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본문에 앞서서
우선 본 글은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로베르토 볼라뇨 리딩 가이드』(이하 『가이드』로 통일)에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에 맞춰 2번 항목은 『가이드』의 구성(정치, 시, 범죄, SF, 2666)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가이드』는 설명이 너무 간략하기에, 각 작품에 관한 조금의 부가 설명을 덧붙이고자 이 글을 쓴다. 최대한 스포일러는 자제하려고 노력했으나, 설명을 위해 불가피하게 조금의 스포일러가 있다는 점은 양해를 구한다.
필자가 볼라뇨를 애정하고, 각 작품을 다 읽어 보긴 했지만, 전공도 아니고, 독해력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고 있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재독한 작품도 손에 꼽는다. 따라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볼라뇨에 관해 잘 아는 독자분이 지적해 주시길 바란다. 글을 전부 읽을 시간이 없다면, 마지막 정리만 봐도 괜찮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있어 볼라뇨라는 매력적인 작가에게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1. 로베르토 볼라뇨는 누구인가?
볼라뇨는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바에 따르면)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시한폭탄'이라고 불리는 작가이다. 간단히 말해, 이단아다. 그는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로 이주해 청년기를 보냈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혁명을 돕고자 칠레로 귀국했으나,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겨우 탈출해서 멕시코로 돌아온다(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게 된다). 멕시코에서는 20대에 옥타비오 파스와 파블로 네루다로 대표되는 기성 문단에 대항하여 파파스키아로와 함께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 사실주의)'라는 문학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후 유럽으로 이주해 삶을 이어간다. 이때를 모티브로 하여 집필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자, 개인적으로는 최고작으로 여기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다.
본래 그는 시를 썼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에 접어들고 나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93년 『아이스링크』로 소설 집필을 시작해서 1998년에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병색이 악화된 그는 2003년 사망하는데,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소설이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최후의 역작, 『2666』이다. 미완성작으로 보기도 하나, 개인적으로는 충분한 완결성을 갖추었다고 본다. 물론, 시간만 더 있었다면 추가적인 집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볼라뇨 사후에는 그가 남겨 놓은 글들이 소위 '발굴'되어 몇 편의 작품이 더 출간되었다.
볼라뇨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작가이다. 볼라뇨의 작품 세계가 상당히 난잡한 편이고, 과격한 묘사가 남발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서 비롯되는 인식의 충격이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볼라뇨 작품은 적어도 다음 셋 중 하나의 문제는 다루고 있다. 첫째, 문학 자체에 관한 고민. 둘째, 폭력과 성으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3. 당췌 파악할 수 없는 현대 사회와 그런 사회에서 길을 잃은 유랑민으로서의 인간. 세 문제 모두가 섞이기도 한다.
또한 상호텍스트성이 매우 강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본인이 영향을 받은 다양한 작가들과 각종 매체가 작품 속을 종횡무진한다. 다행히도, 주석이 꼼꼼하게 달려 있기에, 이 부분은 걱정을 덜 해도 괜찮다. 묘사는 적나라하지만, 그려진 세계는 모호하기도 하다. 이는 볼라뇨 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 주변부를 조금씩 나타내고, 그 결과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대상이 생긴다.
무엇보다 볼라뇨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재생산 문학'이다(이경민 교수의 논문 참고). 즉, 기성 작품과의 수많은 연결점을 가지고 있고, 개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들이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이다. 볼라뇨의 문학 곳곳에서는 둘의 영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단편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보르헤스의 단편 「남부」를 패러디한 것이며, 볼라뇨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코르타사르의 독특한 소설 『팔방놀이』의 형식과 유사성을 띤다.
따라서 볼라뇨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이 둘의 작품을 접한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가이드』에서도 첫 회차에 보르헤스 단편 전집을 읽을 것을 추천하고 있다. 다만, 보르헤스와는 달리, 코르타사르는 창비 세계문학전집에서 출간된 단편집 『드러누운 밤』이 번역본의 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 (다행히 조만간 『팔방치기』가 출간된다는 소식이 있긴 했지만, 정확한 일자는 모른다.) 보르헤스의 단편도 다 읽는 것이 부담될 수도 있다. 최소한으로 읽고자 한다면, 보르헤스는 『픽션들』과 『알레프』, 코르타사르는 『드러누운 밤』이라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볼라뇨는 어렵다고 자주 언급되는 여타 작가와 작품들에 비하면 확실히 쉽다. 그러나 마냥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내 마음에서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지만, 머리로는 위대한 대문호들(예를 들면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이단아 볼라뇨의 매력은 넘쳐난다. 오히려 볼라뇨는 그들과 한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볼라뇨니까.
