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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독단적인 19세기적 소설관의 소유자에게는 상상도 못 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퀸의 태도는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라는 소설에서 기이할 정도로 철저하고 수미일관하고 있다. 피해자의 이름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우표라는 물건의 고유명에 대한 주석으로 이야기가 맺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제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여기서 비로소 시체가 문 조작 트릭의 도구로 타락해 버리는 것의 의의를 대중들의 시각에 반하여 적극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보이는 기계적 트릭의 어색함은 시체가 사물화(事物化)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퀸이 채용한 방법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탐정이 해결 장면에서 시체 대신 인형을 사용해 트릭을 실연해 보일 때, 거기서도 시체=인형(물건)이라는 등가 관계는 명백하다. 이것은 이제 시체 모독조차 아니다. 시체의 사물화를 표현하기 위해 퀸은 트릭조차도 우화(寓意)의 제물로 제공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의 일관성도 ‘전간기 탐정소설’의 정식이 있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덧붙여 두어야겠지만.
그건 그렇고 이 얼마나 황량한 광경인가. 더 이상 여기에는 “이중의 광륜으로 장식된 선택받은 사자”의 그림자도 형체도 없다. 퀸은 밴 다인이 만들어낸 ‘대전간 탐정소설’의 정식을 통째로 계승하는 데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밴 다인의 도착된 정열이 목표로 한 것에서 훨씬 동떨어진 지점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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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렌지 미스터리』과 마찬가지로 시체 장식 테마를 루이스 캐럴적 세계관에 결부시킨 밴 다인의 1929년 작품 『비숍 살인사건』의 살인 현장을 보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명백하다. 마더 구스 동요에 빗댄 연쇄살인의 피해자들은 결코 퀸 소설의 시체처럼 범행 현장에 넘쳐나는 물건의 산 속에 파묻히거나 하지는 않는다. 설령 그것이 막간극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동요 가사에 맞춰 만들어진 무대장치 속에서 사자야말로 단 한 명의 주역이다. 피해자는 장식의 중심에 군림하고 있으며 무대장치에 불과한 물건보다 상위 레벨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시체=물건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마더 구스의 주제는 아마 아네슨이 로빈을 놀리며 스펄링(참새)의 화살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생각난 것이겠지. 교수는 그 말 속에서 자신이 키워준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만족시킬 방법을 발견한 거야.” 이 파일로 밴스의 설명에서 명백하듯, 마더 구스 비유 살인은 조지프 코크런 로빈(=코크 로빈), 레이먼드 스펄링(=참새)이라는 이름에 의해 환기된 것이다. 즉 고유명이 비유 살인에 선행하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의 이름은 작가가 임의로 고른 기호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피해자의 이름과 그에 대응하는 동요 가사를 다른 것으로 했다 하더라도 하나하나의 살인에서 피해자의 고유명을 소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밴 다인은 퀸만큼 사자의 무명성을 철저히 관철하지 못한다.
파일로 밴스는 「수학과 살인」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범인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 마더 구스 범죄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진지한 논리적 사유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 반동으로 가장 공상적이고 변덕스러운 행동을 취한 수학자라네. 마치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아주 진지하게 여기는 세계다. 너희는 무한하며 더욱 광대한 추상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생활 따위는 어린애 장난이다──농담거리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게 고작이다』라고 비웃음당하는 것 같군.”
이거야말로 밴 다인적 아이러니의 극치다. 일견 밴스는 개인 죽음의 비소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한하고 광대한 추상 세계와 사소한 개인 죽음의 대비를 끄집어냄으로써 죽음의 비소함 자체를 이 대비 효과에서 생기는 일종의 외경과 숭고함의 감각으로 바꿔치기하고, 결과적으로 눈앞에 있는 개인의 죽음이 지닌 사소함, 비소함 자체를 은폐해 버린다. 이 점에 있어서야말로 그의 정열의 도착성이 발견되어야 한다. 범인의 동기 분석에 할애되고 있을 터인 「수학과 살인」 장이 연쇄살인 피해자들에 대한 미사여구 가득한 조사(弔辭)처럼 들려버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자의 밀실』의 ‘전간기 탐정소설’론은 무엇보다 먼저 탁월한 밴 다인론이 되고 있는데, 가사이는 「탐정소설이라는 시대정신」이라는 에세이(『탐정소설론 I 범람의 형식』 서장) 속에서도 다음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직접적인 전화(戦禍)를 피할 수 있었던 영미에서는 그것들에 대응하고 그것들을 대보(代補)하는 것으로서 본격 탐정소설이 쓰이고 또 광범위하게 읽힌 것이다. 하나의 시체에 하나의 극명한 논리. 그것은 무의미한 시체 산에서 이름 있는, 고유한, 존엄 있는 죽음을 되찾으려는 도착적인 정열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미술 비평가였던 밴 다인이 처음에 탐정소설 창작에 손을 댄 계기는 생명과 관련된 병을 얻어 입원한 체험에 있다. 20세기적인 병원에서의 사자는 20세기적인 전장에서의 사자와 그 죽음의 무의미성에서 대응하고 있다. 어쨌든 20세기인의 죽음은 사소하고 평범하며, 용과 싸우는 게르만 영웅의 광휘 있는 죽음일 수는 없는 것이다.
파일로 밴스가 그 요설로 은폐하려 하고 있는 것은 제1차 대전으로 상징되는 20세기적인 대량 죽음의 현실인 것이다. 사소하고 평범한 대량 죽음의 산. 그러나 밴스의 요설로도 숨길 수 없었던 것이 인류 최초의 대량 살육 경험에는 있었다.
