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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거울을 등졌다, 거울의 허식을 그녀는 증오했기에.
── 파울 첼란 「역광」


1. 우리는 허공에 무덤을 판다

 슈노 마사유키 씨의 『검은 부처』나 『거울 속은 일요일』을 읽고 나는 꽤 그리운 기분에 젖었다. 10대 시절, 탐욕스럽게 읽어 치웠던 셜록 홈즈 패러디의 엉망진창이고 무엇이든 허용되는 느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무엇이든 허용되는 느낌'을 ‘홈즈 패러디적 상상력’이라 불러보자. 그렇게 함으로써 슈노 씨의 작풍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된다. 가령 본격 팬들 사이에서 물의를 빚었던 『검은 부처』라는 작품이, 만약 『솔라 폰스의 사건부』 중 한 편으로 쓰였다면 독자들은 그럴 법도 하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책(『거울 속은 일요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금 돌아가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슈노 씨는 자신의 웹사이트 "Mercy Snow Official Homepage"의 "reading diary"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전에 이 페이지에 썼지만,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는 졸저 『거울 속은 일요일』의 원네타(더 정확히 말하면 발상원 중 하나)이다. 왜 먼 미래의 이성(異星)을 무대로 한 SF가 본격 미스터리의 원네타가 될 수 있느냐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는 본격 미스터리이기 때문이다." (2002년 7월 19일)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는 1972년에 발표된 진 울프의 두 번째 장편이다. 번역자 야나기시타 기이치로 씨에 따르면, 이 소설의 테마는 정체성과 역사=기억의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슈노 씨는 자신의 사이트에서 울프의 작품과 『거울 속은 일요일』의 조응 관계에 대해 비교적 거리낌 없이 무대 뒤편을 밝히고 있지만, 어째서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에서 이 책과 같은 ‘신본격’──특히 아야츠지 유키토 씨의 ‘관’ 시리즈──을 향한 굴절된 오마주가 나오는 것인지, 핵심적인 부분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두 소설 사이에 ‘홈즈 패러디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개입시키면, 어라 신기해라! 양자는 매끄럽게 연결되어 버린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엘러리 퀸의 장편 『공포의 연구』와 마거릿 노리스의 A Case of Identities라는 단편(구할 수 있는 일본어 번역도 있지만, 스포일러 가능성이 높으므로 굳이 번역 제목은 적지 않겠다)을 예로 들어보자.


 전자는 명탐정 엘러리에게 잭 더 리퍼 사건에 관한 왓슨 박사의 미발표 원고가 도착한다는 것이 발단으로, 왓슨의 수기와 엘러리에 의한 사건의 재검토가 교대로 그려진다. 이 책과의 유사성은 명백할 것이다. 참고로 왓슨의 수기 파트는 SF 작가인 폴 W. 페어맨이 집필을 맡았다고 한다──슈노 씨가 좋아하는 SF 작가 아브람 데이비슨의 대작(代作)이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더욱 시사적인 것은 후자 쪽이다. 이것은 ‘환생’이라는 기믹을 도입한 신랄한 홈즈 패러디로, 반복되는 전생의 기억과 정체성의 착종(錯綜)이 테마가 되어 있다(제목의 Identities라는 단어가 복수형임에 주의). 흥미가 있는 독자는 마거릿 노리스로 검색해서 책을 찾아보길 바란다. 슈노 씨가 원네타로 삼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읽으면 내가 ‘홈즈 패러디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의 구체적인 감촉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셜록 홈즈의 패러디는 본격 미스터리의 정사(正史)에서 거의 묵살당하고 있지만, 명탐정 비판·장르 비판의 급선봉으로서 항상 미스터리의 주류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여명기인 1892년에 발표된 「페그람의 괴사건」(로버트 바)은 「탐정소설은 탈선했다」라는 별제를 가지고 있으며, 명탐정 셜로 콤즈의 실패와 스코틀랜드 야드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홈즈 패러디의 역사는 모방에 있어서의 일탈──명탐정의 패배, 추리의 불확실성, 진상의 얼버무림, 출처가 수상쩍은 텍스트, 현실과 허구(망상)의 혼동, 말장난과 악취미, 젠더의 교란, 방자한 장르 혼합 등에 의해 채색되고 활기를 띠어 왔다. 가짜 홈즈들은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나쓰메 소세키 같은 실존 인물뿐만 아니라 드라큘라, 타잔, 네시, 화성인 등 픽션의 캐릭터와도 조우한다. 타임머신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이고, 천국에서 아담과 이브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거나, 라는 암호를 해독해서 주(州)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적도 있을 정도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수법의 대부분이 홈즈 패러디에는 지극히 흔해 빠진 것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수법의 일부는, 가령 앤서니 버클리 같은 사람에 의해 밀수입되어(버클리가 탐정소설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 A. B. 콕스 명의로 홈즈 패러디를 썼던 것은 지금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본격 형식 안에 인스톨되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허용되는 ‘홈즈 패러디적 상상력’의 전부가 본격 미스터리에 삼켜진 것은 아니다. ‘비평 정신’이라는 말로 회수되지 않는, 잡다하고 수상쩍은 이런저런 것들은 여전히 홈즈 패러디의 전매특허로 계속 남았다. 그리하여 본격 미스터리 정사의 이면에서 엄청난 수의 가짜 홈즈들이 발호하기 시작한다──얼터너티브한 미스터리의 역사를 날조하기 위해서.


