로서 브라운 신부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될 뿐이고, 그 결과 환상소설적인 색채가 짙어져 근대적인 퍼즐성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조 포를 인용할 것도 없이 탐정소설은 본래적으로 도시 소설일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부러진 검」 역설의 유효성을 유지하면서 근대적인 후던잇(Who done it)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량 살육이 행해지는 현장을 평시의 도시 공간 내부로 이식하는 것이 필요했다. 크리스티의 수완은 이 요청에 십이분 부응해, 교활한 지능범이 짜낸 살인 시나리오에 기초하여 불특정 시민이 연속해서 살해당하는, 탐정소설적인 무차별 살인 모델이 확립된 것이다. 체스터턴의 지점에서 보면 크리스티가 세운 정식은 큰 전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도약은 ‘전간기 탐정소설’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대전의 교훈은 도시의 주민=비전투원조차 무의미하게 닥쳐오는 불의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 물론 제1차 대전 이전의 도시에서도 잭 더 리퍼 사건 같은 무차별 대량 살인은 존재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두에 있어서 이러한 부조리한 살육은 다분히 범죄 실화 내지 선정적 스릴러가 다루는 영역이었고, 겨우 장르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던 당시 탐정소설이 감당할 물건은 아니었다. 사견이지만 잭 더 리퍼 사건의 불길함을 탐정소설 기법으로 대상화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작품은 토머스 버크의 단편 「오터몰 씨의 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제1차 대전 후인 31년 작품이다.


‘전간기 탐정소설’에 대하여 크리스티가 완수한 두 번째 공적은 『ABC 살인사건』이라는 제목 자체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즉, 무차별 연쇄살인의 피해자에게 ABC……라는 기호를 붙이고 그 연쇄를 전경화(前景化)함으로써 플롯을 구성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대량의 시체를 생산함으로써 피해자 개개인의 고유명을 빼앗아버리는 것뿐이라면 「부러진 검」과 그리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고유명을 빼앗긴 무명의 사자에 대해 새로 임의로 고른 기호를 붙인 것은 크리스티의 독창이라 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자에게 부여된 ABC……라는 기호의 연쇄는 피해자의 고유명과 동떨어진, 자유롭게 대체 가능한 시니피앙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쇄살인의 희생자들의 무명성은 ABC……라고 기호화됨으로써 더욱 철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사자들의 이름은 이중으로 강탈당했다(돈캐스터 영화관에서 살해된 피해자 이름의 취급에 주의).


종종 ‘전간기 탐정소설’ 및 그 흐름을 잇는 본격 퍼즐러의 등장인물에 대해 그들은 피가 통하는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듣는데, 이러한 비판의 대부분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상투어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일면에서는 ‘전간기 탐정소설’의 본질을 찌르는 지적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부리는 기호 같은 등장인물들은 이중으로 무명화된 시체 산 속 사자들의 분신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쨌든 제1차 대전이 낳은 대량 죽음의 현실에 대한 공포의 은폐 형태로서의 ‘전간기 탐정소설’은 『ABC 살인사건』이 발표되어 광범위한 독자의 지지를 받은 1935년 시점에 있어 이미 형식적 완성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본격 탐정소설 연작으로서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를 통독하면, 어느 작품에나 공통되는 하나의 두드러진 작법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즉 탐정소설을 탐정소설이게 하는 전형적인 테마를 노골적인 형태로 작품의 중심에 두고,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에 의해 이 테마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다시 씻어내고 그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사건을 해결로 이끈다는 스타일이다. 『바이바이, 엔젤』에서는 얼굴 없는 시체, 『여름의 묵시록(서머 아포칼립스)』에서는 고딕풍의 연쇄 비유 살인, 『장미의 여인』에서는 엽기적 토막 시체라는 식으로. 그리고 『철학자의 밀실』에서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밀실’이라는 주제이다.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 그랬듯이, 밀실이야말로 탐정소설이라는 수수께끼의 왕자, 무엇보다 이 특이한 문학 장르의 본질을 구현하는 상징적인 주제임에 누구도 이론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밀실이라는 문제에 대한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는 불가피하게 본격 탐정소설의 성립 자체까지 사정권에 넣게 된다.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철학적 논의가 이윽고 ‘전간기 탐정소설’ 분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리는 것은, 가사이가 밀실을 주제로 선택한 시점에서 거의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철학자의 밀실』은 작중에 현재와 과거, 두 건의 밀실 살인을 품고 있다. ‘숲 저택’의 밀실과 한나 오두막의 밀실은 처음에는 동질의 것처럼 보인다. 삼중 밀실이라 표현되는 불가능성이 양자에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케루의 추리에 의해 표면적인 동질성은 부정되고,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생성된 밀실(용의 밀실)과 제작된 밀실(지크프리트의 밀실)──가 밝혀진다. 이 대조는 선명하다.