2. 『로베르토 볼라뇨 리딩 가이드』에 대한 첨언
1) 키워드: 정치
『칠레의 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먼 별』, 『전화』
먼저 『칠레의 밤』은 단 두 문단으로 구성된 소설로, 문학, 정치, 폭력, 칠레사 등 앞으로 접할 볼라뇨의 문학 세계의 모든 주제가 엮여 있다. 죽음을 예감한 이바카체 신부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으며, 그 밑에 숨겨진 폭력이 얼마나 추악하고 뿌리 깊은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자행하는 이들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보여준다. 비겁한 지식인인 이바카체 신부는 훌륭한 작가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단 문학가나 정치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기에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문제이며, 그래서 볼라뇨는 이 작품에 『지랄 같은 폭풍』이라는, 폭풍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은 마치 백과사전처럼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픽션이다. 유일하게 열린책들의 선집이 아니라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작품이기도 한데, 볼라뇨의 작품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허구와 사실이 혼재되어 있고, 어떻게 보면 볼라뇨의 작품 중 가장 보르헤스적인 느낌이 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제목 때문에 오해받기 쉬운 작품이지만, 일종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소설로서, 나름의 재미가 있다. 다만, 독특한 구성 덕분에 첫 작품으로 접하면 다소 어색함이 있을 수도 있다.
『먼 별』은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의 마지막 장이자 백미인 '라미레스 호프만'의 일대기를 더 확장해 쓴 것이다. 라미레스 호프만은 카를로스 비더라는 인물로 재전유되며, 독자는 이를 작가의 얼터에고인 아르투로 B.(벨라노)의 시선을 따라서 쫓아가게 된다. 자연스레 일종의 탐정소설과도 같은 전개가 이어지며, 이는 긴장을 계속 유지해 준다. 카를로스는 분명 악인임이 틀림없지만, 동시에 성실한 장교이며 꽤 괜찮은 시인이기도 하다. 정치와 문학의 관계에 관한 볼라뇨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전화』는 볼라뇨의 첫 단편집이다. 볼라뇨의 실제 삶을 모티브로 삼은 단편도 꽤 많다. 예를 들면 책도둑으로 살았던 그의 과거를 그린 단편 「굼벵이 아저씨」나, 피노체트 정권 치하에 압류되어 있을 때를 그린 「형사들」 등이 그렇다. 또한 대다수 단편의 화자가 아르투로 벨라노이기도 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 단편들은 에세이가 아니라, 픽션이다. 거리에서 비롯되는 공포가 작품 전체를 뒤덮고 있다. '유령'으로 표상되는 것으로, 방랑하는 삶을 사는 인물 군상을 볼 수 있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 『칠레의 밤』, 152p
2) 키워드: 시
『야만스러운 탐정들』, 『부적』, 『낭만적인 개들』, 『안트베르펜』
볼라뇨는 자신이 소설가보다는 시인이길 바랐다. 실제로 청년기에는 시만을 쓰기도 했고, 인프라레알//리스모를 주도했으니 말이다. 그 시기를 픽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볼라뇨와 파파스키아로는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라는 인물로, 인프라레알//리스모는 내장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다. 1부와 3부는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인 지망생인 가르시아 마데로의 시선으로 작성된 일기이고, 2부는 벨라노와 리마와 연관 있는 자들의 파편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벨라노와 리마는 내장 사실주의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좇아 소노라 사막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볼라뇨 문학에서 지겹도록 다뤄지는 '악'의 문제, 폭력과 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문학과도 교차한다.
『부적』은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등장한 바 있는 인물로, '멕시코 시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의 이야기를 확장한 소설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피비린내 나는 공허한 도시에서 길을 헤맸던 탐정들에게 올리는 진혼곡'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탐정'들에게 '부적'이 되기를 바라는 소설이다. 문학에 대한 믿음과 삶의 연관에 관한 볼라뇨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작품.