 홈즈를 낳은 코난 도일은 H. G. 웰스의 동시대인이며, 미스터리나 역사소설 이외에도 SF나 호러, 심령주의적인 작품을 남겼다. 필립 호세 파머나 폴 앤더슨, 최근에는 로버트 J. 소이어나 닐 게이먼에 이르기까지 많은 SF 작가가 홈즈 패러디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은 그 탓도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홈즈 패러디적 상상력’은 미스터리와 SF(혹은 그 밖의 장르)의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한다. SF계의 논객으로 알려진 슈노 씨의 소설이 바로 그 전형인 것처럼.


"자 가세, 왓슨!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네."


 가짜 홈즈들의 후예에게 장르의 경계 따위는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그들을 낳는 상상력은 개별 소설 장르가 확립/격리되기 이전의, 잡다하고 수상쩍은 이런저런 것들을 모태로 하고 있으니까.


2. 「산중의 대화」 (이요시 미쓰오 역, 방점 부분은 노리즈키에 의한 변경)

 어느 저녁, 태양이──그것만이 아니라──저물어갔다, 그곳으로, 한 명의 명탐정이, 한 명의 명탐정이자 한 명의 명탐정의 뒤를 잇는 자가, 그의 오두막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이름도, 판독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도 걸어왔다, 왔다, 느릿느릿 큰걸음으로 왔다, 오는 것이 들렸다, 지팡이를 짚고 왔다, 돌을 움직이며 왔다, 들리는가, 내가? 들리겠지, 내가? 나, 나, 나, 자네에게 들리고 있는 나, 자네가 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나, 나 아닌 나──이와 같이 그는 걸어왔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태양과 그 밖의 것들이 저물어버린 어느 저녁, 그는 걸어왔다, 서려 있는 구름 밑을, 자신의 그림자 속을, 자신과는 다른 것의 그림자 속을──왜냐하면 명탐정은, 알고 있겠지, 자네는?


그것이 틀림없이 자신의 것이고 남의 것이 아닌 경우라도, 빌린 것은 어디까지나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그는 걸어왔다, 천천히 깨끗한 길을, 견줄 데 없이 깨끗한 길을 걸어왔다, 왔다, 모래를 밟듯이, 산중을, 그, 자신이 속한 산기슭 평지에 살게 해주었던 그는, 명탐정은, 왔다, 왔다.


 왔다, 그렇다, 아름다운 길을, 비길 데 없이 깨끗한 길을.
 그러자 그곳에 누가, 그를 향해, 왔다고 생각하나?


3.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파울 첼란 「자오선」
 다른 다소 비약적인 화법으로 바꿔 말한다면──우리는, 오늘날 많은 장소에서 행해지고 있듯이, 예술에 대하여 그것이 마치 미리 주어진 것, 무조건 전제될 수 있는 것인 양 착수해도 좋은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특히 말라르메를──이라고 해두지요──끝까지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것일까요.


