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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것에 있어서 보는 것과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 만물을 보고 언어를 통해 시를 쓴다.

그러나 제대로 보는 것이 어렵고 언어가 모순을 안고 있다면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오규원 깊이 읽기>는 그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놓은 오규원의 시세계에 대한 평론들과 여러 문인들이 오규원에 대해 쓴 글을 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하려 했던 초기부터 날이미지 시까지의 오규원 시 세계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다.

<분명한 사건>과 <순례> 시기 오규원의 시에는 언어에 대한 나름의 믿음이 있었다. 그런 믿음에 대한 좌절을 오규원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로 보여주고 있다. 

김병익은 <용산에서>를 예로 들어 오규원의 시적 실패에 대한 인식을 주목했다. 



시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오규원에게 우리 시대는 시의 패배를 확인시키는 시대다. 무엇이 시를 패배하게 했는가? 물신주의와 거짓 만족으로 인한 허영이 그리 하게끔 했다. <우리 시대의 순수시>는 오규원의 대략적인 시대 인식을 보여준다.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안녕한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 시인에겐 생소하게 느껴진다. 온갖 광고와 상품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순수한 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의 실패에 대한 인식은 오규원에게 다른 무기—타락한 언어의 재해석—를 들게 했다. 태평양화학 홍보부서에서 일하던 오규원은 수단으로 전락한 언어, 광고 언어의 생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로 만들고자 했다. 

TV에서 방영되는 광고와 홍보물을 詩로 만든 시를 우리는 '상품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 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3. 빙그레!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를 들고 있다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상품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와 상품가치의 위계 전복, 즉 상품이 필요를 되려 선도하는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상품을 의식적으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며 의식 세계로 들어오는 정보에 이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고는 우리가 방심한 사이 의식 깊이 세력을 확장하고 필요를 만들어 낸다.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의 '빙그레'는 상품의 웃음이며, 미소의 이미지는 곧 상품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어 정끝별은 상품시의 패러디 요소에 주목했다. 패러디란 기존 언술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반복 형식을 말한다. 아무리 시인이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언어를 멀리 한다 해도, 그 둘을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밟고있는 땅이 아무리 척박할지언정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 언어 없이는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詩는 言과 寺이 합쳐져야만 詩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함과 동시에 그 민낯을 직시하는 방법으로 오규원은 패러디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오규원의 패러디는 일상적 대상을 배반해 시적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데서 시작한다. 


선언 또는 광고 문안 
단조로운 것은 生의 노래를 잠들게 한다. 
머무르는 것은 生의 언어를 침묵하게 한다. 
人生이란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닌 것. 문득-스쳐 지나가는 눈길에도 기쁨이 넘치나니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 CHEVAL1IER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구두 광고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광고는 무슨 상품을 이용하면 어떻게 된다는 식으로 조작된 이미지를 판매한다.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을 소비를 통해 채우라는 명령이다.
오규원은 이렇게 낯익은 광고 문안을 시적 문맥으로 재조립해 소비주의의 무의식에서 깨어나려 했고, 혼란한 시대 속 사물을 제대로 보려 했다.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보고 타락한 언어에 응전한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시는 쓸 수 없다. 이 모순에 대한 인식은 곧 시작(詩作)자체에 대한 반성적 의식으로 이어진다. 김준오는 오규원의 메타시를 주목한다. 


내 앞에 안락의자가 있다 나는 이 안락의자의 시를 쓰고 있다 네 개의 다리 위에 두 개의 팔걸이가 하나의 등받이 사이에 한 사람의 몸이 안락할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작지만 아늑하다.... 아니다
(...)
오 이것은 수천 년이나 계속되는 관념적인 세계 읽기이다 관점을 다시 바꾸자 내 앞에 안락의자가 있다 형광의 빛은 하나의 등받이와 두 개의 팔걸이와 네 개의 다리를 밝히고 있다 아니다
(...)
아니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안락의자의 시를 보고 있다


<안락의자와 시>는 안락의자를 보며 시를 쓰는 과정을 또 한 편의 시로 만든 시다. 김준오에 의하면 이 시는 '시의 기존 관념을 해체시키는 메타시의 극단'이다. 한 편의 시가 의미를 생산하는 기호 체계이듯이 사물 역시 하나의 기호 체계다. 그 자체로 시다. 그런데 시와 사물이 비슷하다면 시의 언어, 언어의 선택과 배열 역시 참조 대상이다.
야콥슨의 구조 시학에 따르면 시에서는 은유가 우세하고 산문에서는 환유가 우세한다. 오규원이 그의 메타시로 하고자 하는 것은 그 구조를 뒤집는 것, 환유를 은유에 등가적인 지위까지 올리는 것이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와도 반짝입니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는 도시 공간을 기술할 뿐인 시다. 오규원은 사이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인식하며 그것을 쌓아간다. 이는 산문적 원리, 즉 환유적인 축적이다. 최하림은 오규원의 이 시기(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의 거의 모든 시가 "사이를 통해 사이와 사이 사이에 있는 것들을 보는"시로 이루어졌다고 3부에서 밝힌 바 있다.
도시 풍경의 사이를 관찰하는, 그래서 오규원 시의 화자는 대부분 관찰자의 시점이다. 이 관찰은 시인의 주관이 들어가지 않은, 거리를 둔 관찰이다. 이 관찰에는 사유도 없으며 관념도 없다. 