그런데 가케루의 현상학적 추리는 그 성격상 밀실에 관한 매너리즘적인 요설을 물리친다. 즉 존 딕슨 카의 「밀실 강의」(『세 개의 관』)나 란포의 「종류별(類別) 트릭 집성」 같은 논의는 진상 해명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밝혀진 밀실 트릭을 다시 카나 란포와 같은 시선에 노출시켜 보면 흥미로운 선례의 존재에 부닥친다. 『철학자의 밀실』에 나타나는 두 개의 밀실은 현상학적 본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의 의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숲 저택’의 밀실 성격을 표상하는 「역(逆)의 밀실」이라는 장 제목과, 한나 오두막의 밀실 형성에서 피해자의 시체가 수행하는 즉물적인 역할에 주목해 보자. 놀랍게도 이 두 요소를 겸비한 특이한 밀실 소설이 양 대전 사이 시기에 발표되어 있다. 게다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이 문자 그대로 무명의 시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탐정소설에 정통한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내가 말하려는 바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엘러리 퀸의 손에 의한 밀실 소설의 제목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The Chinese Orange Mystery)』이라고 한다.





3

국명 시리즈의 여덟 번째 작품,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은 1934년에 발표되었다. 앞서 언급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이 발표된 것은 이 이듬해이다. 이미 바너비 로스 명의의 비극 4부작은 33년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으로 완결되었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는 기묘한 작품이다. 퀸 팬들 사이에서도 평가는 딱 둘로 갈리는 듯하다. 퀸의 평전을 쓴 프랜시스 네빈스 주니어 같은 평론가조차 『중국 오렌지』에 대해서는 차가운 평가밖에 내리지 않고 있다. “이것에 비하면 이듬해 작품은 한 권뿐으로 꽤 기대에 어긋난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1934)는 중국의 만찬 같은 것으로, 먹고 있을 때는 이국정서가 있지만 식사가 끝나자마자 허무하고 만족감이 없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은 퀸의 제1기 작품 중에서는 가장 우열한 작품으로 꼽혀야 할 것이다.”(『엘러리 퀸의 세계』) 그런데 1977년 방일했을 때 프레데릭 대니는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작가 자신의 베스트 3를 꼽는다면 무엇을 들겠느냐는 질문에 『중국 오렌지』를 1위로 꼽았다고 한다(참고로 이때 대니는 번외로 『꼬리 많은 고양이』를 덧붙였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못난 아이일수록 귀엽다, 라고 속된 식으로 받아들이기도 가능하겠지만 대니의 답변의 진의는 그런 안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노자키 로쿠스케는 『북미 탐정소설론』 속에서 「비극의 기호학」이라는 이하의 장을 마련해 비극 4부작을 다루며 상세한 분석을 가하고 있다. 노자키에 따르면 당초 밴 다인의 비호 아래 출발한 젊고 천진난만한 탐정 작가가 처음으로 직면한 시련의 장이 드루리 레인의 4부작이었다. “이 4부작에서 탐정의 지옥 순례는 모두 완결되었다. 여기서 엘러리 퀸은 자기와 게임 탐정소설 사이에 증대된 이화(異和)를 통째로 껴안고, 탐정소설 형식을 취함으로써 지극히 압도적인 다큐먼트의 조형을 제출할 수 있었다.” “국명 시리즈의 페어리 테일(동화)과 결별해야 한다고 각오했을 때 그는 그것에 탐정 작가로서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탐정소설을 씀으로써 탐정소설에 결별을 고한다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탐정소설 제작이라는 행위에 지극히 중층적인 의미를 도입한 것이다. 유파의 연명이라든가 작풍의 변용이라든가 하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작가의 가장 근원적인 암투이다.”