밴스의 요설로도 숨길 수 없었던 것, 즉 밴 다인이 직시할 수 없었던 것은 시체 그 자체, 물건으로 변해버린 시체의 어쩔 도리 없는 비소함에 다름 아니다. ‘전간기 탐정소설’의 모델을 거의 독력으로 만들어내면서 결국 그 모델에 걸맞은 실제 창작을 해내지 못한 이 작가의 불행은, 대량 죽음의 현실에 대한 시선의 불철저함에 기인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한편 ‘후발자’ 퀸은 그 출발점에서 ‘전간기 탐정소설’이라는 정식에 대한 정열만을 밴 다인에게서 이어받았고, 거기에 숨겨진 도착성에는 거의 무자각한 전형적인 전후(제1차 대전 후) 청년이었다. 그 무자각함 때문에 젊은 퀸은 밴 다인 이상으로 철저한 형식화의 길을 더듬어, 마침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라는 기형적인 작품이 태어나고 만다. 퀸의 끝없는 정열은 ‘대전간 탐정소설’에 숨겨진 도착을 기괴하게 극한화한 지점에서, 그가 모범으로 삼은 작가가 그것으로 은폐하려 했던 대량 죽음의 불길한 현실, 시체 그 자체를 노출시켜 버린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선택받은 사자에게 장식되는 이중의 광륜”은 결정적으로 상실되어 버렷다.
네빈스 주니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약 이 이야기 전체가 거꾸로(backward)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로, 첫 몇 장에서 보여주는 솜씨와 괴기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면 이번 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탐정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머지 장은 거의 우표 수집이나 섹스, 중국 문화, 공갈, 분실된 히브리어 성서 주해 등 일련의 탈선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어느 것도 살인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단지 놀라울 정도의 우연으로 어떤 의미에서든 거꾸로(backward)라는 단어가 붙는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지적은 일면에서 옳다. 그러나 그것은 퀸의 실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전간기 탐정소설’의 틀을 철저히 하는 작업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소설 전체에 박힌 ‘거꾸로’ 요소의 다채로움은 오로지 무명의 시체에 부여된 ‘거꾸로’ 속성을 숨기는 목적에만 이용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즉 소설 작법 차원에서도 “거꾸로 된 산이 단 하나의 거꾸로 된 진상을 숨기고 있다”. 따라서 ‘거꾸로 된 범행 현장’은 ‘거꾸로 된 소설’의 소설 내적인 반복이며, 이것은 일종의 액자 구조(Chinese Box)가 되어 있다. 게다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라는 ‘거꾸로 된 소설’ 그 자체가 ‘전간기 탐정소설’의 도착된 틀을 본뜨듯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퀸은 이 소설에서 ‘전간기 탐정소설’의 정식을 내부에서부터 먹어치워 버렸다. 즉 ‘전간기 탐정소설’이 품고 있던 도착 그 자체를 내재적으로 주제화함으로써 ‘전간기 탐정소설’의 틀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거꾸로’라는 테마를 반입하고, 또 밴 다인에게서 유래하는 탐정소설의 형식화──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전도(거꾸로)이다──를 철저히 하면, ‘전간기 탐정소설’의 틀 안에서 일종의 자기언급적인 패러독스가 생겨버리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기 때문이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이라는 소설의 기묘한 종잡을 수 없음, 마치 소설 그 자체가 공중 분해해 버린 듯한 두서없는 인상은 바로 이 점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 이 소설의 기묘한 인상은 『멋지고 비밀스러운 장소(A Fine and Private Place)』의 독후감과도 공통되는데, 이 퀸 최후의 장편에서도 「부러진 검」 역설의 변주가 채용되고 있다. “모든 일을 저 가공의 9라는 숫자에 엮어 미혹시킨 것은 당신의 소행이지. 그것은 브라운 신부가 말하는 ‘공포스러운 죄’였소.” 『유쾌하고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퀸 후기 작품에서 종종 발견되는 ‘범인에 의한 탐정 추리의 조종’이라는 테마가 도립(倒立)한 형태로 병용되고 있기 때문에, 탐정소설로서의 해체도는 더욱 현저하다.
이러한 자해(自解)의 과정에 퀸이 무자각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제목 자체가 선행하는 『Y의 비극』에 대한 자기 패러디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오.” 템플 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럼 그 사람이 탄지르 귤을 먹은 것에는 전혀 의미가 없었나요? 저는 또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을 줄 알았거든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러리가 나른하게 말했다. “그저 그 사내가 배가 고팠을 뿐이라는 것 이외에는.”
『Y의 비극』 제2막 4장, 드루리 레인이 독이 주입된 배의 신선도에서 중요한 추정을 내리는 장면과 이것을 비교해 보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를 쓰고 있던 시점의 퀸이 ‘전간기 탐정소설’이라는 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저절로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다시 노자키 로쿠스케가 『샴 쌍둥이 미스터리』에 대해 서술한 비판을 떠올려 보자. “작가는 그의 불안을 통째로 정식의 틀 속에 처넣어 짓눌러버리고, 그로써 정식의 승리를 꾀했던 것이다”라고 노자키는 말한다. 가령 이 견해가 『샴 쌍둥이 미스터리』에 대해 타당하다 해도, 같은 말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퀸은 ‘전간기 탐정소설’에 대한 의심을 통째로 정식의 틀 속에 처넣어 짓눌러버리고, 그로써 정식의 승리가 아니라 말하자면 정식의 근거 그 자체를 검토하려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를 통과함으로써 퀸이 직면한 것은 ‘전간기 탐정소설’이라는 정식의 무근거성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탐정 작가인 것, 그 애호가인 것, 그것이 통째로 긍정적으로 근거 지어진 것이다. 이것이 엘러리 퀸의 사술이리라”라고 하는 『샴 쌍둥이 미스터리』, 혹은 국명 시리즈 후기 작품에 대한 노자키의 비판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 의해 극복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중요성은 노자키가 말하는 것 같은 사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음을, 어디까지나 정식 내부의 아슬아슬한 지점에 몸을 둠으로써 퀸이 확인했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러한 무근거에 노출됨으로써 퀸은 ‘전간기 탐정소설’의 종언을 체험한 것이다. 1935년에 발표된 국명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 『스페인 곶 미스터리』에 대해 네빈스 주니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에서는 밴 다인형의 고지식한 체스 문제에 그가 불만을 느끼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제1기의 끝이 바로 거기까지 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엘러리의 