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k. 존재 의식
당최 현실에서, 피고인에게도 재판 과정이 비밀로 되어있는 재판이 어디에 있는가.
질서로도 규명되지 않는 재판이라. 그건 어쩌면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식일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는
그 과정 속에서 고통을 완충해주거나, 나를 격려해줄 그 어떤 무언가일 것이다. (정답이 없기에)
이상과 현실 중 양극을 선택할 수 없기에 우리는 늘 고민한다. 인간은 과연 존엄할 수 있는가를!
죄가 있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닌, 재판을 받기 때문에 죄 있는 존재인 우리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여기서 재판을 받기 때문에 죄 있는 존재라는 표현은 탄생과 죽음 측면에서 말한 표현이다.)
l. 청원서
이런, 젠장! 드디어 알겠다. 요제프 K가 선임한 변호사가 청원서를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던 것.
윤리, 인간의 존엄과 같은 문제.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식은 법처럼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가 완충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조력자라면, 청원서를 제출하고, 이 재판을 끝내는 게
목적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법에 순응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끝나서는 안 된다. 끝나면 죽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인 블로크의 청원서는 요제프 K의 청원서와 달리 완성되었던 것이다.
무죄를 말하려는 목적이 아닌, 삶을 연장하려는 그에게 법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인 것이다.
m. 법원 소속 화가, 티토렐리
제조업자의 추천으로 방문하게 된 법원 소속 화가, 티토렐리와의 만남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메시지가 많기 때문이다.
날개 달린 정의의 여신으로 기준이 흔들림을 말하였고, 판결의 세 가지 종류(진정한 무죄, 외견상의 무죄, 판결 지연)을 통해
그가 법을, 질서를 이길 수 없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후덥지근한 그의 방이 마치 요제프 K의 심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화가와의 대화에서 ‘진정한 무죄 판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끝까지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결심’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n. 상인, 블로크
입술을 보면 판결의 징조를 알 수 있다거나, 다섯 명의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말하는 상인 블로크.
그는 5년 동안 소송한 사실을 말한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자기방어일 것이다. 과시를 하지만서도, 아직 예속되지 않은
요제프 K를 의식한 것일 것이다.
그는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살기 위해서, 유예하기 위해서 변호사와 법원 곁에서 살았고, 질서에 굴복했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요제프 K를 볼 때에, 블로크는 얼마나 자기 스스로 붕괴될까. 그 때문에 그는 격노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비굴함 앞에서, 우리는 블로크를 열등하게 보거나 험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블로크는 그저 미래의 요제프 K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도 엄연히 피고인(존엄을 의식한 자)이었다.
o. 대성당
앞서 이야기했듯, 죄가 있기에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받기에 죄가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린 질서에 숨어버리거나, 세 여자의 품 속으로 숨어버릴 것이다.
대성당의 신부는 9원이나 초월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요제프 K가 이해하려고 드는 태도를 종결시키게끔 돕는다.
p. 요제프 K
이 무수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는 어떤 결정을 하였을까?
그는 법의 질서를 저항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완전한 9원이 없다는 사실도, 판결이 의미를 완성해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이 무죄라는 판단을 내면에서 철회하지 않는다. 이해하려 한다. 굴복하지 않는다. 다만 유예한다.
화가 티토렐리의 자택의 어린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법의 질서에 익숙한 인물들의 상징으로 나온다.
맞는 말이다. 모두가 피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왜’보다 ‘어떻게’에, 질서를 ‘의심’하기보다 ‘활용’하는 이들이 비겁한 이들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난 늘 그들을 내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다.
삶의 존엄이 이성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실을 잊은 듯한 태도로 돌아올 것이다.
삶은 분명 이상과 현실의 양자택일, 이분법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는 요제프 K의 고집이 살아있다.
존엄을 지키면 파멸하고, 파멸을 피하면 존엄을 잃는다는 치킨게임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
눈을 감고 내가 요제프 K가 되어 죽음을 상상해본다.
살 수 있었던 그 수많은 기회가 스쳐지나간다. 그렇지만, 이해하려드는 내 습성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에
실소가 나온다. 조금은 뿌듯하다. 그러나 미련하다. 아쉽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우리에게 있는 존엄, 그리고 우리 외부의 질서 사이를 오갈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딘가에 잠시 머물 수 있다. 삶은 정답과 오답 사이의 태도, 상태이다.
지금 이 순간,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 내 머릿속을 또 한 번 스쳐지나간다.
반항하는 인간이 되어 고개를 치켜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죽음 앞에서 느낀 부끄러움은 그를 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도 못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