비극 4부작에서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노자키는 그것들에 이어진 국명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미국 총 미스터리』, 일곱 번째 작품 『샴 쌍둥이 미스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것들에 이어진 제6작 『미국 총 미스터리』에서 전형적인 ‘엘러리의 뉴욕’ 이야기 원형으로 돌아와 틀어박혀, 이러한 불안과 타협을 짓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이 작품에 있는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은 시리즈 중 가장 앙연(昻然)한 의기로 넘치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다음 작품 『샴 쌍둥이의 비밀』에서 작가는 그의 불안을 통째로 정식(定式)의 틀 속에 처넣어 짓눌러버리고, 그로써 정식의 승리를 꾀했던 것이다. 작품에 의해 불안의 초극이 시도되었다. 그는 불안의 표백을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로 대행하려 했다.


물론 노자키는 국명 시리즈 후기 작품군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다. 『북미 탐정소설론』 속에서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은 도입 부분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지만, 노자키의 기본적인 태도는 『샴 쌍둥이의 비밀』에서의 불안 초극 시도를 단죄하는 다음 기술에서 명료하게 읽어낼 수 있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 설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작가뿐이지 않을까. 탐정소설이라는 장르는 승리했는가?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불안의 해소’만이 완성된 것이다. 완성된 형태를 가진 것이다. 이것은 대치(代置) 행위인 것이다. 탐정소설의 승리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삶으로부터의 도주 근거가 흔들림 없이 확정된 것이다. 탐정 작가인 것, 그 애호가인 것, 그것이 통째로 긍정적으로 근거 지어진 것이다. 이것이 엘러리 퀸의 사술(詐術)이리라. 스스로의 갈등을 그는 가구(假構)의 성채에 봉인하려 했다. 원더랜드의 출입구를 사수하려 했다. 결과, 매우 많은 것이, 삶 자체에 속하는 것이 있어야 할 곳에서 박탈되고, 불안이, 공포가, 사랑이, 탐정소설=수수께끼 풀이 게임 탐정소설에 의해 대치되었다. 유럽의 파시즘, 본국의 대불황── 지극히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런 상황의 공포로부터의 자폐의 길(道)이 여기에 있다.


노자키의 퀸 비판은 확실히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적인 견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퀸의 형식(정식)에 대한 집착에는 단순히 자폐라고 끝낼 수 없는 기이한 강도가 있어, 노자키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최근 ‘신본격’ 옹호파에서 특히 현저하게 발견되는 평범한 게임 구가론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퀸이라는 작가에게 고유한 주제로서 다시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형식화’의 문제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0세기에 현재화하기 시작한 문학이나 제(諸)예술의 변화, 예를 들어 추상 회화나 12음계 음악 등은 서로 평행하고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물리학, 수학, 논리학의 변화에도 근본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변화를 형식화(Formalization)라고 부를 수 있다. 형식화란 지시 대상(Referent)이나 의미 내용·문맥(Context)을 괄호에 넣고, 항(그 자체는 의미 없는)과 항의 관계만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앞서 말한 전반적인 변화의 특징은 그것들이 이른바 자연·현실·경험에서 괴리됨으로써 자율적인 세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데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형식화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 현상은 각 영역에서 각각 고찰되어 역사적으로 추적되고 있지만, 그것들이 패러렐한 것이 명백한 이상 이 변화의 성질은 보다 일반적으로 ‘형식화’라는 것 그 자체에서 찾아져야 한다.
(「은유로서의 건축」)