추리는 논리적으로는 가차 없고 양심적이며 공정하지만, 퀸 자신은 본격적인 추리로 수수께끼 풀이를 할 가능성을 성급하게 다 써가고 있다는 실감을 품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러한 실감은 작가를 둘러싼 외적 요인에서가 아니라, 바로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라는 작품 내부에서 생겨난 것이다. “1935년 후반부터 39년에 걸친 퀸 작품은 1929년부터 35년에 있어서의 작품과 내용·문체·구성·모티프에 있어 너무나 성질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퀸의 경력 중 두 번째 구획을 긋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빈스 주니어가 <제2기>라 명명한 이 시행착오 기간은 ‘전간기 탐정소설’에 이별을 고한 퀸의 태도 변경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태도 변경을 촉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작품으로서, 또한 ‘전간기 탐정소설’에 의한 ‘전간기 탐정소설’ 비판의 유례없는 철저함에 있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는 퀸의 작품사뿐만 아니라 탐정소설사 속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이정표적 작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간기 탐정소설’에 의한 ‘전간기 탐정소설’ 비판을 지향하는 것. 이 태도는 퀸뿐만 아니라 가사이의 소설에서도 공유되고, 또한 보다 이론적으로 정리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반세기 이상의 시간을 두고 쓰인 두 개의 밀실 소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와 『철학자의 밀실』이 보여주는 수많은 부합은 바로 이 태도의 공통성에서 유래한다. 즉 후자에 의한 대량 죽음과 밀실 주제의 반복은, 탐정소설사에 내재하는 자기언급적인 필연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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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까지 서술해 온 것은 『철학자의 밀실』이라는 소설의 사상적 주제라 불리는 것 중 하이데거적인 측면에 치우친 기술이며, 작품 구성상 보다 무게를 지니고 있는 레비나스에 의한 하이데거 비판의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가사이 자신은, 전자에 기초한 ‘전간기 탐정소설’ 분석에 힘을 쏟고 있는 반면, 포스트 황금시대 영미 탐정소설의 동향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논하려 하지 않고, 단지 그 평범하고 퇴락적인 경향을 제2차 대전 후 하이데거의 신비주의를 닮은 몽매함에 비유하여 암암리에 넌지시 비추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전간기 탐정소설’의 틀을 비판 없이 계승한 포스트 황금시대 퍼즐러는 40년대 이후 서서히 쇠퇴하여 탐정소설의 왕좌에서 전락하고, 제2차 대전 후에는 풍속 소설로의 경사를 강화함으로써 장르의 구석에 머물며 간신히 멸종만은 면한다는 말로를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년의 퍼즐러의 복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우리 신본격을 포함하여──끊이지 않는데, 이에 대해 가사이가 내리는 진단은 이렇다. “할바흐(하이데거) 철학의 기만을 간파하지 못한 전후 청년이, 그들에게는 부모 세대에 해당하는 베르너와 같은 전전 청년의 운명을 반복하듯 또다시 죽음의 철학이라는 덫에 빠졌다. 그렇게 된 데에도 필연적인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하르바흐가, 그리고 베르너가 증오했던 바이마르 사회에 한술 더 뜬 공허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중사회인 것이다, 나와 안투안이 태어나 자란 곳은. 하르바흐 식으로 말하자면 수(數)와 공공성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바보들의 낙원이다.”
그렇다면 본격 탐정소설의 황금시대를 짊어진 작가들, 혹은 그 계승자는 모두 제2차 대전 후의 하이데거(할바흐)처럼 ‘전간기 탐정소설’이라는 틀 자체에 숨은 기만을 못 본 체하고 “타조가 되는 선택을 한” 것일까.
“맹수에게 쫓기는 타조는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다고 하더군. 맹수가 보이지 않으면 그 위협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니까. 할바흐는 그것과 똑같은 짓을 한 거야.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그로테스크한 시체 더미를 보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었지. 저 몽매한 신비주의 따위는 무서운 맹수를 칠판의 글씨를 지우듯 지워버릴 수 있는, 타조에게는 고마운 모래 같은 거야.”
그런데 나는 앞 장에서 퀸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라는 작품으로 ‘전간기 탐정소설’에 의한 내재적인 ‘전간기 탐정소설’ 비판을 관철했음을 보였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고치면, 제2차 대전과 절멸 수용소의 대량 죽음에 직면한 하이데거(할바흐)가 자신의 죽음의 철학이 와해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을 이미 퀸은 ‘전간기 탐정소설’ 내부에서 선취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에 이어지는 이른바 <제2기> 작품군은 와해된 ‘전간기 탐정소설’ 틀을 필사적으로 다시 세우려는 작가의 시행착오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비교적 약한──영화화를 노린 듯한──몇 권을 읽으면 일단은 “타조가 되는 것”을 선택한 듯한 위태로움도 발견된다. 이러한 할리우드 지향의 소설을 쓰는 것 자체가 단순히 밴 다인의 선례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고, 바꿔 말하면 선행자의 도착된 정열이 쌓아 올린 은폐 장치를 해체한 뒤에도 퀸이 그 인력권 내에서 쉽게 탈출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틀림없는 증거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밴 다인에게 있어서는 제1차 대전의 대량 죽음 체험이 고유한 역사성으로서 새겨져 있었던 데 반해, 연소자인 퀸은 그에 필적할 만한 불가피한 ‘외부’ 체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 의한 ‘전간기 탐정소설’ 비판 그 자체는 탈(脫)역사적인 고찰에 머물러 있다. 즉 거기서는 아직 고유명이 빼앗긴 채인 것이다. 퀸이 고유명 문제에 부닥치고 최종적으로 밴 다인의 권내를 완전히 빠져나가 “타조가 되는 선택”을 거부한 것은 제2차 대전과 절멸 수용소의 대량 죽음──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은 퀸의 민족적 동포에 다름 아니다──이라는 사건을 목격함으로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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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폭스 가의 살인』에서 과거로의 타임 트립을 시도한 후 3년의 공백을 거쳐, 제2차 대전 후의 퀸은 『열흘간의 불가사의』(1948년)와 『꼬리 많은 고양이』(1949년)에 의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다. 연달아 쓰인 이 두 작품은 단순히 후자가 전자의 후일담이라는 것 이상으로 절실한 주제의 연속성을 갖고 있어 본래 떼어놓고 논해야 할 것이 아니지만, 『철학자의 밀실』을 기점으로 둔 이 시론의 성격상 여기서는 『꼬리 많은 고양이』만을 독립적으로 고찰 대상으로 삼기로 한다.