『낭만적인 개들』은 볼라뇨의 유일한 시집이다. 볼라뇨는 자신의 소설보다 시를 더 사랑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다. 번역 시라는 한계가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내가 시를 자주 읽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독특한 것은, 시임에도 소설들과 상호텍스트성을 가진 채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인 볼라뇨를 만나고 싶다면 읽는 것을 추천.
『안트베르펜』은 장시에 가까운 소설이다. 파편적인 이야기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우 불분명하다. 젊을 적에 쓴 소설이기에 날 것의 볼라뇨를 느낄 수 있다. 볼라뇨의 작품에서 매번 등장하는 테마들이 여기서도 나온다. 독특한 매력이 있음.
『가이드』에서는 니카노르 파라의 시집과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한다. 파라는 볼라뇨가 매우 좋아했던 시인이다. 그의 시론은 '반시'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데,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다양한 형식을 차용하여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허무는 시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 볼라뇨의 문학 세계와도 유사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파라의 시집은 읽으면 좋다. 대표 시집인 『시와 반시』가 번역되어 있다.
"토막토막 잘린 문장들만 나와요. 아마도 내 눈엔 현실이 토막 난 문장들의 덩어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 『안트베르펜』, 72p
3) 키워드: 범죄
『아이스링크』, 『살인 창녀들』, 『악의 비밀』, 『참을 수 없는 가우초』
『아이스링크』는 그가 발표한 첫 장편이다. 카탈루냐의 소도시 Z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일종의 추리 소설로, '레모 모란', '가스파르 에레디아', '엔리크 로스켈러스'라는 세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살인 사건의 중심에는 피겨 선수 누리아와 그녀를 위해 로스켈러스가 공금을 빼돌려 지은 아이스링크가 있다.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물론 부족하지만, 한 편의 추리 소설로서 읽어볼 만하다.
『살인 창녀들』은 개인적으로 볼라뇨의 단편집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단편집이다. 폭력, 포르노, 흑마술과 축구의 조합 등 볼라뇨의 세계에서 늘 보이던 것들도 있지만, 새로운 것도 있다. 표제작 「살인 창녀들」은 폭력의 문제도 잘 드러나고, 음산하고 두려운 분위기가 그 독특한 구성을 통해 증폭되는 재밌는 단편이다.
『악의 비밀』은 볼라뇨의 유고 단편+에세이집이다. 즉, 미완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짤막한 단상들뿐이다. 하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는 글이다. 애초에 볼라뇨의 소설부터가 어딘가 미완성인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으니, 어찌 보면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사진에서 비롯된 소설들은 특히 매력이 넘치고, 무엇보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관한 에세이가 백미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볼라뇨 생전의 마지막 단편+에세이집이다. 단편들은 상호텍스트성과 패러디로 가득하다. 표제작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앞서 말한 바 있고, 「경찰 쥐」는 카프카의 단편 「여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 족속」과 연결되는 작품으로, '동족을 죽이지 않는' 쥐들의 사회에서 발생한 살해 사건의 범인을 추적한다는 독특한 소재의 작품이다. 「알바로 루셀로트의 여행」은 예술의 원형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도 에세이가 백미인데, 문학과 그 현주소에 관한 그의 고찰을 볼 수 있다.
『가이드』에서는 카프카의 장편과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하고 있다. 사실, 카프카 소설은 볼라뇨와 상관없이 그냥 읽어도 좋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카프카 소설은 추천한다.