40년의 긴 세월에 걸쳐 퀸이 더듬어간 궤적을 여기서 말하는 ‘형식화’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것이 가능한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용어의 엄밀한 사용법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일지반해(一知半解)의 안이한 유추에 빠질 위험성도 크다. 그러나 퀸의 작품을 읽을 때 나는 아무래도 그 급진적인 형식주의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고, 또 종래의 퀸론에서는 그러한 측면이 너무나 무시되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확실히 노자키가 말하듯이 “유파의 연명이라든가 작풍의 변용이라든가 하는” 문제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오히려 표면적인 작풍 변용 과정에서 퀸이라는 작가에게 고유한 내적 일관성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자키의 사회학적 분석은 작가를 둘러싼 외적 요인의 기술에 기대는 경향이 있어, 이러한 변용의 계기가 작품 내부의 어떤 장소에서 발생해 왔는가 하는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문학 비평 영역에서 현저한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노자키류의 퀸 비판에 대해서도 유효한 반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형식주의에 의한 ‘역전’을 긍정하면서, 또한 그 결과로서의 자폐적인 증상(말의 감옥)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기도는 너무 안이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형식화’ 그 자체가 품은 문제를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문학에서의 ‘형식화’가 언제나 애매한 채로밖에 이루어지지 않고, 또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종종 거기서 ‘시와 과학’의 이분법이 끄집어내져 ‘형식화’가 방기되어 버린다.
(「형식화의 제문제」)


가라타니는 계속해서 이렇게 단언한다. “형식주의는 ‘밖에서’ 혹은 ‘밖을 향해’ 비판되기는커녕, 그 내부에서 스스로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 퀸의 형식주의는 원래 밴 다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추리소설 작법 20칙’이나 『그린 살인사건』의 98항목 목록에 현저한 형식화의 의도는 힐베르트의 공리주의나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과 동일한 심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실제 창작에서 이러한 형식화를 철저히 하지 못했고, 그것을 이뤄낸 것은 그의 현저한 영향하에 출발한 ‘후발자’ 퀸에 다름 아니었다.