『꼬리 많은 고양이』는──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를 기묘한 방식으로 거울에 비춘 상(像) 같은 소설이다. 양자를 잇는 주제의 일관성과 그 급진적인 반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가사이가 『철학자의 밀실』에서 제시한 시좌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론에서 가사이 소설과의 상사성을 엮어가며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서 대량 죽음·밀실·사자의 무명성 같은 모티프를 추출해 왔는데, 『꼬리 많은 고양이』라는 작품 속에서는 이들 모티프가 모두 역전된 상(相)──즉, ‘거꾸로’이다──에서 다시 채택되어 재음미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거울에 해당하는 것이란 제2차 대전에 다름 아니지만, 『꼬리 많은 고양이』에 단적으로 나타난 퀸의 전후적 태도는 하이데거의 죽음의 철학을 비판하는 레비나스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는 것이다.
(주)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The Chinese Orange Mystery)』와 『꼬리 많은 고양이(Cat of Many Tails)』의 원제 각 단어의 머리글자를 주워보면, TCOM(COMT)과 같은 네 글자 조합이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탐정 엘러리라면 이런 부합에도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먼저 대량 죽음의 모티프에 대해 보자. 『꼬리 아홉 고양이』는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질러 뉴욕 전역을 전율시키는 연쇄 교살마 <고양이>를 쫓는 퀸 부자의 이야기이다. 세계 최대 도시를 무대로 일견 아무런 맥락도 없는 살인을 되풀이하는 <고양이>의 범행을 솜씨 좋게 설명하는 소설 도입 부분은,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에서 완성된 탐정소설적 무차별 살인 모델을 추종하고 있는 듯하다. 그 점을 스스로 인정하듯 퀸은 ‘대량 살인의 ABC 이론’(1장을 참조)을 언급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그 후의 이야기 전개 속에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계기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잘못된 가설 중 하나로 물리쳐진다. 이러한 취급 자체에서 퀸의 ‘전간기 탐정소설’에 대한 반성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부러진 검」의 역설에서 유래하는 ‘대량 살인의 ABC 이론’이 현실에서는 대량 죽음의 은폐 장치로서 기능해 버림을 근거로 한다는 점을 발판삼아, 퀸은 밴 다인이 공포스러워하며 눈을 돌리려 했던 20세기적인 죽음의 비소함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
『꼬리 많은 고양이』에서 그려지는 연쇄살인 건수는 미수로 끝나는 것을 포함해 10건에 이른다. 여기에 중반의 ‘고양이 폭동’ 희생자 및 종막의 범인과 그 배우자의 자살을 더하면, 퀸의 작품 중에서도 또 본격 탐정소설 상식으로 보아도 군계일학이라 할 만큼 다수의 죽음이 다루어지고 있는 셈인데, 그뿐만 아니라 이 소설 배경에는 그것들을 훨씬 넘는 방대한 양의 사자──제2차 대전으로 인해 생긴 무명 시체의 행렬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높은 곳에서 넓은 시야로 여닫이창을 통해 사건을 개관했다. 세계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외쳤다. 이 오래된 지구는 압력에 저항하며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회전하고 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살아남은 세대—그것은 갈가리 찢기고 굶주리고 고문당하고 학살당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장사 지냈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시대의 바다에서 세계 평화라는 미끼에 이끌려 달려들었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주의라는 낚싯바늘에 걸려버렸다. 불가해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아래에서 영문도 모른 채, 그리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것은 외교 전략가가 결코 오지 않을 세계 최종전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권유받고, 설득당하고, 의심받고, 아첨 떨고, 고발당하고, 쫓기고, 의석을 빼앗기고, 부추김 당하고, 버림받고, 한순간의 평화도 안식도 주어지지 않은 채 밤낮으로, 그리고 시간마다 상반되는 세력의 압력 목표가 되었다—세계 신경전의 진정한 희생자였다……그러한 세대가 미지의 작은 소리에도 펄쩍 뛰며 비명을 지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철학자들은 말했다. 감수성이 메마르고 무책임하며 겁을 주거나 겁을 먹고 있는 세계에서 히스테리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뉴욕을 덮쳤다. 세계 어디를 덮쳤더라도 그곳의 주민은 그것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해되어야 할 것은 주민들이 패닉을 환영했기에 그것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발밑이 흔들리는 유성에서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환상은 피난처이자 구1원이었다.
『꼬리 많은 고양이』 모두에서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위와 같이 서술되는 전후 사회의 소묘는 하이데거에 의한 바이마르 시대 대중 사회 분석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또한 퀸은 ‘고양이 폭동’ 진압 후 뉴욕 시민들의 공포로부터의 심리적 도피를 희화화하여 그림으로써 대중에 대한 혐오를 솔직하게 표명하고 있다. 각각의 ‘전후’로 향해진 시선의 엄격함은 양자에게 통저(通底)하는 하나의 태도에 지탱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가사이는 일상적 현존재 분석에 있어서 하이데거의 중심적 모티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할바흐의 모티프란?” 가케루가 질문했다.
“베르너와 마찬가지로 연장자인 할바흐 또한 바이마르 체제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를 망각하고 은폐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다는 사태에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그가 비판한 일상적인 실존의 타락이나 비본래성이란, 바이마르 체제 하에서 공허한 번영에 빠져 조국을 위해 순국한 전사자들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사소한 일상성에 파묻혀 눈앞의 쾌락에만 탐닉하던 대전 사이 독일의 도시 생활자들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대중의 퇴락한 일상적인 삶을 부정하고, 거기에 죽음을 둘러싼 현존재의 본래성을 대치한다. 비본래적인 일상성이 아무리 죽음을 덮어 감추어도 인간은 그 불가피성에서 생기는 불안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 불안은 그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응시할 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는 죽음의 가능성에 대한 선구(先驅)에 있어서 실존한다.” 즉 현재의 것이 아닌 미래의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에 직면하고 그것을 본래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죽음에 앞서는 것에 있어서 그것을 미리 앞질러 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혹은 가케루가 바르베스 경부의 레지스탕스 시대 체험담에 언급하며 말하듯이, “전장과 같은 농밀한 죽음의 분위기 속에서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파묻혀 잃어버렸던 진정한 자아가 비로소 충격적으로 발견된다. 그 감동을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는 법이지.”