"23. 하지만 아버지들은 살해되어야 한다. 시인은 태생적으로 고아이기 때문이다." - 『살인 창녀들』 中 「무도회 수첩」, 254p
"우리가 치료를 위해 해독제나 약을 찾을 때, 새로운 것, 오직 미지의 곳에서 발견되는 그것을 찾으려면 섹스와 책과 여행을 탐험해야 합니다. 비록 이것들이 우리를 심연으로 이끌지라도 말입니다. 어쩌면 그 심연이 해독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 『참을 수 없는 가우초』 中 「문학+병=병」, 150p
4) 키워드: SF
『제3제국』, 『팽 선생』, 『SF의 유령』
『제3제국』은 『아이스링크』와 마찬가지로 초기 장편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볼라뇨 특을의 상호텍스트성은 거의 없고, 순차적인 진행을 보여준다. 주인공 우도 베르거는 전략 보드게임(전쟁게임)의 프로이자, 그 전략을 잡지에 싣는 것을 일로 삼고 있다. 여름휴가로 놀러온 해변에서 그는 온몸에 화상자국을 가진 의문의 사나이 케마도를 만나고, 그와 보드게임 '제3제국'을 하게 된다. 게임과 현실은 중첩되고, 침범한다. 제3제국은 패망했으나,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
『팽 선생』은 멈추지 않는 딸꾹질로 죽어가는 바예호를 도와달라는 부인 조르제트의 부탁에 따라 그를 찾아가는 피에르(팽 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기회주의자들,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자들, 숭고한 순교자를 만들어 토템으로 삼으려는 자들 등. 여러 군상을 볼 수 있다. 여전히 갈 길은 알 수 없다.
『SF의 유령』은 사후에 출간된 미완성작이다. SF 소설은 아니지만, SF에 관한 소설이고, 문학에 관한 소설이다. 한의 시점에서는 SF를 다루고, 레모의 시점에서는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난 '문학 붐'을 쫓는다.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매우 흡사한 서사이기도 하다. 작가 지망생이 문학과 관련된 것을 추적하고, 통과 의례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폭력과 성의 문제가 엮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엄밀히 다른 소설이다. SF광이었던 볼라뇨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가이드』에서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SF소설과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하고 있다. 『SF의 유령』에서 작가를 반영하고 있는 한에 대한 묘사와 한이 작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기자와 인터뷰하는 부분에서는 팁트리 주니어의 작품 외에도 필립 K. 딕 등 다양한 SF 작가들이 인용된다. 시간이 된다면, 여타 SF소설들과 함께 읽으면 더 재밌을 것이다.
"꿈속의 라우라는 높은 산을 배경으로 서서 쭈뼛쭈뼛 곤두선 머리카락을 빛내며 전진! 허리케인을 맞이하러 가라! 하고 말했다. (중략) 우리는 착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야 해, 라우라! 우리는 동정심과 이타심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해! 라우라는 웃었지만 나는 진지했다." - 『SF의 유령』, 158p
5) 키워드: 2666
『2666』
『2666』은 볼라뇨 생전 마지막 역작이자, 그 막대한 분량 때문에 높디높은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이드를 따라 볼라뇨의 작품을 쭉 읽어 왔다면, 분량은 문제여도 내용 자체는 읽어 나갈 만할 것이다. 볼라뇨의 소설 내내 나오는 주제들(문학, 악 등)이 거대하게 변주되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이며, 표현 방식도 다르게 구현된다. 『2666』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실린 시, 「여행」의 "권태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포의 오아시스!"라는 구절을 제사로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는 곧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산타테레사를 암시하는 것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1부 「비평가들에 관하여」는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언급되는 미지의 독일 작가 '베노 폰 아르킴볼디'를 연구하는 유럽의 네 비평가 펠티에, 모리니, 에스피노사, 노턴과 그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아르킴볼디를 찾아 멕시코 산타테레사로 향한다. 2부 「아말피타노에 관하여」는 역시 아르킴볼디 전문가로, 산타테레사에 강의를 위해 건너온 교수이자, 1부에서 비평가들과 만난 아말피타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1부에서 지나가듯 언급되었던 여성 연쇄 살해 사건의 위협이 점차 다가온다.
3부 「페이트에 관하여」는 뉴욕의 흑인 잡지 기자, 퀸시 윌리엄스(페이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흑표범단을 설립했던 배리 시먼을 인터뷰하고, 죽은 지미 로웰을 대신해 권투 시합 취재를 위해 산타테레사로 향한다. 그러나 그가 이끌리는 것은 스포츠보다는 연쇄 살해 사건이고, 그 과정에서 아말피타노의 딸 로사와 만난다. 위협은 점차 실제화된다. 4부 「범죄에 관하여」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산타테레사에서 벌어진 여성 연쇄 살해 사건에 관한 보고서 또는 르포르타주의 성격을 띠는 글이 주가 되며, 경찰의 공허한 수사 과정이 반복된다. 폭력은 일상화되고, 잊히며, 사회는 관심을 거둔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있으나, 진실은 미궁 속이다. 5부 「아르킴볼디에 관하여」는 『2666』의 시발점이었던 소설가인 아르킴볼디의 일생과 그가 산타테레사로 향하기까지의 행적을 설명한다. 나치, 세계대전, 폭력, 문학 등 『2666』의 핵심 주제가 전부 나타나며, 『2666』의 끝이자 시작이다.
