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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이야기-박경리행사:독자와 작가의 정겨운 만남 금요일의 문학이야기일시:20000728장소: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출연:박경리원본소장처: https://artskoreatv.com동영상이 마음에 드셨나요?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월정액 1,000원 이상의 후원채찍을 주십시요.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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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토지 이야기지만 작품 토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박경리가 생각하는 문학과 현재와 미래 사회에 대한 우려 뭐 그런 게 담겨 있음. 나는 박경리 작품을 안 읽어봤고 일본 문학 깠던 내용만 알고 있는데 확실히 생각하는 바를 보니 미시마 이런 사람들하고는 정말 반대되는 입장 같음.
궁금한 사람들은 읽어보시라. 저번에 이문구랑 다르게 딕션이 엄청나게 좋은 게 아니라 생략한 부분도 좀 있고 제대로 못 적은 부분도 있음.
제가 원래 또 성격이 내성적이고 앞에 나서는 거를 싫어한다기보단 어려워하고 그리고 또 토지를 20년 넘게 썼기 때문에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하는 것이 습관화 되기도 했고 그래서 제 생각에는 나이가 좀 들면은 외부에 안 나가는게 예의인 것 같아요. 노인네들이 뭐 밖에 나가서 하는 게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게 더 좋은 것 같고, 또 쓸 수 있으면 글은 더 써야 할 것 같고. 내 생활은 단조로워요. 글 좀 쓰고 할 수 있는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때는 문학이라는 게 쓰는 작업도 어렵지만은 생활 태도라던지 무슨 사회적으로 어떤 압력을 상당히 느낍니다. 뭐 저런 백화점에 뭘 사러 가도 독자들을 만나면 갑자기 긴장이 되고 의식을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자유를 뺏기고 산다고 해야 할까요? 자유로우려면은 할 수 없이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거든요. 오늘 특별히 생각한 것 없고 여러분들이 무슨 얘기를 원하는지 좀 해달라고 하면은 질문같은 게 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근데 이러면은 애들이 질문을 하나도 안 해요. 한 사람도 안 해요.
그래서 내가 김윤식 교수한테 물어봤어요 서울대도 그러냐고 그렇대요. 근데 옛날에는 상당히 침묵을 두려워했거든요. 질문 받은 사람이 모르는 것은 요담에 내가 알아가 얘기하겠다 이런 식인데, 그런 점에서는 뭐라 그럴까요 입장이 바뀐 거죠, 그게 오늘 현상이기도 하고. 첫째는 그 요즘 애들이 사고하는 것이 상당히 기계적으로 돌아가니까 배운거 달달달 그런 게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각을 할 때면 질문하고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 점에서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볼 수도 있고, 근데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그걸 쓰면서도 어제도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토지 쓸 때도 그랬고 산문을 쓰는데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소설을 쓸 때 실마리가 안 풀린다던지 사건을 진행시키는데 걸림거리가 생긴대든지 여러가지 맥히는 게 있지요. 근데 요즘에 내가 쓰는 글을 보면 어린애들 예술 문제거든요 딱히 예술에 문제가 여러가지 있겠습니다만은 우리 인류의 미래라든지 이런걸 생각할 때 그 자체가 굉장히 힘들다는 게,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힘들다는 거죠. 힘이 드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는 이게 우리가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데, 이 글을 내가 쓸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 굉장히 힘들어요. 왜냐면 사회가 전반적으로 내 앞에 있는 좁은 공간만 보고 있지 총체적으로는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 앞만 이리 보기 때문에 그것도 멀리 내다 보질 않고 눈 앞만 보거든요. 근데 또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사회 전반에 있어서 어느 모습도 균형이 깨어지질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주 말단의 농촌으로 들어가봐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주의라 해야 할까요? 철저하게 깔려 있거든요. 근데 상업 저기가 모든 것을 끌고가고 있으니까 소위 자본주의죠 이게 이윤을 챙길수 있다면 지옥이라도 가는 주의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윤 제일주의고 그게 합리화되어있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막을 도리가 없는 거거든요. 가령 우리가 피서지에 가가지고 조그맣게 그 무슨 음식점을 차린다던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환경 문제 얘기하고 우리가 먹고 살아야지 이러거든요. 근데 솔직히 말해서 길가에 앉은 나물 파는 사람들은 자본이 없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죠 당연해요.