그러나 퀸은 단호하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적으로 선취된 영웅적인 죽음, 결의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음을 선언하듯이, 퀸은 충격적인 시민 패닉의 참상을 그린 직후 뉴기니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경험한 청년 저널리스트 지미 맥켈에게 이렇게 말하게 한다.
“이상한 일이네요.” 지미도 웃었다. “어젯밤 같은 소동에 휘말리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된 것 같아요. 바보 같죠. 나는 태평양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전쟁은 분명 서로 죽이는 것이지만 조직되어 있습니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중대한 명령을 받고, 누군가 밥을 해주고,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죠. 모두 작전 교범대로입니다. 하지만 어젯밤은…… 처참한 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벗겨내고 알몸이 되었죠. 부족이 해체되었습니다. 동료 식인종이 모두 적이었어요. 역시 살아있다는 건 좋네요.”
(중략)
“내가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곳에 온 이유 말입니다. 셀레스트와 나는 오늘 아침 만난 이후 스무 마디 이상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처음으로 당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엄청난 멍청이였다는 걸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지미는 스푼의 위치를 똑바로 고쳤다. “이 사건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는 스푼을 향해 말했다. “다시 전쟁이에요. 다른 형태의. 개인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씻겨 내려가 버려요. 그것을 유지하려면 진흙 속에 팔꿈치를 짚고 일어서야만 합니다. 나는 어젯밤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엘러리 씨.”
물론 ‘고양이 폭동’은 퀸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자경단의 출현, 그로 인해 유발된 패닉과 처참한 시민 폭동을 둘러싼 일련의 묘사에서 제2차 대전에서도 직접적인 전화를 면한 미국 본토를 펜의 힘으로 전장으로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은 쉽다. 《“무슨 일이야?” 그가 거칠게 물었다. “전쟁인가?” 그리고 불꽃에 물든 하늘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따라서 지미 맥켈이 태평양 전쟁과 ‘고양이 폭동’을 비교해 위와 같이 말할 때, 작가는 자신과 두 번의 세계대전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연소자인 퀸이 연장자인 밴 다인을 향해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전쟁입니다. 다른 형태의. 개인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퀸이 직면한 현실의 전쟁이란 제2차 대전이며,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이며, 즉 제1차 대전의 시체 산을 능가하는 대량사 생산 공장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씻겨 내려가 버려요. 그것을 유지하려면 진흙 속에 팔꿈치를 짚고 일어서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영웅적인 죽음도, 죽음의 가능성에 선구하는 본래적 자기에의 각성도 있지 않다. 물론 “이중의 광륜으로 장식된 특권적인 죽음”(밴 다인) 등을 바랄 수도 없다. 『꼬리 많은 고양이』의 작가는 죽음을 인간의 본래성조차 통째로 삼켜버리는 어두운 탁류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파악에 있어 퀸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의 죄수 체험을 토대로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비판한 레비나스에 한없이 가까운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사이에 의하면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치한 <있는 것(il y a)>을 전제로 해서 생각하면,“죽음은 평범해지고 무한히 끔찍한 것이 된다. 한순간에 통과할 수 있는 점이 아니라 지루하게 이어지는 과정이 된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상정한 순간적인, 점과 같은 죽음이 아니다. 따라서 터닝 포인트로서의 성격을 잃은 죽음은 본래적 자기를 가능케 하는 특권적인 순간이 아니게 된다고 가사이는 말한다.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에 선구하려 해도 그 죽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불길한 과정이기에, 그곳에서 되돌아와 현재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흙 수렁처럼 윤곽이 없는, 끔찍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죽음에 발이 묶여 선구하려는 의지는 보기 흉하게 옆으로 고꾸라진다. 그리고 늪바닥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 삼켜지고 만다. 실존적인 본래성은 허공에 뜨고, 할바흐 철학은 토대부터 붕괴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퀸은 <고양이>의 일련의 범행을 “늪처럼 윤곽 없는, 끔찍한, 시작도 끝도 없는 죽음”으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온 시점에서도 뉴욕 시경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임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확실합니까──”
“<고양이>의 소행이라는 거 말이냐? 사실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 끈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실크 끈이군요.”
“색깔은 달랐다. 핑크빛이 도는 연어 살 같은 색이었지. 하지만 실크는 역시 견수(絹紬)로 아버네시의 경우와 같았다. 다만 아버네시의 것은 블루였지.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네 번째, 다섯 번째로 이어지며 패턴이 명료해졌기에 우리는 스미스 사건도 연쇄 살인의 하나라는 확신을 가졌다. 조사하면 할수록 확신은 깊어진다. 상황도 분위기도 똑같아. 범인은 바람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졌고 냄새도 남기지 않았어.”
즉 <고양이>의 공포에는 딱 떨어지는 시점이 없다. 그리고 그 범행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 뉴욕 시민에게 덮쳐오는 죽음의 평범함, 윤곽 없음은 첫 번째 피해자 아치볼드 더들리 애버네시의 얼굴 묘사에 현저하다. “그는 이토록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악의도, 다정함도, 교활함도, 어리석음도 없었다. 수수께끼조차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엘러리가 아버지에게 암시하듯, “아버네시 같은 남자가 당한다면 누구라도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윽고 불길한 <고양이>의 폭력과 공포에 의한 전제 아래 시체 수가 늘어남에 따라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강제 수용소로 변모해 버린다. 즉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출구 없는 밀실에 갇힌 <고양이>의 죄수로 변함으로써 가도나스 교수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수용 생활이나 다름없는 가혹한 처지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가혹하고 부조리한 폭력에 노출되어 끝없는 불면과도 같은 수용소 생활에 극한까지 피로하고, 기아에 시달리며 인간적인 감정 일체를 모두 빼앗긴 죄수는 오른쪽 줄과 왼쪽 줄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스실에서 옮겨진 시체 더미와 간신히 오늘도 살아있을 뿐인 뼈와 가죽뿐인 자신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있음(être)>을 체험하는 것은 그러한 절멸 수용소의 죄수인 것이다.”