4

하지만 나는 너무 성급하고 무모하게 앞서 나간 것 같다. 퀸이라는 작가의 형식주의적 측면에 대해서는 주로 이 시론에서 다룰 여유가 없으므로 또 다른 기회에 원고를 바꾸어 서술하기로 하고, 일단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ㅡ』과 『철학자의 밀실』의 유비(類比)로 이야기를 되돌려야 한다.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은 『철학자의 밀실』과 마찬가지로 밀실 살인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래의 밀실 소설 스타일과는 선을 긋고 있다. 퀸의 애독자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시마다 소지는 매우 대략적이고 낙천적인 에세이 「본격 미스터리론」 속에서, 이른바 추리소설이라 칭해지는 것이 환상소설과 리얼리즘 문학의 두 원류를 가짐을 보이고, ‘밀실 살인’은 전자의 계보에서 포에 의해 분파된 ‘본격 미스터리’에만 어울리는 성격의 것이라고 규정한 위에서, “시대가 내려오면 그 퀸에게서조차 이 원점의 인식이 다소 애매하게, 즉 어중간해져 있던 것처럼 보인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밀실은 환상미가 다소 부족했다. 밀실은 환상소설로서 모두(冒頭)에 제출되지 않으면 토대를 잃은 성처럼 취약한 것이 되기 쉽다. 필연성이 결여되기 때문이다”라고 평하고 있는데, 시마다의 이 평은 뭔가 근본적인 오독을 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이라는 소설은 애초에 ‘밀실’이라는 테마를 해체하려는 지점에서 쓰이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종막의 해결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밀실 소설임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탐정은 수수께끼 풀이 장면에서조차 밀실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모두의 불가능성·환상성 강조라는 밀실 소설의 상투적 스타일과 비교해, 퀸은 노골적으로 밀실이 가진 최대의 매력을 배제해 버렸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행해진 밀실이라는 성역에 대한 침범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퀸의 인식은 조금도 어중간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실이라는 불가능 범죄의 자명성을 의심하는 태도에서 동시대의 누구보다, 혹은 현대의 시마다 소지보다 훨씬 철저했던 것이다. 퀸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을 씀으로써 손때 묻은 밀실의 성립 조건을 근저에서부터 씻어내고 해체하려 했으니까. 따라서 시마다 같은 논의는 전형적인 ‘시와 과학’의 이분법에 불과하며, 퀸을 몰아세운 ‘형식화’에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과 동의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 소겐추리문고판의 속표지 내용 소개에서는 이 책이 밀실 살인을 다루고 있음을 독자에게 예고하고 있는데, 이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미리 그 결론을 밝혀져 버리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본문을 읽어도 아무런 놀라움도 생기지 않는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테마는──실은 이쪽이 더 중요한데──‘거꾸로(아베코베)’라는 개념이다. 이것을 ‘가치 전도’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이 기묘한 살인 이야기는 흡사 루이스 캐럴의 세계가 현실화된 듯한 기상천외한 시체와 범행 현장의 출현으로 막을 연다. “거꾸로야, 브라머 군, 거꾸로라고. 일종의 대구(對句)로서의 거꾸로지. 이 거꾸로는 묘하게 규칙적이고 단조로워서 난 그저 놀라고 있을 뿐이라네. 죽은 사람의 옷까지 벗겨서 거꾸로 갈아입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방에 있는 가구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거꾸로 뒤집어 놓지 않았나.”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시체의 옷차림과 범행 현장의 집기만이 아니다. ‘거꾸로’의 테마는 작중 다양한 차원에서 몇 번이나 변주되어 온갖 장면에서 집요하게 얼굴을 내미는데, 밀실을 다루는 퀸의 태도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종래의 밀실관 전도를 꾀하기 위한 장치가 곳곳에 베풀어져 있다. 이 태도는 앞서 말한 밀실 소설의 정식을 무시한 구성에도 나타나 있고, 그것이 더 명확한 형태를 취해 표상되는 것은 밀실의 안과 밖의 역전 현상에서이다. 즉 통상의 밀실에서는 범인이 열린 외부 공간에 위치하고 피해자의 시체가 폐쇄 공간 내부에 봉인되어 있는 데 반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서는 폐쇄 공간에 봉인되어 있는 쪽은 범인이고 시체가 가로놓인 범행 현장은 밖을 향해 열린 공간으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단, 잠긴 문을 사이에 둔 범인과 시체의 비대칭적 위치 관계는 위1상적으로 보면 통상 밀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밀실의 안과 밖의 역전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적절하지는 않고, 오히려 역전하고 있는 것은 open/close의 이항 관계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서 해명되는 밀실은 설령 퀸이 작중에서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꾸로 된 밀실’이라고 명명되어 마땅한 특이한 성격을 갖추고 있다.


“……남은 일은 정신 집중과 실험의 문제였지. 문에 대해 범인에게 중대한 무언가를 한다고 할 경우,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문에 빗장을 거는 것이네. 이 경우에는 빗장을 지르는 것이었지. 하지만 범인 자신이 이 방에서 빗장을 지르고 다른 문, 즉 이 방에서 복도로 나가는 문을 통해 도망칠 수 있는데도 도대체 왜 죽은 사람에게 빗장을 걸게 할 필요가 있었겠나.”

 쉰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전혀—생각지 못했소—”

 엘러리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것에 대한 유일한 가능한 해답은, 범인이 복도 쪽 문을 통해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었거나 혹은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네. 범인은 사무실로 통하는 문을 통해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범인은 복도 문을 통해 도망쳤으며, 사무실 쪽 문은 계속 빗장이 걸려 있었다고 모두가 믿어주길 바랐던 거네. 따라서 계속 사무실에 머물며 사무실 밖 복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인물은 분명히 범인일 리 없다고 믿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


이에 대해 『철학자의 밀실』에서는 ‘숲 저택’의 삼중 밀실 트릭은 나디아 모가르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설명된다. “그랬던 거구나. 나도 드디어 가케루의 수수께끼 같은 암시의 의미를 이해했어. 밀실에서 나가는 것이 밀실에 들어가는 것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속된 밀실, ‘역(逆)의 밀실’. 그레는 삼중 밀실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어. 그리고 밀실 밖은, 폐허가 된 아파트는, 녹색 터널을 통해 삼중 밀실의 중심부와 직결되어 있었던 거야.”