용납될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적어도 식당을 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본이 있고 또 호텔 짓는 사람도 그렇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거든요. 기본적인 게 아닌 이윤을 얻기 위해서 그런거지 그 이윤이라는게 뭐 끝이 없거든요 욕망이죠 그거도 그런게 팽배해 있고 이게 먼저 말한것처럼 시골 구석에 가도 그런 끝없는 의식 위에 되어있기 때문에 어딜 가도 우리가 동일한 보이지 않는 하나의 그 뭐라 할까요 큰 힘이라고 할까요 이게 앞서지 우리 인간성이라는게 자꾸자꾸 약화되가거든요. 어디 가가지고 인간적인 따뜻함, 이거까지도 상품화되어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번에 글을 쓰면서 뭐를 생각헀냐면 글을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해서 괴로워했는데, 그 이유는 음 오늘의 현실이 너무나 가속화되어 있어, 저지 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순간이 지날때마다 날아가 버리는거에요.
가령 전자제품을 이거를 얼마 쓰면 버리고 새로 사고 데리고 오고 컴퓨터도 의식도 언어는 더 그래요. 문학하는 사람들한테는 언어가 굉장히 중요한 수단인데, 요즘 학생들이 말하자면 진리의 전당, 상아탑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전당이니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촌놈이다. 또 그런 말을 가지고 훈시(가르쳐 보이거나 타이르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양의 가죽을 쓴 이리(늑대)다. 이미 대학은 진리의 전당이 아닙니다. 말 자체가 낡아버린 겁니다. 낡고 낡다 하면 없어지는 거죠. 가령 헌처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처녀라는 말이 실감이 나나요? 옛말에 노랫말에 있었을 뿐이지 그 자체의 생명력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순간순간 말이 주고가고 말이 날아가기 때문에 글쓰는 사람이 나는 사실 글쓰기가 무섭다는게 그렇게 됩니다. 물론 어떤 정신적인 사상 이념 다 날아간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오늘 쓴다는 게 무서운 거죠.
오늘 쓴다면 이 낡은 생각인 거죠. 그걸 어디서 보냐 하면은 어떤 이쪽에서 하는 말에 대해서 사회가 얼마만큼 받아들이느냐 그것도 무서운 거죠. 얘기를 해도 이게 동해바다에 돌 하나에 던져지는 반응밖에 없다 그렇다면 글쓰는 게 무의미하잖아요? 그런 고민이 상당히 좌절하게 하고 그래서 인제 문학을 또 생각하게 되는데, 도대체 문학이 뭐냐?
상투적인 질문인데 왜냐면 언어라는 것은 절대 진리 자체 까지 갈 수 없습니다. 내가 며칠 전에 누굴 보고 얘길 했어 궤변이라는 말이 있어요. 근데 이게 자세히 따져보면 우리 세상에 궤변 아니게 있느냐, 언어라는 거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 내가 옛날에 토지 1부에 서문에다 그런 애기를 쓴 적이 있어요. 언어가 가진 낯섦. 왜냐면 우리가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진실에 도달할 수 없지 않아요? 진실이 하나의 귀향이라면 언어만이 건널 수 있는 배인거에요. 그러나 그 배가 피안에 갈 수 있느냐 절대 못 갑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고 왜냐 그 배만이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따져보면 궤변 아닌 게 없다는거에요. 그럼 문학은 뭐냐? 이것도 지극히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문학에 대해서 정리한 사람도 많고 문학 개론에 보면 어쩌고 저쩌고가 있는데, 언젠가 내가 조지훈 선생의 논집에 미를 추구한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령 문학은 미를 추구하는 건가 한번은 또 박범신 작가 그분이 한번 오셔가지고 김약국의 딸들 얘기를 하면서 유미주의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펄쩍 뛰었습니다. 절대 아니다. 그걸 필요 이상으로 펄쩍 뛰는 이유는 난 문학을 그리 보지 않기 때문에. 그니까 그래서 내가 조지훈쌤 글 읽고 약간 실망 비슷하게 했는데요. 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근데 우리가 뭐 철학에 있어서 이 미를 추구하는 걸 부정을 안하지만 그 미가 뭐냐 진실된 것 또는 그 선성(仙聖)이 뭐냐 선성을 생각해봤어요. 