김진희는 은유에서 환유로 넘어가는 오규원 시세계의 변화 양상과 그것의 의의를 다룬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오규원은 대중 매체가 지배하는 사회, 타락한 언어가 판치는 세상에서 순수한 의식과 언어를 추구했다. 그것을 기교주의적 자본주의 사회 모습을 시화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다. 그것이 CF 패러디 시였다. 그러나 이 시들이 독자들에게 날카로운 사회 비판이 아니라 익숙한 재미를 떠올리게 된다는 우려가 그의 시세계의 변화를 불렀다는 것이 김진희의 의견이다.
그의 깨달음은 언어가 세계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 다양한 현실은 한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였다. 
그것은 오규원 시로 하여금 은유의 원리의 파기와 환유의 도입을 불렀다. 그의 시에서 환유의 도입은 시를 시각화하는 역할을 한다. 시를 마치 사진처럼 쓰는 것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본질상 개입하지 않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오규원은 사물에 있어서 자신의 감상이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보려 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를 생각해 봤을 때, 우리는 오규원을 타락한 세상 속 순수함에 닿으려는 시인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순수함을 원하는 오규원의 욕망은 곧 언어의 순수함의 추구로 이어진다. 그가 언어를 다루며 깨달은 것은 관념과 명명이 언어를 박제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정과리의 말을 빌리자면, "관념으로서의 자유가 실제 자유를 왜곡"하는 것이다. 대상을 묘사하려 하면 언어는 그로부터 멀어진다. 그렇지만 언어는 삶의 구체성을 대체하는 기호화 작용이다.
이러한 언어의 불가능성과 필연성 사이의 긴장은 오규원이 최종적으로 닿으려 했던 것, 바로 '날이미지'로 이어진다.

날이미지란 날(生)의 이미지란 뜻이다. 언어화와 관념화 이전의 사물의 이미지다. 신덕룡의 말을 빌리자면, "규정되기 전 개념이 배제된 살아 있는 현실로서의 존재"다. 오규원은 이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과 거리를 두며 주관을 통제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택한다.


토마토가 있다
세 개
붉고 둥글다
아니 달콤하다
그 옆에 나이프
아니
달빛

토마토와
나이프가 있는

접시는 편편하다
접시는 평평하다


<토마토와 나이프>는 인식에 대한 부정에 부정을 계속하는 시다. 토마토에 대한 인식은 '세 개'에서 '붉고 둥글다'에서 '달콤하다'까지 아니 아니 하면서 이어진다. 그 다음 옆에 나이프, 달빛에 시선을 돌린다. 화가가 그린 정물을 시로 쓴 듯한 이 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구체적 현실이자 전체를 이룬다는 것, 우주 속에 있음과 어울림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인식은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숨긴 물을 몸 밖으로 내놓은 흙 위로
물보다 진한 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오는 사방을 지우지는 않았다


<사방과 그림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장미는 그 자체로 우주이자 중심이다. 모든 길이 그것을 중심으로 열린다. 사방은 그러면서 중심으로 집중된다. 트임과 공존의 관계인 것이다.

이어 최현식은 오규원의 세계와의 관계 맺기에 주목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의 질감·빛·색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몸에 그것들에 반향하는 내적 등가물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 행위는 곧 나와 사물의 대화이며 그 행위는 세계를 향해 나를 열고 내 안에 살던 무수한 타자들을 되살리는 행위다. 


허공으로 함부로 솟은 산을
하늘이 뒤에서 받치고 있다
하늘이 받치고 있어도
산은 이리저리 기운다 산 밑에서
작은 몸을 바로 세우고
집들은 서 있다


<안과 밖>은 풍경 구성 요소인 산과 하늘을 의인화해 입체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주관적 정서의 틈입을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산은 하늘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7월 31일이 가고 다음날인
7월 32일이 왔다
7월 32일이 와서는 가지 않고
족두리꽃이 피고
그 다음날인 33일이 오고
와서는 가지 않고
두릅나무에 꽃이 피고
34일, 35일이 이어서 왔지만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나는 7월 32일을 자귀나무 속에 묻었다
그 다음과 다음날을 등나무 밑에
배롱나무 꽃 속에
남천에
쪽박새 울음 속에 묻었다


<물물과 나>에서는 '사물의 참다운 개별성과 복수성이 보장되는 수평적 연관 관계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 순환론적 시간으로의 탈주, 현재의 의미를 박탈하여 시간의 가치 서열을 파괴한다. 그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위계 없이 나란히 놓이며, 서로 다른 것들이 뒤섞여 하나의 장을 이루는 것이다.


오규원은 4부에 실린 자신의 시론에서 "말이나 대상의 정체성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믿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요동치며 부정되는 것이다. 
명명과 관념이 대상을 고정해 버린다는 사실의 자각은 곧 한국 시에서 가장 특이했던 실험, 극단까지 나아간 날이미지의 시까지 이어졌다.
오규원의 폐는 지병으로 인해 4분의 1밖에 작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의 3부에 실린 김혜순의 글에서 1층 계단을 오르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체적 조건이 그의 시를 직접 규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절제된 생동감과 간결한 호흡이 나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규원의 주관과 관념을 배제하겠다는 목표가 이뤄졌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한까지 나아가려는 시도가 그의 시집에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러니,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랭이고 싶은 놈은 아지랭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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