여러 갈래로 산발하는 구조와 주변부를 서술함으로써 흐릿하게 핵심을 암시하는 볼라뇨 특유의 표현 방식이 매력적이다. 정설은 부재하고, 무수한 가설만이 존재할 뿐이며,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이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뒤덮는다. 특히 4부 내내 나오는 끝없는 악의 나열과 반복은, 소설 속 인물뿐만 아니라, 독자조차 일상화된 악을 느끼지 못하는 권태에 빠지도록 만든다. 범인(犯人)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범인(凡人), 악을 의식하지 못하고 '권태'에 빠진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가이드』에서는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와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하고 있다. 아르킴볼디가 핀천을 가리킨다는 것이 이유긴 하나, 현재 절판이기도 하니, 굳이 찾아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래도 핀천은 좋은 작가이니 『V.』 읽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중력의 무지개』는 현재 재번역 중이라고 하니 기다려 보자.
"이야기들은 이제 무질서한 무게 중심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무질서한 무게 중심이 여기에 있는 우리 친구이자, 그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명백한 질서입니다. 그러니까 언어적 성격의 질서지요. 거기에는 서술 전략이 숨겨져 있는데, 직접 경험한다면 언어적 무질서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겁니다." - 182p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건 결코 현실에 상응하는 법이 없지요. 사람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비겁해요. 교수님에게만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말해 인간들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 쥐새끼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에요." - 226p
"아무도 이런 살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 355p
"로커 룸에서 나온 형사는 그에게 범죄에 관해서는 논리적 설명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엿 같은 겁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설명이 될 수 있지요." - 560p
"순수와 의지 덕분에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겁쟁이와 흉악범이 되어 버렸어." - 779p
"독서는 살아 있다는 행복이나 기쁨 또는 슬픔이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식과 질문이네." - 781p
3. 정리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고 플로우차트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보르헤스+코르타사르 작품
(2). 『칠레의 밤』&『아메리카의 나치문학』->『먼 별』->『전화』
(3). 『야만스러운 탐정들』->『부적』
(4). 개인적으로는 이하 순서 무관. 관심 가는 것부터 읽는 것을 추천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부 읽어 보기를 바라지만, 시간이 없다면 생략해도 괜찮음. 카프카도 같이 읽으면 좋음
『낭만적인 개들』, 『안트베르펜』(절판), 『아이스링크』, 『살인 창녀들』(절판), 『악의 비밀』, 『참을 수 없는 가우초』, 『제3제국』, 『팽 선생』(절판), 『SF의 유령』+카프카 소설
(5). 『2666』
볼라뇨의 핵심만 읽겠다면 (2), (3), (5)순으로 읽는 것을 추천함. 실력은 없지만 이미지로도 만들어 봤음.
독서에 정답은 없다. 이 글은 단지 하나의 가이드를 제시할 뿐이다. 볼라뇨는 "문학은 위험한 일"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패배할 줄 알면서도 '괴물'에 맞서 싸워야 하는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볼라뇨가 일평생 폭력과 악의 문제에 천착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삶에 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악은 끊임없이 부활하고, 공포를 안겨주며, 인간을 괴롭힌다. 평화로운 세상이었다가도, 어느새 혼란과 고통으로 가득차기도 한다. 애초에 '평화'라는 것이 있긴 한 것인지 의심되기도 한다.
볼라뇨는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할지라도 대항하는 자세를 보인다. 그가 죽을 때까지 문학의 변두리에서 반항아로서 살아간 것도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는 곧 탐정의 자세이기도 하다. 폭력과 혼란에 저물어가는 문학의 흔적을 계속 좇으며 삶을 이어나가는 것. 눈을 감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서 그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볼라뇨가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굳센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볼라뇨 일독을 권한다.
볼라뇨 그는 고트인가
칠레의 밤 읽었으니 나치문학 읽어보고 더 팔지 정해야겠다
@책은도끼다 나치문학-먼별은 꼭 연달아 읽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