첫째는 생명에 대한 자비, 또 연민 그것으로 선성을 얻는다 생각했습니다 그것 없이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거죠. 가령 우리가 꽃을 아름답다 이러면은 종이 꽃 가지고 아름답다 안 합니다. 그 꽃이 능동적으로 살아 숨쉰다는 것, 그렇기에 아름답다는 거죠. 그래서 생활을 떠난 삶을 떠난 문학이 나는 있을 수 없다고 항상 생각했기 떄문에 유미주의라고 할 때 펄쩍 뛰었습니다. 유미주의는 다만 탐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탐미주의라는 건 쾌락주의하고 상통하는 겁니다. 쾌락주의하고 상통하게 되면 이건 진실과 선성과 별개로 다만 미만을 추구하는 것, 일종의 허상이라 볼 수 있죠. 이게 내가 항상 일본을 비판하는 게 일본의 전통이 바로 이 쾌락주의와 탐미주의에요. 그게 인제 반성하지 않는 게 일본의 탐미주의라던가 쾌락주의 이런 바로 군국주의와 통하는 거죠. 그런데 언젠가 내가 일본의 문화를 에로와 그로와 넌센스라는 말로 집약해서 물론 내 말은 아닙니다11만은 일본의 문화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하여간 맹렬히 비난을 했더라고요 근데 에로그로넌센스*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내가 만든 줄 알고 비난을 받았는데 에로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에로티즘이고,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 그리고 넌센스 이게 어디서 나온 말이냐면 일본의 1928년... 하여간 만주사변이 나기 전에 일본 사회가 아주 극도로 퇴폐풍이 많이 되었을 때 이미 소원히 등장했던 말이에요. 근데 그 말이 참 절묘하게 집약한 말이에요.
*에로그로넌센스(일본어: エログロナンセンス 에로구로난센스)란 "에로(선정적)", "그로테스크(엽기적)", "넌센스(우스움)"를 조합한 단어로, 쇼와 시대 초기의 퇴폐주의 풍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1930년(쇼와 5년) 그전까지 사용되던 에로그로에 넌센스를 추가해서 사용되기 시작, 유행어가 되었다.
말하자면 에로티즘이 계속적으로 그 어떤 삶의 방식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또 에도 시대(?)와 마주 보는 전부가 완전 무결하게 에로티즘이에요. 그로테스크하죠. 이 에로티즘과 그로테스크. 생각해 보세요. 무의미한 거죠. 넌센스예요. 에로티즘이나 그로테스크가 어떻게 발전하는가 하면 수준이 높아지면 탐미주의가 되고 낮아지면 괴담이 돼요. 다만 표현 방법이라든지 이런 게 차이가 나서 하나는 순수문학, 대중문학이 되죠. 근데 일본의 괴담이 그게 말하자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거 아니에요? 감각적인 거죠. 다만 감성이 아니고. 감각이라는 거는 바로 생리적인 것이고 감성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에요.
내가 얘기 준비도 안 했고 참 두서가 없네요. 그래서 내가 문학에 참 정의를 내린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우스운 거고, 우리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생활의 필요에 의해 대충 말하자면 생략하거나 아니면 틀 속에 넣어서 뭐다, 일종의 개념적, 개론적인 것, 그런 게 다 진실이라 하고 우리가 어떤 진실이라는 것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고, 시간도 그렇고 한 시간, 두 시간 그런 건 필요에 의해 만든 거지 시간에 대한 개념일 수가 없지요. 1초, 1분. 근데 우리에게 생활의 필요에 의해 토막 내거나 통속에 넣거나 이데올로기니 신에 대한 개념이니 이런 게 다 언저리를 돌고 있지 핵심 속에 들어갈 수는 없거든요. 그 얘기가 참 산만한데,
이를테면 음풍농월이라고 옛날 시인들을 현대 식자들이 꽤나 비웃고 비판했지요. 근데 오늘날 보면 자본주의의 하나의 시각이죠. 사실상 우리는 음풍농월할 자연도 시간도 굉장히 없어요. 없는데 또 교육이라는 말도 너무너무 낡아서 그 의상을 못 벗어요. 대학이고 어디고 고등학교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그런 것인데, 또 대학 들어가면 사회의 어느 부품처럼 기능 교육만 시키지 근원적인 학문은 점점 어느 대학이든지 철학과든 역사학과 이런 거는 인기 없는 과목입니다. 없애자고, 돈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사실상 교육이 없는 거지요. 대신 기능 양성소, 기능공, 사회의 어느 부서에 가져다 넣을 수 있는 그런 걸로 내놓지 하나의 인격체로서 내놓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육이라는 건 누더기를 안 벗어요. 