밀실 현상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수많은 장식을 벗겨내고 토폴로지컬한 모델로서 베르너=그레의 범행 계획을 검토하면, 그것이 퀸의 ‘거꾸로 된 밀실’을 계승하면서 한층 더 반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범인은 사무실 밖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당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범행 현장 밖에 가두었다. 따라서 범인에게는 사무실과, 문을 사이에 둔 범행 현장 각각이 밀실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즉 밖의 복도에만 주목하면 밀실(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은 것이 밀실(범행 현장)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는 용의권 밖으로 벗어날 목적으로 역설적인 뫼비우스 띠 모양의 통로에 해당하는 밖의 복도를 스스로 막았기에, 기계적인 조작에 의해 사무실과 범행 현장을 잇는 문을 막을 필요에 쫓겼던 것이다. 가사이의 소설이 퀸의 밀실을 계승하고 또한 그것을 반전시켰다는 것의 의미는 이 설명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또 한 점, ‘역의 밀실’이든 ‘거꾸로 된 밀실’이든 전도된 밀실의 성격을 파악함과 동시에, 범인이 단 한 명으로 한정된다는 밀실 소설로서는 예외적인 테크닉의 채용이 『철학자의 밀실』과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유연성(類緣性)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도 덧붙여 두어야겠다.






5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밀실의 ‘거꾸로’ 성은 말하자면 소설 전체에 장치된 광의의 밀실 트릭인데, 이번에는 협의의 밀실 트릭, 즉 문의 조작 트릭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탐정소설사상 가장 시체 모독적인 트릭에 대해서는 이 시론 2장에서 인용한 카의 「밀실 강의」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므로, 펠 박사의 명대사로 그 대목을 인용해 보자.


“문과 창문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분류 중에서는 문 쪽이 훨씬 일반적이니, 문의 잠금장치가 안쪽에서 잠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열거해 보겠네.”

(1, 2항 생략)

 3. 빗장에 수작을 부리는 방법. 여기에도 실을 사용하네. 이번에는 핀과 바늘을 이용한 장치인데, 문 안쪽에 꽂은 핀의 지렛대 작용으로 빗장이 걸리게 하되 실은 열쇠구멍을 통해 작동하는 방식이지. 내가 경의를 표하며 모자를 벗어 던지는 파일로 밴스가 이 수법의 최고의 응용 사례를 보여준 바 있네. 더 간단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은, 한 가닥 실을 이용한 변형도 있지. 세게 잡아당기면 스르르 풀려버리는 ‘톰 풀(바보) 매듭’이라는 방식으로 긴 실 끝에 고리를 만드네. 그 고리를 빗장의 손잡이에 걸어 아래로 늘어뜨린 뒤 문 밑으로 통과시키지. 그러고 나서 문을 닫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실을 당기면 빗장이 걸리네. 홱 잡아당기면 손잡이에서 매듭이 풀리고 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지. 엘러리 퀸은 또 다른 방법을 보여주었는데, 죽은 남자의 사체 그 자체를 이용한 것이라네──하지만 이것을 전후 맥락이 있는 문장에서 떼어내 그것만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난폭하며, 저 재기발랄한 신사(퀸)에 대해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되네.


