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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탄
1탄의 그 똥글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좋았는데, 아무래도 독붕이들이 좋아하는 독갤의 스타 하루키와, 가오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결정타, 섹스로 어그로를 제대로 끌지 않았나 싶다.
영화로 치면, 마동석이 깡패 패고, 코미디로 90년대식 꽁트 치다가 마지막에 신파로 마무리 하는, 그런 흥행 보증 수표인 셈이다,
먼저 본격적으로 얘기하기전에 덧붙이자면,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교양강의, 개론서, 그리고 관련 도서를 통해 접해 왔지만, 지금까지의 독해는 비교적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본인은 그의 사상의 핵심 개념과 논증 구조를 충분히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의 사상을 곡해하거나 또는 오독했을 부분이 충분히 있으므로 이 점 유념해주길 바라며, 만약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길 부탁드린다.
앞서 글에서 쇼와 시대의 희대의 개새끼 나기사와에 관해서 얘기했으니 이제는 작품의 주요인물 나오코, 미도리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
나오코
그녀는 기존의 하루키의 문법을 가장 잘 따르는 여성 히로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어떤 면에서 이단같가도 하다.
주인공이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유년기 시절의 여성으로, 신비스러운 이미지와 도통 심리를 알 수 없는 그 화법은, 하루키의 히트작(1Q84,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에서 어딘가 봤던거 같은 느낌을 준다.
보통 그런 작품들에선, 여주는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발사대이자, 주인공의 무의식 층위에 감춰진 내면적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이용되는 열쇠구멍이 된다.
그런 무의식적 세계란 벽을 둘러싼 마을의 형태를 띄는데, 이는 너무나 SF적 측면이 강하므로, 리얼리즘을 택한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이런 설정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하루키는 이를 우회적으로 작품에 드러냈는데, 작중 나오코가 와타나베와 섹스를 한 후, 정신적인 요양을 위해 들어간 요양 마을이 그것이다. (레이코와 만났던 그곳이기도 한)
그곳은 나오코의 세계로, 작중 나오코는 죽음을 표상한다는 점을 미루어볼때, 그곳은 또한 죽음의 세계일 것이다.
여느 하루키 소설과 그렇듯 주인공이 그러한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선 의식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나오코와의 섹스인 것이다.
(참존가의 형식을 빌리자면, 나가사와의 바람기는 매우 가벼운 것,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섹스는 매우 무거운, 운명적인 것과 결부된 것이다.)
키즈키와 그녀의 언니가 나오코를 죽음의 세계에 끌어들였듯, 그녀 또한 와타나베를 자신이 사는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아무튼, 섹스를 한 후 그녀는 요양 마을에 들어가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데, 이는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라는 개념에서 볼때, 매우 은유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로 불리는 욕망을 경계한다.
이를 위해 삶에의 의지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고,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금욕적 삶을 이행함으로써,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라고 주장한다.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섹스는 일종의 삶에의 의지란 존재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삶에의 의지에 대한 인식은, 연민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는 연민이란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의지에 대해서 인식하는 계기이다.
둘의 섹스는 단지 성적 충동에서 비롯된게 아니다.
나오코의 전 애인이자, 와타나베의 절친인 키즈키의 죽음을 매개로한 일종의 애도이자, 장례식인 것이다.
(다만 나오코는 단지 연민으로 머물 뿐이였다면, 와타나베는 연민을 사랑으로 발전시켰기에 문제가 된다.)
둘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연결되고,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연민을 품게됨으로써 삶에의 의지를 인식한다
이로써, 다음날 나오코가 요양 마을로 떠난 것은, 앞서 말한 인식의 다음 단계 즉, 삶에의 의지의 부정을 위해 금욕적 삶으로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돌아와, 나오코는 요양마을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정신 치료를 위해 금욕적 삶을 이행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삶에의 의지와 고통은 이보다 훨씬 무거웠으므로, 삶에의 의지가 그녀의 고통을 이기고 그녀는 삶에의 의지가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인 살자를 취한다.
