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마이너 갤러리에서 신곡과 셰익스피어, 하스미 시게히코에 대해 글을 쓰는 '펙펙이'의 활동이 문제적인 이유를 적겠다.
지금 당장도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단테나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펙펙이가 무엇을 주장하던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거의 없으며, 이미 적잖은 오해로 뒤덮여있는 하스미에 대해서만큼은, 펙펙이의 그 몰이해적인 그릇된 비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밝힌다.
우선, 나는 펙펙이가 하스미를 비판한 첫 글
속 오류와 오독의 지점, 논리가 비약된 지점을,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baseball_new13&no=630579,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baseball_new13&no=630582)
위 두 개의 글로 세세히 지적하였으나, 정작 자신의 글이 무엇이 문제인지 짚으라고 요구했던 펙펙이는, 수용하고 말고는 자신의 선택이라면서, 위 비판에 대한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펙펙이는 이후 똑같은 주장을 관철할 뿐인 네개의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곳에서도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층론>과 <던진다는 것>에 대한 오독과, <일본적인 것>,<수사학>에 대한 몰이해가 드러나고있고, 각 게시물의 댓글로서 이를 지적한 내용을, 펙펙이는 삭제 조치하였다.
펙펙이는, 자신의 글을 지적하려거든 게시물을 작성해서 가지고 오라며, 마치 판사가 법정의 규칙을 제시하듯이, 상황을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좌지우지하려 했으나, 나는 그 닉언으로 인한 게시물 삭제의 위험과, 그가 위 링크에서의 나의 글을 두고 그랬던 것처럼, 회피적으로 무대응할 것을 감내하고서라도, 펙펙이의 오독으로 점철된 글쓰기 방식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글을 작성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아카데미에서 사회적 성취를 이뤘으나, 작품에 대하여 글을 쓸 땐, 제도적 언술을 삼가며, 철저한 아마추어리즘으로 일관한다.
그는 엄격한 철학적 사유나 기존의 미학적 담론 체계에서 벗어나서, 작품을 "표층 비평"한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를 말할 때, 그가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한다거나, 그의 글이 예스러운 고전의 글이라는 편견을 벗고, 그의 문학 자체와 최대한 마주하자면서, 그의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테마"에 집중한다. (번역, 출간된 바 있는 <나쓰메 소세키론>에서 하스미는, "누구나 나쓰메 소세키로 알고 있는 그 어떤 것의 그림자 곁을(...)슬쩍 빠져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소세키라 불리는 그림자와의 조우를 오로지 회피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테마"로서 제시한 것은 동서의 목차 참고.)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존 포드의 작품을 <던진다는 것>으로 읽어낸 다거나, 프리츠 랑을 <원환의 비극>으로 읽어내며 그 자신의 표층 비평을 모범적으로 실천,제시한 그의 방법은,
(이는 롤랑 바르트의 주제론적 비평 방법인 테마틱스의 차용으로 알려져있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ouvellevague&no=1481651)
일종의 방법론적 표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화 평론가 김병규의 말 참고 "표층비평은 숏 바깥의 맥락을 모두 걷어내겠단 고집일 수도 있다. 다만 제아무리 고집한다고 한들 영화를 순전히 미적 형식으로만 볼 순 없다. 숏이라는 표층은 어떤 식으로든 바깥의 맥락을 끌고 들어온다. 즉 그는 표층비평이라는 틀을 사용하되 표층만으로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 영화를 다룬다. 이 점이 하스미 시게히코식의 비평이 끌어안고 있는 긴장인 것 같다."-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4796)
코엔형제에겐 “역사가 결여”되어있고 “할리우드의 아픔을 추상화”해버린 것 같아서 그들의 작품을 호평할 수 없다고 하거나(https://blog.naver.com/porkpitch/222788985892?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홍상수의 숏에 “고전 할리우드의 향수가 느껴지지 않아서”좋게 볼 수 없다며(https://kangaeruhito.jp/interview/14526) 영화사와 작품의 관계를 평가 기준으로 삼아버리고, <시민케인>을 이야기하면서 동시대 영화와의 상대적인 평가를 요구할 뿐더러 영화사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짚어내기도 하는데다가(https://kangaeruhito.jp/interview/14520), 영화에는 적절한 러닝타임이 있다며 형식 비평의 틈을 열어젖히기도 하면서(https://kangaeruhito.jp/interview/14523) 참으로 뻔뻔스럽게 요설하고 있는 하스미는, 이처럼 때때로 작품에 관계된 현실적 조건을 전부 무시하고서, 작품을 읽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움을 직접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스미 시게히코는 지적 사기꾼인가? 아카데미의 한복판에서 가라타니와 함께 일본 사상계를 대표한다고 알려진 "지식인"하스미는, 작품을 말할때, 어째서 이정도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일관하는가?
