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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칙어 때문에 글이 자꾸 삭제되는 걸 인지했음. 금칙어를 얍얍으로 대체하겠음 **


+도서 구매 인증도, 출판사 추천도, 플로우 차트 안내도, 성취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는 독갤러들에게 늘 감사함


독갤 기조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음 고인물들은 고여만 가고, 유입은 줄고, 읽는 것도 어려운데 남기기까지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테니


양질의 글들은 줄어만 가고, 그에 따라 경각심, 각성에 대한 주제가 상기될테고, 허나 이를 관조하면서도 그 어떤 당근을 제공할 수 없는 구조의 한계를 느끼고,,,


나는 책을 오래 읽지도 않아서 어떤 출판사가 좋은지도 모르고, 독서에 있어서 어떤 계보도 잘 모르다보니 도울 힘이 없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옛날에 쓴 독후감을 가져와봄 뭔가 눈치 보여서 올리는 것이니 무관심이여도 괜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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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서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접한 뒤,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주인공인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도 의연하고, 검사와 판사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얕게나마 이해하였다.

그렇지만, 신앙으로의 회피를 종용하는 신부에게 격노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그가 그토록 확고, 의연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죽음 앞에서, 시간의 유한성 앞에서 반대로 삶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은 쉽지만, 막상 닥쳤을 때에 인간의 몸뚱아리로 이해하고 실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영역일 것이다.


나는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말하는 부조리의 세계에 대한 반항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이방인 독서 직후에 곧장 접한 작품이 바로 시지프 신화이다.

그렇지만 첫 단락인 부조리의 추론의 내용이 굉장히 심오하여 시간을 투입하다 잠시 도망쳤다.


그렇게 다른 고전 문학을 표류하다 서서히 부조리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단 실존주의 소설가, 철학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의 작품 속에 부조리라고 표현되지 않았을 뿐, 부조리가 심어져 있었다.

또,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보며 부조리에 대한 이방인과는 다른 접근 방식, 인식을 느끼며 희열을 갖기 시작했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차이가 궁금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시지프 신화에 도전할 수 밖에 없었다.

시지프 신화를 완독한 현재의 감상을 기록코자 한다.


a. 긍정과 부정, 모순

카뮈는 부조리와 얍얍에서, 철학적 해결에 있어 긍정과 부정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다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여전히 의문인 상태 또한 존재하며, 겉으론 긍정하며 속으로는 부정을,

겉으로는 부정하며 속으로는 긍정하는 모순 또한 자주 목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전에 썼던 글인 ‘사람들은 왜 얍얍하지 않는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사고보다는 습관에 의해서 살고, 그렇기에 얍얍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삶의 의미를 느끼고 믿는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이들, 그들은 정녕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일까? 부조리에 반항하는 것일까?



b. 의식

카뮈는 일상의 판에 박힌 행동을 이어 주던 끈이 툭 끊어지고, 이를 다시 이을 끈을 찾으려 해도 헛된 일이 되는 것 같은

경험을 부조리의 첫 징후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느낌을 받는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십수년간의 진학을 마치고 사회에 뛰어들어 허상의 꿈과 직면하는 순간, 월, 화, 수, 목, 금, 토…

기상, 출근, 노동, 식사, 수면, 만남, 헤어짐. 반복되는, 똑같은 리듬, 권태에서 우리는 “왜?” 라는 질문에 빠지게 된다.

누군가는 여느 작품에서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누군가는 구토에서 마로니에 뿌리와 돌맹이에 존재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c. 육체의 반항

카뮈는 무대 장치가 붕괴되며, 권태에서 의식이 피어나며, 관심을 갖는다 말한다. 의식에서 시작된다 말한다.

인간은 정확히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그러나 “산다”라고 말하는 자가당착에 놓여있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 이 부조리를 알 때, 모든 것을 동원하여 거부하여야 할 내일을, 그런 내일을

바라는 것을, 카뮈는 육체의 반항, 부조리라 말했다.



e. 낯섦

카뮈는 의식 이후 세계가 두껍고, 한 개의 돌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완강히 닫혀있는가 말한다.

이는 구토에서 로캉탱이 사물에게 느끼는 낯섦의 감정과 유사하다 생각이 든다.

우리가 부여해온 세계가 아니라, 세계가, 세계 자체로 존재해있었고 우리를 밀어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것이다.

습관에 의해 형성되었던 무대 장치들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다.

카뮈의 말처럼, 인간들이 하는 행동의 기계적인 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의미 없는 무언극이 그들을,

그리고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을 전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f. 사유의 모순

부조리의 추론에서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구토에서 나온 언어의 개념으로 이것을 이해한다.

카뮈는 사유의 모순을 통해, 인간이 가진 이해의 욕구, 합리성을 지적한다.

통일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통일의 욕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일 뿐, 애초에 의미가 없는 세계를 알린다.

단 한 번이라도 “이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9원될 수 있으리라. (작품 내 명문이라서 적어본다. 크...)



g. 삼위일체

카뮈는 부조리를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오직 인간과 세계, 양자가 함게 있는 가운데에 발생되며

부조리가 이 양자를 묶어주는 유일한 끈임을, 삼위일체임을 말한다.

초기 부조리의 추론에서 언급된 이 삼위일체의 개념은 막바지 부조리한 창조 단락에서 완성되는데 정말 훌륭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언급되는 자유에 관한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규명할 수 없는 세계, 규명하고자 하는 인간, 그 사이를 연결하는 부조리로 인해 삶이 완성되고,

인간은 부조리에서 삶을, 자유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기능이 무언가에 의해 대체되고, 관찰도, 사유도, 반항도 필요 없는 삶이 궁극적으로

자유와 행복일지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글자 수 제한 걸려서 나눠서 쓰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