살자, ”살자는 ‘의지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삶에의 의지가 작동하므로, 삶의 부정은 맞겠지만,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아닌 것이다.
*
미도리
이 작품에서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 중 하나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가 하나 둘 등장하는데, 놀숲에서는 그게 미도리인 것은 분명하다
미도리의 태도는 맹목적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다, 나오코가 죽음의 세계에 머물러있다면, 미도리는 대척점, 즉 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삶에의 의지는 어떤 가치 판단과도 무관하다.
그것은 낙관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행복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의지의 본성은 오직 하나 맹목성 달리 말하면 지속성이다. 의지는 살아남고, 반복하고, 자신을 연장하려 한다. 따라서 의지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삶이 의미 있는가”가 아니라 “삶이 계속되는가”이다.
이 점에서 미도리는 매우 맹목적인, 의지적인 존재다. 그녀는 삶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살아감은 거의 반사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변태적인 성적 태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에서 미도리를 볼때마다 흐뭇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성적 충동은 삶에의 의지가 가장 농축된 형태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섹스는 쾌락이므로, 동시에 권태를 유발하는 상태, 또 고통으로 회귀되는 상태를 품는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섹스는 결국 고통을 유발하는 욕망으로, 이를 극복해야될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오코는 권태와 고통 사이를 가장 역동적으로 옮겨가는 존재이다.
섹스를 단지 극복해야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선 가장 위태로운 존재일 수 있으나, 고통과 권태 사이를 그만큼 빠르게 옮겨가고, 이를 극복할 수단으로써 보지 않기에 나오코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
와타나베
와타나베를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라는 개념으로 조명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삶을 부정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삶으로부터 반 걸음 물러나 있는 인물, 다시 말해 의지의 작동을 최소화하려는 방향으로 자신을 조정한 존재에 가깝다.
키즈키의 죽음 이후 와타나베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명백하다. 타인과 깊이 연결되지 않고, 감정을 절제하며, 세계에 과도하게 기대하지 않는다.
미도리가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냐”고 묻자 그가 “더 이상 타인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하는 장면은 이 태도를 정확히 드러낸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 욕망과 기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타인을 원하고, 사랑을 기대하고, 세계가 의미를 제공하길 바라기 때문에 상처받는다.
따라서 욕망을 줄이고 관계를 최소화하는 태도는 일종의 초기적 금욕으로 읽힐 수 있다.
완전한 의지의 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의지가 만들어내는 고통의 경로를 차단하려는 시도다.
이 점에서 초기의 와타나베는 쇼펜하우어적 삶의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거리가 어떠한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실 이후의 방어 기제라는 점이다.
그는 의지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만들어낼 또 다른 상처를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의지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충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이 거리는 일시적인 평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삶의 밀도를 감소시킨다. 의지가 약해진 곳에서는 고통도 줄어들지만, 살아 있음의 감각 역시 희미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코와의 관계, 그리고 특히 그들과의 섹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앞서 말했듯 그들의 섹스는 단순한 성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키즈키라는 죽음을 매개로 형성된 공동의 상처,
다시 말해 연민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묘한 어긋남이 발생한다.
나오코에게 연민은 멈춤의 정서다. 그녀는 고통을 너무 깊이 받아들인 나머지 그 안에 정지해 버린다. 반면 와타나베에게 연민은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연민을 사랑으로 변환한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삶에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표출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다가가고, 관계를 지속하려 하며, 존재를 함께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의지의 긍정이다.
따라서 나오코와의 섹스 이후 와타나베에게 발생한 변화는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의지가 다시 그의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의지의 재점화는 곧 또 다른 긴장을 낳는다.
왜냐하면 의지는 와타나베를 다시 고통의 가능성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시점에서 그는 나오코의 죽음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이렇듯 나오코를 사랑하는 순간, 와타나베는 다시 상실의 위험을 떠안는다. 의지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삶의 고통을 다시금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하다.