펠 박사의 미적지근한 말투에서도 상상할 수 있듯이, 이 트릭 자체는 스마트한 해결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 점에 관해서도 네빈스 주니어는 솔직하게 불만을 표명하고 있다. “ ‘독자에게 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리는 완전히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만 명 중 한 명의 독자도 상상 못 할 것 같은 유별난 물리적 조작(매니퓰레이션)에 의해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욱 상처를 깊게 하는 것은 그 조작은 두 개의 창(槍)을 확대해 보는 지극히 간단한 검사로 폭로될 만한 물리적 흔적을 남기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카의 신사적인 배려에는 반하지만, 논의을 진행하는 데 필요하므로 이 기계적인 조작 트릭의 대략적인 순서를 설명해 둔다. 두 개의 창으로 시체를 막대기처럼 고정해서 문 바로 앞, 그 밑을 통과시킨 융단 위에 세운다. 창과 문빗장 손잡이에 묶지 않고 감아둔 한 가닥 끈이 걸쳐져 있다. 범인이 문밖에서 융단을 잡아당기면 시체는 쓰러지고, 그것이 마침 지렛대 같은 역할을 해서 손잡이에 감아둔 끈을 잡아당겨 그 힘으로 빗장이 꽂힌다. 범인은 융단과 끈을 문 밑 틈새로 회수하므로 밖에서 빗장을 건 흔적은 남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릭 해명 장면은 지루한 순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질 뿐 거의 카타르시스는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맥이 풀린 듯한 독후감이 남는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가 퀸에게는 드문 밀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평가가 좋지 못한 것은, 정작 중요한 조작 트릭이 별로 신통치 않은 인상을 주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이는 퀸의 소설에서 밀실의 ‘거꾸로’ 성뿐만 아니라, 이 어색한 기계적 트릭까지도 『철학자의 밀실』에 인용해 보인다.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과 한나 오두막 밀실(침실에서의 첫 번째 밀실) 트릭의 공통성은 너무나 명료하다.


총알이 한나의 왼쪽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루거 9mm 탄을 맞은 한나의 머리는 맹렬한 힘으로 뒤틀리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이어 상체가 떼밀리듯 등 뒤로 쓰러진다. 쓰러지는 한나의, 옹이구멍과 창살을 경유해 뻗어 있던 왼쪽 머리카락 뭉치에 이끌려 덧문이 닫힌다. 창문이 닫혔음에도 여전히 머리카락 뭉치는 계속 당겨져, 마침내 못에 감겨 있던 끝부분이 풀려버린다. 결과적으로 머리카락은 덧문의 옹이구멍을 통해 실내로 회수된다.

한나의 몸이 바닥에 메쳐지기 직전에, 닫힌 덧문의 안쪽 잠금장치 돌기가 오른쪽 머리카락 뭉치에 의해 당겨진다. 돌기에 눌려 있던 가로막대가 스프링 장치로 튀어나와 걸쇠에 수납된다. 더욱 계속 당겨지는 머리카락 끝은 감겨 있던 돌기에서 풀려버린다.


한나 오두막의 밀실에서는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끈 대신 피해자의 긴 머리카락 타래가, 문 대신 창문의 판문이 사용되고, 그 순서도 퀸의 방법보다 심플하고 디테일이 고려된 교묘한 것으로 개량되어 있다. 게다가 이 밀실에 특권적인 죽음의 몽상을 봉인하는, ‘지크프리트의 밀실’이라는 해석을 적용한 점에서 가사이는 퀸을 능가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지는 시체(피해자)의 중량을 끈(머리카락 타래)의 견인력으로 바꿔 조작한다, 라는 원리적인 메커니즘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거꾸로 된 밀실’이라든가 시체 그 자체를 사용한 조작 트릭이라든가, 가사이에 의한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모티프의 반복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중심에 가로놓인 피해자의 수수께끼에 눈을 돌려야 한다.






6

150년에 이르는 탐정소설 역사 속에서도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피해자만큼 특이한 성격을 부여받은 인물은 드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는 무명(無名)의 인물이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이름을 갖지 못한 등장인물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 ‘홀연히 나타난 무명씨’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작가는 소설을 끝내버린다.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처럼 마지막 한 줄에서 비로소 범인의 이름이 밝혀지는 케이스도 있지만,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경우는 그런 화술의 묘기, 테크닉 과시와도 무관하다. 그는 갑자기 정체불명의 시체로 출현해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난다. 유일하게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터인 범인조차 끝까지 피해자를 “그 사람”이라 계속 부른 끝에 이름을 입에 담지 않고 自殺해 버린다. 더욱이 퀸은 그 점을 강조하듯 우표 이름에 관한 농담 섞인 주석을 결말부에 내세운다.

