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에서 상관물과 이미지를 작업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익숙해질수록 그것은 결국 자동기술적이며... 수공예를 가장한 공산품이라는 사실을, 관념 하나의 거푸집을 통해 이미지는 생산되고, 납득 가능한 형태로 상품화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가 사적 언술에 복종할 수록 더욱 그렇다. 그리고 여기 시들은 사적인 언어로 세계의 접점을 만들고자 한다. 다른 서정시들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내가 의심하는 것은 이 시집이 2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의 과잉과 안온함의 감각(다정함은 신용목 시인의 아주 오래전부터 최전선으로 이끌고 가던 감수성이니 넘어가자)에 자극을 받은 중견 시인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은 부분이다. 용도를 다하고 폐기되는 상관물과, 너무 많은 '나'가 시편에 등장하고, 흉기로 찌르고 싶어하는 마음과 살12해의 진술이 아무도 살12해하지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마저 선 위치가 바뀌지 않는 관조적 시점, 점점 더 길어지는 진술과 더 많은 '나'들, 결국 독자는 화자의 태도와 전언에서 역시 20년대의 익숙한 기성품을 발견 하고야 마는 것이다. 안온하고 무해한, 자기 안의 균열을 봉합하고 환영받는 문학의 자리에 서서 차분히 사랑받는, 우는 근원적 이유를 감당하지 못해 운다고 서술하는 것으로 윤리적 포즈를 취하는.


 그리고 해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형, 해설을 쓰려는데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글을 쓰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여러 생각을 했어요. 아니, 반대로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요. 해설이라는 형식이 지닌 어떤 거리감이 어색함을 유발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해설은 작가와 해설자 사이의 독자를 두고 말하는 형식에 가까울 텐데, 제게는 형에게 먼저 전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해설을 덮었다. 시가 사적 기록에 종사하는 것을, 해설 서두에서도 독자의 자리를 지우고 시인 만을 위한 편지로 옹호하는 것을 더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 해설을 쓴 자가 그걸 아주 잘 자각하고도 구태여 그러기를 결정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