우리는 일단, "보이는 대로만 보라"는 말의 의중을 들여다봐야한다. 어떤 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명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행위의 전술을 수행하는 말이 그렇다.(코엔에겐 역사가 결여되어 있다...미시마의 문학은 미학이란 이름의 박제된 포즈만이 있을 뿐이다...) 하스미의 말은 종종 행위(감상)의 충격을 있는대로 전술할 뿐이다. 인상의 증언일 뿐인 이 말을, 그 말이 뱉어진 전후 맥락을 살피지도 않은채, 보여지는 그대로의 논증적 구조가 “무심하게 멍청하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788080&s_type=search_name&s_keyword=%ED%8E%99%ED%8E%99&page=1)라고 성급히 판단하는 일은 웃기지도 않은 넌센스다.(여기선 차라리 ‘그런식으로 증언을 확언하는 일은 위험하다’라는 비판이 제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행위의 증언을 교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늘의 교리가 내일의 교리와 충돌하고, 독자(비판자)는 주제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의 증언일 뿐인 그 말 자체에 집착하는 실수를 저질러선 안될 것이다.
표층이란 무엇인가? 표층이란 “당장 보이는 것(느낄 수 있는 것)을 집요하게 관찰하라”는 ‘요구’다. 그 요구를 “심층을 부정하라”는 형이상학의 명제로 두거나, “텍스트의 기호적 표면만을 보라”는 명령으로 성급히 받아들이는 순간, 눈 앞에는 하스미라 이름붙여진 허상만이 떠다닐 뿐이다.(그래서 펙펙이의 하스미 비판은 시작에서부터 실패한다.) 여기서, 그 문제의 저서 <표층비평선언>을 다시 읽어보자. 본서의 머리말에서, 하스미는 심층/표층의 층위론을 설파하거나 기호학의 계보에 자신의 사유를 편입시키는 대신, 읽고,쓰고,사유하는 행위가 동반하는 어떤 ‘부자유’에 대해 증언하며, 깊숙한 지층의 불가시 영역으로 숨지 말고,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지는 무엇인가를 참조하라면서, 우리가 매일같이 반복하면서도 “자유”로 착각해 버리는, “철저하게 표층적인 부자유”를 문제시하라고 지독하게 쏘아붙이고 있다.(https://blog.naver.com/porkpitch/222404970974?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바라봐야 하는 건, 하스미가 말하는 표층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거리”와 “방향” 감각에 따라 대상을 분절하고(이해 가능하게 만들고), 그 분절된 조각을 “확실한 것”이라 믿어 버리는 그 “부자유”를 겨냥한다는 것이다. 즉, 하스미가 증언하는 표층이란, 맥락에서 분리된 대상이 놓여지는 표백된 무균상태의 연구실이 아니고, 일체의 번역을 거치지 않고 대상과 맨몸으로 가능한 마주해보자는 요구이자 비평 실천을 선보이는 몸짓이다.
하스미는 여기서 자신의 악명 높은 만연체(끝없이 미끄러지고 지연시키는 문장)의 작동 방법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장이 “읽기 어려움”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수사학적 요사를 부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선택된 주제를 끝까지 따라가려는 언어들의 운동 탓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 문체는 “멋 부림”이라기보다, 번역을 가속하는 독서 습관을 일부러 지연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장치가 가리키는 핵심은, 흔히 오해되듯 “제도 비판”의 선언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스미는 반제도적 언표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제도를 비판하는 문장” 대신 “부자유(제도)를 적극적으로 모방하는 단어들”을 택한다고까지 말한다. 이 역설이 바로, 표층의 성격을 드러낸다. 표층은 ‘제도를 벗어난 순수’가 아니라, 제도가 강요하는 번역(거리/방향/분절)을 흉내 내되, 그 흉내의 과정에서 번역을 멈칫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장 내기’의 기술이다.