“고유명사인 <오렌지> 말입니다.” 엘러리가 말했다. “우표 이야기예요. 참으로 흥미진진한 우연의 일치인데, 제가 가엾은 오스본과 저 싱글벙글 웃는 작은 체구의 중국 전도사 사건을 소설화하기라도 한다면, 저는 그 책에 『중국 오렌지』라는 표제를 붙이고 싶은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명씨의 시체는 시종일관 이야기 중심에 계속 위치하고, 플롯의 대부분이 피해자의 신원을 찾는 퀸 부자의 노력 묘사에 할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두에 정체불명의 시체가 나타나고 그 피해자의 신원을 쫓아간다는 줄거리의 미스터리라면 조금도 드물지 않지만, 그러한 소설에서는 피해자의 인격·개인사 자체가 사건의 진상과 깊게 결부되어 있어 최종적으로 “피해자가 누구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 것은 전무에 가깝다(『철학자의 밀실』의 ‘숲 저택’ 사건 피해자를 둘러싼 플롯도 구조적으로는 이와 동형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서는 해결편에 이르러서도 이 물음은 공중에 매달린 채, 탐정의 추리에 의해 피해자의 표층적인 속성이 밝혀질 뿐 그의 인격이나 개인사, 내면 등은 일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의미에서도 사자의 무명성은 관철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론 모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철학자의 밀실』의 사상적 주제라 불리는 것은 개개의 사자로부터 고유한 이름이 강탈되는 미증유의 대량 죽음을 체험한 제 1차 대전 후의 시대정신 분석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대량 살육의 희생자는 시체 산에 파묻혀 비인간적인 무명의 물건(모노)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 다시 가사이의 소설과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아날로지를 시도한다.


무명의 시체야말로 등장하지만 그것이 ‘전간기 탐정소설’임을 제외하면, 퀸의 소설은 얼핏 보아 대량 죽음의 문제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실제로 작중에 나타나는 시체는 단 하나에 불과하다. 사체 모독적인 밀실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조차 전혀 죄 없는, 연고도 없는 시민을 차례차례 살해해 가는 『ABC 살인사건』 같은 잔인함에는 미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견해일 뿐이다. 일단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를 관통하는 ‘거꾸로’의 주제에 주목하면 이 소설이 품은 또 하나의 모티프, 즉 체스터턴의 역설을 계승하는 트릭의 인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 저는 숙고한 결과 이 수수께끼에는 두 가지 가능한 해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하나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을 거꾸로 해놓은 것은 사건과 관계가 있는 누군가에 대해 어떤 거꾸로 된 성질이 있음을 지시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제가 간과하고 있던 또 하나의 해석은,” 엘러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속했다. “모든 것을 거꾸로 해놓은 것은 사건과 관계가 있는 누군가에 대해 어떤 거꾸로 된 성질이 있음을 은닉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퀸은 국명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도착된 논리를 구사하여, 범인이 “피해자가 (가톨릭) 신부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피해자가 넥타이를 매지 않고 뒤트임 칼라를 하고 있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모든 것을 거꾸로 한” 것을 폭로한다. “거꾸로 된 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 자는 거꾸로 된 산을 쌓아 그것을 숨길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부러진 검」 역설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시론 1장에서 체스터턴의 착상이 대량 죽음의 문제와 밀접 불가분함을 보였다. 따라서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는「부러진 검」이라는 선례의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거꾸로 된 산의 중심에 무명의 시체를 배치함으로써 암암리에 대량 죽음의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리될 정도로 퀸의 태도는 단순하지 않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서 보이는 대량 죽음과 무명성의 모티프는 체스터턴이나 크리스티 이상으로 가혹하고 철저한 처리를 거쳐 독자 앞에 제시되고 있다. 「부러진 검」 내지 『ABC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비록 그 고유명을 빼앗기거나 혹은 기호화되어 있다 해도 아직 인간임을 전면적으로 부정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간신히 무명의 인간 시체 단계에 머물러 있어, 문자 그대로 인형과 똑같은 물건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체는 인간의 시체 산 속에 숨겨짐으로써, 그나마 어떻게든 과거 인간이었던 것의 존엄을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