진실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모든 사회가 교육은 하나의 예를 들었을 뿐이지 모든 데에 있어서, 가령 언어를 사용할 때 소생의 계절 이러는데 사실적으로 보면 움이 트고 풀도 돋고 소생의 계절이죠. 근데 이게 얼마나 건강한 것인가 얘기하자면 자연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강가에 고기가 수만 마리가 죽어서 썩고 있고 또 산에는 덫이 깔려서 이거를 우리 감성이 용납할 수 있겠어요? 너무 끔찍스럽죠. 그런 말하면 한편에서는 소생의 계절,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이거는 누더기 옷 입고 있는 거랑 똑같잖아요. 진실이 이러지 못한데 무슨 희망을 찬미하고 현상과 실체가 너무 괴리되어 있는, 가만히 생각하면 낡아버린 언어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없어지는 언어도 많지요. 이게 참 사람의 머리는 단순한데 복잡한 기계를 다루려면 사고를 버려야 돼요. 그게 아니면 복잡한 구조를 박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회 자체는 복잡하고 인간에게 더 복잡한 것을 이끌어 나가려면 인간이 단순화되길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전공 분야가 생기는 거죠. 수도 없이 갈라지고 이러니까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면 할 수가 없는 게 아니고 안 하죠. 아주 부분적인 분야만 파고드는 거죠. 학생들은 질문을 못 하는 게 바로 그런 거다. 그런 것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어요. 문학에 있어서도 어느 부분만 파고들어요. 문학이야말로 총체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데입니다. 의사는 손에 상처가 났으면 그 상처만 봅니다. 세상에 인간을 위하지 않는 직업은 하나도 없어요. 또 경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돈을 다루고요, 종교는 착하게 살아라, 하나님 믿어라, 그런 것도 다 인간을 생각하거든요, 대상으로 하고. 그러나 문학은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인 거예요. 그러나 왜 문학이 존재하느냐, 문학이 바로 총체적인 거거든요. 말하자면 여기 눈을 다쳤으면 의사는 눈만 보고 살아 있는 사람의 눈에도 전체는 잊어버리고 눈만 보게 되는데, 그러나 문학은 인간 전체를, 총체적인 거죠. 거기서 공감도 총체적인 거죠. 오늘날 근데 보고 있으면 문학도 눈만 보듯이 그런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총체적인 보는 것,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는 것 또는 우주, 지구, 이거를 총체로 파악해가지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게 옳지 조그만 부분을 가지고 밖으로 확산해가는 거, 그거는 어렵고 또 그걸 파악하지 않으면 생명을 이해할 수 없죠. 그래서 문학이라는 게 요즘에는 굉장히 좁은 통로로 가는 것 같아요. 아주 좁게.
그러고 또 하나는 좁아지니 뭐가 생기냐. 여기는 진리의 추구라든지 선성의 추구라든지 이게 없고 미의 추구, 예술은 아름다운 것, 아주 좁아지는 거죠. 근데 우리가 삶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아름다움 없어도 생존할 수 있어요. 근데 말하자면 한 알의 밀, 그거는 하나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생존하는 데 절대적 진실이에요. 또 선성이라는 이거는 생명에 대한 영유, 자비심, 그런 게 어떻게 추구함으로써 그 생명의 아름다움, 삶의 아름다움, 그 같은 차원에 있는 거죠. 근데 오늘날 보면 이 세상에서 장식품이 범람하는 시대가 없는 것 같아요. 살아 있는 생명은 없고, 내가 어미 얘기를 많이 한다만은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행사의 주인공의 의상에 따라서 꽃을 막 차요. 그거를 보고 있으면 생명을 함부로 생명을 대하는 거죠. 분노라고 할까요, 연민이라고 할까요. 그 꽃들이 다 생명이에요. 근데 우리가 옛날에 어머니가 나가가지고 꽃들 꺾으면 왜 그것도 생물인데 왜 모가지를 자르냐 이렇게 야단을 맞았거든요. 또 이제 상여잖아요. 그것도 전부 종이 꽃이에요. 잘 사는 집에 가면 노인네가 아주 호상이라고 하죠, 상여를 만듭니다. 흰 종이 전부 남정네들이 모여가지고 만들어요. 이게 우상이죠. 생활 없는 법은 없어요. 근데 여러분 생각해보면 문화가 그런 거거든요. 그게 자본주의 추구입니다.