결국 하스미에게 <표층 비평>이란, 엄격한 규칙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목적에 가닿기 위한 방법론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플로베르 연구로 학위를 수여한 후, 철학, 사상, 인문, 예술 등 분야를 종횡하며 왕성히 활동한 그의 비평적 세계관을 명확하게 규정짓기란, 그 자신이 의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린다는 사실에 더불어,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이 된다.(이는 '번역'을 꺼리는 그의 또 다른 방법론에서 비롯된다. 그는 비평을 '번역'의 과정이라 말하고, 작품을 감상하고 느껴지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글로 번역되는 일을 극히 경계한다. 끝모르는 만연체로 낯선 어휘를 던져내며 언어를 한계까지 몰아넣어 읽는 행위를 지연시키는 특유의 스타일은 번역을 일체 지연시켜, ‘표층’의 위에서 감동이 감동으로서 머물기를 바란다는 뚜렷한 목적을 갖는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 뿐 아니라 철학적 글쓰기, 타인과의 대화, 무용수의 율동 등 ‘표현’가능한 모든 일을 ‘번역’의 과정이라 칭하고, 예술이 전달하는 놀라움, 낯선 감각, 즉 감동을 섣불리 번역하여 이해 가능한 것으로 규정짓기를 경멸하는 그의 방법은, 80년대에 그가 주창한 <표층비평선언>의 오래된 표어가, 과연 어떤 목적을 갖는지 가늠해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https://blog.naver.com/porkpitch/223583590714?)
우선, 우리는 그의 저작물 중 가장 중요한 세 권을 하나의 계보로 두고 살펴볼 수 있다. <범용한예술가의초상> <제국의음모> <소설에서멀리떨어져>가 그것이다. 위 책에서 그는, 각각 19세기 막심 뒤 캉의 일생, 1851년의 쿠데타, 1980년대의 일본 출판계라는 시공에서, 시대적 사건이라 부를만한 이미지를 도출해내며, 자신의 사상적 시대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시간의 부족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키워드는 ‘근대’와 ‘범용’이다. 하스미에게 근대란, ‘개성’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수행하려는 몸짓은 점점 더 표준화되고 복제 가능해지며, 마침내 ‘범용(凡庸)’으로 굳게 되는 시대다. 하스미의 표층을 향한 집착은, 이 근대의 역설-개성적이고자 할수록 범용해진다는-을 미학적으로 역이용하여, 번역 가능한 의미/포즈/신화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근대적 장치를 잠시 멈추게 하려는 ‘우둔한’ 실천으로 작동한다.
특히 <범용한예술가의초상>에서 그는 19세기 중엽, 혁명과 제정, 대중 사회의 출현이라는 근대성의 태동 과정에서, 당대의 대문호 플로베르와 그의 지극히 범용한 친구 막심 뒤 캉이 예술가로서 시대를 어떻게 통과하였는지 주목하며 범용함의 동시대성을 폭로하고자 한다.(어쩌면 과격해보일지 모르는 이 기획은 <범용한...>의 긴 호흡의 증언에서 충분히 근거되고있지만, 오구라 코세이가 막심과 플로베르의 나일강 여행기를 분석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도 좋겠디. 오구라는 플로베르가 “색채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회화적 묘사를 하며 자기 정동의 급류에 몸을 맡기는 데 비해, 막심은 형태,윤곽,크기,지리에 끌려 “치수와 거리”를 집요하게 적고, “토지를 조사하는 기술자처럼 … 이른바 측량도를 작성”하며, “지형학적 틀 속에 현실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집트 풍경은 막심에게 늘 “해독 가능”한 것이되고, “작가가 그것을 길들일 수 있는 만큼만” 그려진다고까지 단언된다. 이 글쓰기 태도는 막심 자신의 미학적 선언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1855년 『Les Chants modernes』의 서문에서 “모든 것이 나아가고 커지고 늘어난다” “과학은 기적을 만들고 산업은 기적을 이룬다”는 식으로 진보·기술·산업을 ‘현실의 정상성’으로 선언하는데, 핵심은 단순한 진보 찬양이 아니다. 이 문장은 예술을 동시대의 기술·산업이 만든 현실의 속도에 종속시키는 선언이다. 즉 근대가 발명한 범용성(동시대 규격)을 예술이 선점해야 한다는 요구이며, 막심의 여행기/사진/시적 태도는 그 요구를 가장 노골적으로 수행한다.) 개성적이고자 애썼으나 “읽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기억된 막심의 글은, 플로베르와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치기어린 짓이지만, 천페이지가 넘는 장서가 전달하는 바를 아주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근대는 “예외적 개성”을 꿈꾸게 만든다. 그런데 그 꿈을 가능하도록 이끄는 조건(매체, 제도, 이름의 유통, 대표/대변의 욕망)은 개성을 ‘양식화’한다. 그 결과 개성은 “나만의 것”이 아닌, “누구나 사용 가능한 것”이 된다. 이 ‘개성의 보편화’가 곧 범용이다.> 하스미의 문제의식은 “범용한 인간을 경멸하자”가 아니다. 근대가 개성을 생산한다고 믿는 바로 그 지점이 사실은 범용이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이다.