10
『열흘간의 불가사의』를 지배하는 모세적 우의의 강렬함에 비하면 『꼬리 많은 고양이』의 유대성은 희박해 보인다. 특히 후자의 마지막 한 줄에 적힌 ‘마가복음’으로부터의 인용을 보면, 퀸은 이 두 권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세트처럼 구상했을 것이다──라고 일단 도식적으로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잘 도식화할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단순히 퀸이 이 소설을 통해 기독교적인 인간 중심주의에 눈떴다는 것은 되지 않는다. 보다 주의 깊게 퀸의 문맥을 주워가면 『꼬리 많은 고양이』 밑바닥에 흐르는 유대적인 문제의식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작 이상으로 심각하고, 또한 생생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퀸이 이 소설에 던져 넣은 거의 모든 모티프가 기원전 시대의 신화 따위가 아닌, 20세기 유대 민족 박해의 현실, 즉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이라는 현대사의 악몽에서 발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사건의 진정한 해결을 찾아 빈으로 날아간 엘러리가 정신분석의 세계적 권위자 벨라 셀리그만 교수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작가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시체 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극히 아무렇지도 않은 서술 방식이지만 『꼬리 아홉 고양이』의 중심적인 주제는 이 개소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너무나 단순했기에 몰랐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하다는 점과 살인 건수가 너무 많았고 사건이 너무 길게 끌었기 때문이죠. 또한 살인 건수가 늘어남에 따라 개별 피해자의 특징이 흐릿해지고 뒤섞여버리는 종류의 사건이었던 탓도 있습니다. 막바지 세상 사람들의 인상은 도살장으로 보내진 똑같은 아홉 마리 소의 시체 더미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벨젠, 부헨발트, 아우슈비츠, 마이다네크에서 학살된 시체 사진을 볼 때와 같은 반응으로, 개별적인 구별은 없고 그저 죽음뿐이었습니다.”
“퀸 군, 사실 쪽 이야기는?” 희미한 짜증과 다른 무언가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때 엘러리는 유대계 폴란드인 의사와 결혼한 벨라 셀리그먼의 외딸이 트레블린카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하나하나의 죽음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고 엘러리는 생각했다. 사랑뿐이라고 말해도 좋다.
여기에 적혀 있는 것은 대량 죽음과 사자의 무명성에 직면해 전율에 떨면서도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삶 그 자체를 향해 덤벼들려 하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 표명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퀸은 지문(地文)에 단 한 줄을 더함으로써 자신이 딛고 선 한계 지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하나의 죽음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고 엘러리는 생각했다.” .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가톨릭 교회가 설교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름’이라고 바꿔 말함으로써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 II』에서 레비나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레비나스는 그에 대해 실사화(hypostase, 실체화)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니시타니 오사무에 따르면 hypostase라는 단어는 substance(실체)와 어원이 같으며 본래 구별이 없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그것이 “철학사에서 동사로 표현되는 행위가 실사에 의해 지시되는 존재가 되는 사건을 가리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실사화라는 말을 통해 무명의 ‘실존함’이 ‘실존자가 실존함’, 즉 ‘누군가’의 실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의 진정한 실체성은 그 ‘실사성’에 있다. 즉, 단지 존재 일반의 일부가 무명인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순간이 존재 일반의 무명성을 끊어내는 것이다》(『존재에서 존재자로』).
레비나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이 하이데거임은 명백하다. 하이데거는 주체(주관)라는 식의 실체를 부정하고 무명의, 그리고 공동 존재로서의 실존으로 향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실존자(존재자)에서 실존(존재)으로 가는 길이다. 그에 대해 레비나스는 주체의 ‘실체성’을 회복하려 한다. 그것은 실은 실존이 고유명을 부여받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존의 이 실사화가 타자에 의해 명명된다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인 것이다. 러셀에게서도 하이데거에게서도 고유명 또는 명명의 ‘사회성’이 지워져 버린다.
가라타니가 고유명 문제를 다루는 것은 ‘실존주의’를 피하면서 둘도 없는 단독성이라는 문제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고유명과 레비나스의 ‘얼굴’ 메타포를 병치하여 가라타니는 이렇게 말한다.
소를 고유명으로 부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죽이는 일이 곤란할 것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아무렇지 않게 인간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군은 적이라는 집합의 일원일 뿐 고유명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개체로서의 대상이 ‘무엇인가’와는 관계가 없다. 즉 인간이든 소든 상관이 없다. 더 나아가 고유명으로 불리는 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누구인가’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보는 한 타인을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아마 그는 후설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타자를 단순한 개체성이 아니라 단독성으로서 발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얼굴’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개체의 단독성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얼굴’이라는 은유는 부정확하다. 그것은 아무래도 인간으로 한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개체)의 ‘얼굴’, 즉 그 단독성을 의식할 때 그것을 고유명으로 부른다고
(주) 이것은 탈선일지도 모르지만── 훗날 퀸은 『대면(Face to Face)』이라는 장편을 발표했다. 이 작품 해결편에서 엘러리는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의 말투를 흉내 내듯) 이렇게 고한다. “저는 아까 시간과 장소에 대해 말했습니다. 장소는 우연이지만 시간은 어떨까요. 우리는 시간과 대면(face to face)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레비나스적인 문맥으로 말하면 『꼬리 많은 고양이』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모티프는 20세기 대량 죽음의 현실에 맞서 개체의 둘도 없는 단독성을 ‘이름’에 의해 사수하는 것이다. 퀸의 태도는 과거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에서 보였던 사자의 무명성의 철저함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그 자신은 그 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셀리그만 교수에게 진범의 정체를 밝힌 뒤 엘러리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는데, 여기서는 이야기 끝까지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고 퇴장한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피해자에게 <고양이>=카잘리스 부인이라는 이름이 대치되고 있다.
“셀리그먼 교수님, 지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4개월 전 그녀를 처음 만난 이래 ‘카잘리스 부인’ 이외의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거나 생각하거나 화제로 삼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불렀어야 했다는 건가?” 노인이 까칠한 어조로 말했다. “오필리아라고?”