하늘 농장(?)이라는 게 있어요. 첫째는 땅을 점령하죠. 거기서 먹을 게 생산될 자리를 거기에 인력에 시간에 자본이 들죠. 그게 우리 생존에 필요한 겁니까? 아니죠. 소위 모가지 잘라가지고 거기 가면 몇 시간 장식, 아주 끔찍스러운 걸로 가득 차니까 하나도 안 아름다워요. 그 꽃은 머리 자른 시체들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행사가 끝나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요.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얘기하자면 시장에 가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도 없어도 살 만한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근데 내가 편리함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청교도처럼 일체 검약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건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되도록 여유 있고 편하게 사는 게 좋죠. 근데 그 이유는 내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대가도 엄청난 대가예요. 그런 게 결국 우리가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가요. 다 불필요한 것을 생산해서 오는 거거든요. 근데 또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원자탄이 왜 필요합니까? 사람 죽이는 무기인데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힘을 쓰고 돈을 쓰는데.
그래서 이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적어도 글 쓰는 사람이 살아 있는 아름다움, 삶의 아름다움 그걸 생각해야 하지, 죽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 종이 꽃의 아름다움, 요새 문학이 그런 느낌입니다.
지구라는 총체, 그 속에 우리가 한 부분이고 우리 삶을, 진실을 추구하는 또 나갈 방향, 더 질 높은 생활, 존속 이런 걸 생각한다면 지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말하자면 통속 소설이라고 할까요, 삼각관계라든지 애정의 갈등이라든지 그런 게 인류가 시작되면서 있던 소재인 거고 되풀이하는데 약간의 각색을 해가지고 쓰는 거거든요. 근데 자세부터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느냐, 그게 아니라 많이 팔리느냐, 유명해지느냐 그런 게 참 오늘날 문학의 고질이고 병이에요. 물론 문학이 오락을 위한 분야도 있을 수 있어요. 옛날에도 뭐 심심풀이로 읽었던 책이 있었는데 그거는 말하자면 심심풀이죠. 근데 그게 다 어떤 종류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로 삼는 것은 그게 주류가 된다는 거죠. 그게 문학의 본질같이 된다는 게 문제고, 여러분들이 독자의 입장인지 또는 문학 지망생인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섭섭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주부나 여유 있는 여성들 이런 사람들이 문학을 해가지고 유명해지겠다 또는 나한테 하나의 장식적인 효과, 무의식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작품 수준도 안 되는 걸 돈 있는 사람들이 막 돌린다든지 그 자체는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게 결여되어 있어요. 그런 게 또 한국 문학을 상당히 힘들게 하는 요소가 아닌가.
내가 한번 텔레비전을 보니까 지체 장애인들 어떤 여성과 대화를 하는데 우리는 시간이 좀 많거든요. 그래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시간이 있으니까 책을 낸다고. 그 발상이 문학이라는 게 시간 있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이 인생을 장애인으로서 인생과의 대결에 있어서 치열한 삶을 쓴다면 얼마나 좋은 작품이 되겠습니까. 장애인이라는 게 상당히 문학에 있어서 치열성을 상당히 유효하게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있다’ 이런 발상.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지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근데 우리가 사람은 빵만 가지고 살 수 없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배가 고픈 거예요. 이렇저렇 잡탕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 정도로 하지요. 질문 있으면 하시면 됩니다.
Q. 이런 언론이나 이런 부분, 자본에 대한 이런 것들이 너무나 많은 상업적인 것들로 흘렀는데 그러면 우리가 맞서서 싸워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무도 그 방법을 얘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문학이 이렇게 되었고 과연 우리가 정말 땅으로 돌아가서 살았을 때 인간이 최소한으로 누릴 수 있는 삶, 그 정도가 보장이 되어야 하잖아요. 근데 우리 사회는 그게 보장이 안 되잖아요. 제가 봤을 때 거의 죽을 것 같은데 그런 걸 과연 어떤 식으로 해서 해결을 할 수 있느냐 그런 부분을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A. 내가 수없이 절망하고 그런 문제를 생각하는 게 오늘 사회에서 볼 때는 일종의 망상 같아요. 근데 내 얘기는 이게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인류적인 차원이라는 문제죠. 내가 이제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기대해 보는 거는 인간이라는 거는 항상 부딪히며, 인간뿐만 아니라 개미도 벽에 부딪히면 방향을 돌리잖아요. 인류도 끊임없이 방향을 돌렸는데 그런 의미에서 장담할 수는 없죠. 그게 하나의... 근데 또 돌릴 것이다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에요. 왜냐, 말하자면 원자탄도 지구를 파괴할 만큼 있거든요. 돌리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 온난화라든지 환경 호르몬 문제든지 알 수 없는 질병 이런 게 다 지구 차원인데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자본주의가 마지막 막판에 부딪히는 거예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지만 유물론 얘기는 둘 다 똑같아요. 물질이 선행하는 것. 근데 이게 이제 부딪혀서 온갖 현상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방향을 어떻게 돌릴 것인가. 상당히 안이하게 생각하는 거죠. 옛날엔 어느 사상이 처음엔 필요에 있어서 막히니까 돌려서 나온 생명력을 가져서 전성기가 있고 내리막이 있고 죽거든요. 그게 현상인데 거기에도 탄생과 생존, 사망의 길을 걷거든요. 그 소위 문학 사조, 예술 사조 보면 끊임없이 나오고 사라지고 그것처럼 벽에 부딪히면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한다는 거고, 참 자신이 없어서 완전히 신뢰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글을 쓸 필요가 있는가 괴로워하는 건데 지금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오지 않으면 이대로 가속화된다면 너무나, 과학자들도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틀림없이 지구가 멸망하는 건 그 전에, 그 전에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보고 있어요.