이때 미도리와 레이코라는 두 인물이 와타나베의 삶에 등장하는 방식은 와타나베에게 어떠한 태도를 제공한다.
레이코는 나오코가 머무르는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놓인 경계적 존재다.
그녀는 상처 입었지만 완전히 붕괴하지 않았고, 욕망을 절제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그녀는 의지를 완전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중간 지대에 서 있다. 와타나베에게 레이코는 고통 이후에도 삶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형태이다.
반면 앞서 말했듯 미도리는 나오코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그녀는 와타나베가 나오코로 상징되는 죽음의 세계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현실로 끌어당긴다.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감정을 솔직히 표명하는 생명력을 대변한다.
초기의 와타나베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쇼펜하우어적 태도로 의지를 억제하려 했다면, 미도리는 그 억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의지에 대한 적절한 거리를 조정하게 도와준다.
여기서 우리는 와타나베의 본질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는 나오코처럼 의지에 압도되는 인물도 아니고, 미도리처럼 의지와 자연스럽게 동화된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의지와의 거리를 끊임없이 조정한다.
이 왕복이 바로 그의 인간적 깊이다.
그의 나오코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의 삶에의 의지 또한 깊어진다.
나오코의 상태가 괜찮을때는 이는 희망과 쾌락으로 번지는 순간이었으나,
결국에는 나오코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그는 나오코를 죽음의 세계에서 꺼내, 현실로 돌려 놓겠다는 의지를 품지만, 되레 그가 나오코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마침내 나오코가 살자하고 와타나베는 어딘가에도 설 수 없는 인간이 된다.
나오코가 죽음의 세계로 빨려들어간 그때, 와타나베는 현실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언어로 말하자면, 와타나베는 의지를 초월하지 못한 채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는 의지의 끝도, 그를 극복하지도, 못한 경계의 서있다.
이때 소설 마지막 부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후략)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죽고 미도리를 택한다.
이 점에서 와타나베는 죽음을 향해 수렴하는 인물도, 맹목적으로 의지를 부정하는 인간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미도리에 대한 선택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와타나베의 성장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본질적으로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럼에도 다시 의지를 긍정하는 과정이다.
그의 변화는 낙관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오히려 더 성숙한 형태의 삶에의 의지의 긍정이다 고통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사실까지 포함한 긍정.
이 선택은 단순한 연애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고통을 알면서도 다시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와타나베는 완전한 해탈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부정에 이르지 못한다. 대신 그는 훨씬 인간적인 위치에 머문다.
또 참존가를 나기사와의 병적인 바람기를 설명하는데만 이용했으나, 좀 더 이걸로 본질적인 얘기를 해야될 것 같다.
갑자기 뜬구름 잡는 중2병 아포리즘적 선언을 해서 미안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하자면,
쇼펜하우어의 금욕적 삶이란 참존가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나도 가벼운 것이다.
삶은 고통을 수반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이다. 고통이란 부정적인 것, 참존가에서 부정적인 것은 무거운 것으로 비유된다.
삶에의 의지의 존재를 긍정해야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의지를 부정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참존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너무 키치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그딴게 가능한 낭만적인 것으로, 또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
(너는 딸치는걸 그만둘 수 있는가?
그리고 쇼펜하우어도 피리불고 잘만 살았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처럼,
의지의 부정과 삶의 고통이란 모순을 이해해야한다.
둘 사이의 중용적 거리두기가 곧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이며, 그것의 귀결이 와타나베라는 생각이 든다.
총총
똥글 읽어주셔서 감사
- dc official App
이 중용적 거리두기는 냉소적 거리두기와는 다르겠지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섹 파 구하는건 여기가 제일 쉽더라
http://eiour.com
8년만에 놀숲을 다시 읽고 와봤는데, 좋은 통찰과 해석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