“나는 그녀의 세례명(Christian name)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모릅니다. 그저 카잘리스 부인── 위대한 남자의 그림자──로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꼬리 많은 고양이』는 오로지 ‘이름’에 계속 집착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쇄살인을 잇는 고리의 단서로서 피해자 이름이 반드시 전화번호부에 게재되어 있다는 것과 여성 피해자는 모두 미혼으로 성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 제시된다. 또한 카잘리스 박사의 정신병학적 조사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공표할 수 없다는 것이 장애가 되어 암초에 부딪힌다. 피해자 전원의 출생증명서 원본에 적힌 산부인과 의사의 사인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되어, 아기 출생을 기록한 보존 카드의 이름이 아홉 명의 피해자를 잇는 고리임이 판명된다. 그리고 진정한 해결에 이르기 위한 중요한 지식을 가진 인물을 엘러리는 취리히 과학 잡지에 실린 이름의 나열 에서 발견한다, 등등, 등등.
특히 시사적인 것은 이 책 말미에 ‘이름에 관한 노트’라는 제목의 기묘한 보유(補遺) 페이지가 붙어 있어,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명 리스트가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리스트의 역할이 국명 시리즈 시대의 용의자 일람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일목요연할 것이다. 퀸은 이 리스트 머리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고 있다. “픽션의 목적 중 하나가 인생을 거울에 비추는 것이라면, 그 속의 인물이나 장소도 실생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이름을 통해──확립된 것이어야 한다”(방점 인용자).
‘이름’에 집착하는 것, 즉 개체의 둘도 없는 단독성을 확보하려는 퀸의 의지는 『꼬리 아홉 고양이』라는 소설의 톤 자체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그리는 퀸의 필치에 대해 네빈스 주니어는 빈말을 빼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아홉 가지 꼬리를 가진 고양이』에서 퀸은 인간성이나 추상적인 일반 대중, 군중에 대해 까다로운 경멸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가 창조한 개별 인간들, 그에 의해 생기가 불어넣어진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백만장자 신문기자 지미 마켈은 유일한 예외로, 너무나 부자연스러워 고통을 느낄 정도다)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고양이>의 희생자들조차 누구 하나 생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타인의 입을 통해 이야기될 뿐인데도 살아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박진감이 넘친다. 한 명 한 명이 면밀하게 묘사되고 뚜렷한 특징이 부여되어, 단순한 통계상의 숫자가 아니라 어엿한 인간이 되어 있다. 그리고 희생자와 살아남은 사람들, 수많은 경찰과 관리들, 그리고 무수한 방관자들의 인생을 엮어냄으로써── 그들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생각하며 바라고 두려워하는지, 각각 어떤 곳에 살며 어떤 일을 하는지를 그려냄으로써── 뉴욕이라는 도시가 본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꼬리 많은 고양이』의 박진감 넘치는 문체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퀸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대량죽음과 사자의 무명성 문제를 누구보다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고민했기 때문이다. 이미 보여주었듯 퀸의 지성과 이 문제 사이의 격투 흔적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34년 시점에 무명의 피해자라는 주제를 한계 지점까지 추구했고, 또한 그 문제를 끈질기게 놓지 않았기에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목격하고도 안이한 19세기적 휴머니즘으로 역행하지 않고, 가혹한 외적 현실과 탐정 소설의 내재적인 형식성 사이의 갈등 속에서 진정으로 20세기적인 관점에서의 49년의 전회가 가능했던 것이다.
(주) 가사이-레비나스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만, 노이에 게이이치는 『탐구 II』를 둘러싼 가라타니 고진과의 대담(『탐구 II』와 <타자의 논리학>/『다이얼로그 IV』)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 《이것은 크립키가 유대인이라는 점 때문에 미국 등에서는 그의 철학을 야유하기 위한 일종의 조크로 자주 화제가 됩니다만, 모든 가능 세계를 관통하여 세계가 아무리 바뀌어도 유일한 대상을 계속 가리키는 고유명이란 바로 ‘여호와’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크립키는 『이름과 필연』에서 고유명의 예로 ‘모세’, ‘요나’, ‘이사야’ 같은 『구약성경』의 인물명을 들고 있는데, ‘고정 지시어’로서의 고유명이라는 착상을 얻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마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꼬리 많은 고양이』 말미에 놓인 「마가복음」 인용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분명 ‘여호와’라는 고유명을 뜻한다. 퀸이 그것을 교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름’에 집착함으로써 『꼬리 많은 고양이』가 쓰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을 퀸의 종교적 신조나 신학적 논의로 치환해 버리면 오히려 고유명의 문제가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참고로 ‘여호와’라는 고유명은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피해자의 무명성과도 통할 수 있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모세는 계율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금했지만, 이미 강조했듯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의 저자 또한 소설 작법상 너무나도 기묘한 계율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즉, “피해자의 이름을 함부로 적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다. 가령 프로이트적인 관점에 선다고 할 때, 「모세 오경」의 주해 서적 분실을 둘러싼 탈선을 네빈스 주니어처럼 자신의 박식함을 뽐내는 미스디렉션 중 하나로 경시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마치며
마지막으로 『꼬리 많은 고양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밀실 모티프에 대해 언급해 두고 싶다. 단, 이제부터 적을 것은 여기까지 논의의 부산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의 결론이라기보다 이 장 자체가 본문에 붙여진 주(註)인 것처럼 읽어주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가 일견 대량 죽음의 문제와는 무관해 보이듯이, 『꼬리 많은 고양이』도 표면적으로는 밀실 소설의 체재를 취하고 있지 않다. <고양이>의 범행은 거리에서 묻지마 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며 사건에 얽힌 하우던잇적 흥미는 사상(捨象)되어 있다. 따라서 ‘밀실’이라는 말을 탐정소설적으로 정의하는 한 그것은 이 소설과 일절 무관한 것이다.