 기다 겐 『하이데거의 사상』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마침내 첼란은 유대인을 불태워버린 ‘죽음의 바람’에 대해 과연 하이데거가 당시부터 알고 있었는지 따져 물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침묵으로 답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이데거의 사죄 한마디를 기대하고 이 만남에 무언가를 걸었던 듯한 첼란은 깊은 환멸을 품고 산장을 떠나게 되었고, 산장 문 곁에서 그를 배웅하던 하이데거는 “첼란은 병들었다, 이제 나을 가망이 없다”라고 차갑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폴 오스터 『유배의 시』
 「죽음의 푸가」는 첼란의 가장 좋은 시는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시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명성도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40년대 말에 발표된 이 시에 의해 쌓아 올려졌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식 헛소리의 대극(對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는, 독일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하나에는 강제수용소가 직접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하나에는 그 무서울 정도의 형식미 때문에. 이 시는 문자 그대로 말로 이루어진 푸가이다. 그 내리치는 듯한 리드미컬한 반복과 변주는, 철조망에 둘러싸인 감옥 못지않게 명확히 그 윤곽이 한정되어 있고, 안쪽을 향해 닫혀 있다.


 모리 오사무 『첼란』
 여름이 활동과 사건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가을은 그것이 쇠퇴하여 망각과 고사(枯死)로 향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을은 다른 한편으로는 결실, 실현의 시간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즉 가을은 망각과 상기(想起)라는 양가성을 갖는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 시(주: 「코로나」를 말함)의 제1연에서는, 호두 속에 망각으로서 갇혀 있던 가을 자연의 무시간성이 껍질에서 나와 변해가는 무상한 시간 속을 걷게 된 후, 다시 원래의 무시간성으로 회귀한다. 원환적 시간 속에서 가을의 정적은 호두 속에서 한층 깊어짐을 보인다. 이 시간은 그대로 거울 속이나 꿈 속으로 잠드는 시간과 공통된다.


 아야쓰지 유키토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그것은, 잠이다.
 소리도 없이, 시간조차 없이, 혼혼히 이어지는 깊은 잠. 몽환만이 배회하는, 끝없는 잠.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모든 것을 그 안에 감싸 안은, 결코 그 무엇에게도 어지럽혀지는 일 없는 잠. 그렇다면, 그때 그곳에서 죽은 그들은 그런 잠의 나라로 들어간 것인가. 저 하얀 안개 소용돌이 속에서, 한없이 조용하게, 피할 수 없을 터인 시간의 주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헬무트 뵈티거 『파울 첼란의 장소』
 시간의 범주는 둘로 구별할 수 있다. 하나는 불가역성, 직선적인 범주이며 ‘역사’로서의 시간이다. 또 하나는 순환하는 과정의 범주이며, 낮, 밤, 혹은 사계절 등이 이에 속한다. 물리학자 프리드리히 크라머는 시간의 이 이중구조는 어느 체계에나 특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직선적인 시간은 변화를 대표하고, 순환하는 시간은 자기 보존을 대표한다. “우리는 시간에서 호두 껍질을 제거해 준다, 그리고 가는 것을 가르친다, / 시간은 껍질로 돌아온다”──여기서 직선적인 시간과 회귀하는 시간이 맞닿는다. 만약 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떠나가는 과정도 자각하고 있다. 개개의 순간은 되풀이할 수 없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쉬볼렛』
 그러나, 세상에 단 한 번뿐인,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일, 그 일 자체의 망령적인 재래(再來)라는 것이 있다. 날짜는 망령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회귀의 이 재래는 날짜 속에 기재되어, 코드에 의해 보증된 기념일의 고리 속에 봉인되고 특정된다. 예를 들면 달력에 의해서.


 형사소송법 제250조 【공소시효 기간】 (헤이세이 16년 12월 개정 전의 구 조문)
 시효는, 좌측의 기간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
 1.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해서는 15년


 파울 첼란 「시편」
 하나의 무(無)
 였다 우리는, 이다, 일 것이다
 계속해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며──
 저 무(無)의-, 저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