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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점차로 자신의 이전 저작들이 지각 또는 시각 방식들에 대한 언표체제의 우위성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상학에 대한 푸코의 대응이다. 그러나 푸코에게 언표의 우위성이란 결코 시각적인 것의 역사적 환원 불가능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며, 실상 그와는 정반대로 기능한다. 언표가 우위를 갖는 이유는 오직 가시적인 것이 언표의 지배요소, 즉 자기 자율성(héautonomie)과 함께 자신의 자율성과 자신의 고유한 법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것이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언표 가능한 것에 대립시킬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언표 가능한 것의 우위성에 있다. 물론 이 고유한 형식은 오직 결정될 수 있을 뿐, 환원 가능한 것이 아니다. 푸코에게 있어 가시성의 장소들은 결코 언표들의 장과 동일한 리듬・역사・형식을 갖는 것이 아니다. 언표의 우위는 오직 이런 한에서만, 곧 환원 불가능한 어떤 무엇에 대해 작용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가시성의 이론을 망각할 경우 우리는 푸코가 역사에 부여했던 개념을 단순히 훼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푸코의 사유와 이 사유에 대한 푸코의 개념화까지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푸코의 사유를 현대 분석철학의 한 변종쯤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푸코의 사유는 분석철학과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다만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사이의 근원적 관계를 추출해 낼 수 있다면, 아마도 이 경우만이 예외가 될 것이다).


—질 들뢰즈, 푸코




롤라 유네스의 기묘한 종합도 그렇고, 이런 구절들을 볼 때마다 비트겐슈타인 연구서를 저술하는 가능세계의 들뢰즈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