(주) 그런데 흥미롭게도 퀸은 『꼬리 많은 고양이』보다 앞서 무차별 연쇄살인과 밀실에 준하는 불가능 상황을 조합한 작품을 발표했다. 「비수(匕首) 닉(Nick the Knife)」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라디오 드라마 대본으로 쓰인 것으로, 「오터몰 씨의 손」을 퀸 식으로 어레인지한 정취가 있다. 네빈스 주니어에 의하면 “프로그램이 방송된 마지막 해인 1948년에, 당시 여럿 있던 라디오 드라마 앤솔러지 프로그램 중 두 곳이 《모험》에서 한 번도 방송된 적 없는 퀸의 드라마를 방송했다. 하나는 《미스터리 극장》에서 1948년 1월 4일에 방송된 「비수 닉」으로, 그 자체 퀸의 라디오 드라마 중 최고 걸작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대걸작 『꼬리 아홉 고양이』의 길잡이로서도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라디오판 연쇄살인귀는 뉴욕의 밤거리에서 30명 이상의 미녀의 손목과 얼굴을 벤다. 마침내 한 여자가 장식용 미로 속에서 습격당하고 하나밖에 없는 출구를 엘러리와 경찰 수명이 감시한다. 이어지는 몇 가지 사건이 미로 속에서 발견된 한 줌의 용의자 중 누구도 살인마일 수는 없음을 보기에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엘러리는 훌륭하게 이 난제를 풀어내지만 청취자 대부분은 나처럼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을 위해 퀸이 교묘하게 짜 넣은 함정에 걸려들 것이다”. 단, 이 드라마가 처음 방송된 것은 1945년 8월이다.
「비수 닉」의 존재는 대량 죽음과 밀실이라는 문제가 퀸의 내부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근거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티프를 닫힌 공간의 안과 밖을 둘러싼 불가능성 문제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꼬리 많은 고양이』의 근간에 위치하는 ‘밀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서 떠오른다. 밀실을 자궁 이미지로 환원하고 태내 회귀 원망을 꺼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안이하고 또 평범한 해석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일단 여기에서 하나의 조응 관계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퀸은 밀실과 자궁의 등가성을 넌지시 비추듯이 진범의 정체를 밝히는 중요한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끼워 넣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양이>는 카잘리스 집의 열쇠가 잠긴 방에 넣어둔 그의 산부인과 의사 시절의 오래된 기록에 그와 마찬가지로 접근할 수 있는 자입니다”(방점 인용자).
더욱이 밀실을 둘러싼 불가능성 문제는 『꼬리 아홉 고양이』 플롯 속에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 있다. <고양이>=카잘리스 부인의 범행 동기는 두 번의 사산 경험에 뿌리를 둔 것이다. 셀리그만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자신의 두 아기를 남편이 죽여서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라는 망상은 강해져 갔다. 남편이 무사히 받아낸 아이 중 몇 명은 그가 낳게 한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그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든 생각하지 않았든, 어쨌든 그녀는 보복을 위해 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병은 마음 깊은 곳에 갇혀 있어서 범죄라는 형태로밖에 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방점 인용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인 카잘리스 박사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로서 두 번 다 부인의 출산에 입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잘리스 박사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로서, 혹은 숙달된 산부인과 의사로서 자궁 내 아기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두 번 다 죽어서 태어나고, 그는 태아 살해의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즉 불가능 범죄로서의 밀실의 딜레마는 『꼬리 많은 고양이』에서는 카잘리스 박사의 심리적인 딜레마로 전이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를 특징짓던 ‘거꾸로’의 주제에 관해 퀸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면 정신과 의사에게 실례야.” 엘러리는 웃었다. “죽은 두 아기에 관한 자료는요?”
“알아낸 것은 둘 다 남자아이였다는 것과, 둘째 아이 이후 카잘리스 부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둘 다 **역아(逆子, 거꾸로 선 아이)**였다고 하더군요.” (강조 인용자)
밀실의 모티프가 어머니의 자궁과 두 번의 사산이라는 요소로 변형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겉보기보다 훨씬 중요하다. 여기서 다시 무명성의 주제가 클로즈업되기 때문이다. 죽은 두 아기의 ‘존재’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음은 명백하다.
퀸 다시 읽어야봐야하나 이해하기 버겁네
죽어서 태어난 아이는 물건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일 수 없는 것은 이름 붙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며, 또한 출생 시점을 둘러싼 법학상 논의와도 관계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적’인 문제이다. 《주체의 진정한 실체성은 그 ‘실사성’에 있다. 즉, 단지 존재 일반의 일부가 무명인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 그러나 『꼬리 많은 고양이』 속에서 카잘리스 부부의 아들들은 늘 “죽은 두 아기”라고 불릴 뿐 한 번도 개별 존재로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2’라는 숫자로 환원 가능한 물건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취급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임에 다름 아니지만, 동시에 이 ‘2’라는 수는 대량의
무명의 시체를 낳은 두 번의 세계대전도 암시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죽어서 태어난 태아라는 무명의 존재는 존재자 없는 존재, 즉 레비나스의 <있는 것(il y a)> 그 자체로서 강제 수용소의 대량의 시체 산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 양자는 같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에 비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탄생과 죽음, 이름 붙여졌을지도 모를 물건과 이름을 빼앗긴 물건, 인간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물건과 과거 인간이었던 물건── 그러나 『꼬리 많은 고양이』라는 소설 속에서 이 양면은 최종적으로 이어지고 만다. 다른 표현을 쓴다면 대량 죽음과 밀실이라는 일견 동떨어진 모티프는 죽어서 태어난 태아라는 제3항에 의해 결합되어 필연적인 하나의 루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루프는 각 2항 간에 해소할 수 없는
@Pie, 기묘한 비틀림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반전하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비틀림을. (주) 이미 보였듯이 『중국 오렌지 미스터리』의 밀실 트릭, 그리고 『철학자의 밀실』의 한나 오두막 밀실 트릭은 전자가 끈, 후자는 머리카락을 매개로 하여 시체와 폐공간의 경계(문/창)가 일단은 결합되고 그 후에 분리된다는 점에서 대응하고 있다. 더욱이 『꼬리 많은 고양이』에서 흉기가 되는 것은 파랑과 핑크색 끈으로, 퀸은 이것을 탯줄을 태아 목에 감아 죽인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해석을 두 개의 밀실 트릭에까지 부연하는 것은 아무래도 견강부회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