여태까지 인류의 역사 중에서 투쟁의 역사가 인간만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어요. 자유, 평등. 이게 또 모순이에요. 자유로우려면 평등할 수가 없고 평등하려면 자유가 없어요.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유가 있겠어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이 있습니까? 재벌도 있고 하루 벌어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근데 자유는 있고. 일관성 없는 걸 가지고 궤변 아닌 게 어딨냐 그 말 거기서 나온 건데 이게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가지고 끊임없이 혁명을 하고 그게 또 혁명이 나요. 이게 역사거든요. 근데 여기서 생명의 평등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만 인류의 역사라는 건 인간에 대한 박애심뿐이에요. 근데 자연의 다른 생명에 대해서는 이거는 인간들이 전지전능한 신과 같이 학살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하고. 근데 환경 운동가들 무슨 얘기 합니까? 먹이사슬이 깨지면 못 산다, 새가 못 사는 세상은 인간이 못 산다. 즉 인간이 주거든요. 인간이 살기 위해 그런 게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 생명이 다 평등하게 산다는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그런 뜻에서 이건 획기적인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반박할 사람이 있죠. 왜냐하면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다른 생명에 대해서 자비심을 품으면 어떻게 사느냐. 먹이사슬이라는 건 모든 생명에 있어서 살아가는 필수 조건이기도 하지만 참 생명적인 겁니다. 살아 있는 건 반드시 살아 있는 걸 먹어야 합니다. 야채, 곡물, 생선 뭐든 게 살아 있는 거거든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야채도 땅, 살아 있는 요소가 있는 것에서 자라고 산은 동물, 새 시체들이 하나의 영양으로서 깔려 있어요. 풀도 야채도 다 생명을 먹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 먹이사슬을 끊지 않는 지혜로 산다면 된다는 얘기인데 오늘의 현실을 보면 생존할 만큼 취한다면 절대로 먹이사슬이 안 깨져요. 왜냐하면 불필요한 걸 위해서 하니까 깨지는 거죠. 없어도 되는 걸, 다시 말하면 욕망 때문에. 생존에 의한 게 아니고 욕망 때문에 끊어지는 겁니다. 물도 썩고 여러 가지 현상이 나죠. 그러면 우리의 섭리라는 건 인간의 손을 빌려서 개벽을 하는 거죠. 천지개벽은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노아의 홍수를 예상할 수 있거든요. 만년설이 다 녹아버리면 그게 노아의 홍수죠.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되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 말하자면 오늘을 팔지 말자는 얘기예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말하자면 먹이사슬이 안 끊어지는 정도로 우리가 생존하고 적당히 욕망을 줄이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읽었음. 자연주의 관점은 제각각 의견이 있겠지만 문학이 협소해지고 미에 집착한다는 부분은 지금 국문학에도 여전히 유효타라 생각이 드네 솔직히 말해서 한국 현대문학이 원시인간에 대한 고찰을 버리고 자본긍정의 토대 위에서 도시인의 생활반경만을 그리는 게 불만임 나는
이 강연 시리즈가 아마 문학동네에서 나온 <나의 문학 이야기>(2001)로 출간되었을 거임
오
굿 - dc App
와 글 잘 읽었음.. 타이핑하느라 고생하섰을텐데 감사합니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