하스미의 진단에 의하면, ‘번역 가능한 의미/포즈/신화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근대적 장치’를 극복하는 희망은 남다르고자하는 개성이 아니라, ‘우둔’에 있다. 하스미에게 우둔이란, 영리한 해석으로 나서지 않고, ‘읽기 어려움(쓰기 어려움)’을 감수하며, 보는 것, 읽는 것, 쓰는 것으로 되돌아가려는(번역을 지연시키는) 고집이다. 즉, 막심 뒤 캉과 반대되는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플로베르의 그 유명한 ‘스타일’이란, 곧 실천된 우둔이다.
하스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래 <누벨바그 갤러리>에 게시하려 준비하던 글을, 어쩌다보니 일부 뜯어오게 되었지만, 본론은 지금부터다.
-<하스미의 수사적 전략에 대한 생각>의 오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791668&s_type=search_name&s_keyword=%ED%8E%99&page=1)해당 링크 글에 대한 비판.
함부로 전제해서 생긴 오해를 정리하겠다면서 또 개인적인 의견을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설파하고있는 이 글은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baseball_new13&no=630579,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baseball_new13&no=630582) 위 두개의 글로 세세히 거론했던 세가지 오류가 또다시 반복된다.
우선, 펙펙이는 <미시마에 대한 말 by 하스미 시게히코>(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787884&exception_mode=recommend&page=2)에 게시된, 하스미의 발언으로 추정되는 '말모음'-
"고등학생 시절 《가면의 고백》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지독한 '역겨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치부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하여 관객의 박수를 유도한다. 이것은 고백이 아니라 '고백의 연기'이며, 그런 기만적인 태도야말로 미시마 문학의 본질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철저히 계산하고, 그 계산된 구도 속에서만 움직인다. 거기에는 언어와 사물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사건'이 없다. 오직 미학이라는 이름의 박제된 포즈만이 있을 뿐이다."
"미시마의 문장에서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바다든, 육체든, 금각사든 그것들은 모두 미시마라는 작가의 관념을 설명하기 위한 '소품'으로 전락한다. 그는 세계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리 그려놓은 설계도에 세계를 억지로 끼워 맞춘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를 논할 때, 그가 스스로를 연출하며 만들어낸 '죽음'이나 '이데올로기'라는 두꺼운 막 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비평이 마주해야 할 것은 그가 남긴 텍스트의 차갑고도 명료한 표층, 즉 '보여지는 것' 그 자체여야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에는 언어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이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의 언어는 미리 세워진 미학적 설계도에 따라 완벽하게 제어되어 있으며, 그것은 마치 잘 닦인 가짜 금도금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언어가 스스로를 배반해 가는 불온한 활기가 미동조차 없습니다."
을 해석하던 중, <‘죽음’이나 ‘이데올로기’>를 <미시마의 관념>으로 동치시키고, 하스미가 이 <미시마의 관념>을 두꺼운 막에 비유한 것을 두고서, 다음과 같은 식을 만들었다. <미시마의 관념=두꺼운 막. 즉, 미시마의 관념=두꺼움>. 이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심각한 논리 비약이다. “두껍다”는 “막”에 대한 꾸밈말이지, 비유 대상의 꾸밈 말이 아니다. 만약 안성재가 “너의 요리는 촘촘한 안개 같아서 그 의중을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면, 안성재는 “너의 요리는 촘촘하다”라고 말한 셈이 되는가? 위 링크의 글에서 “두꺼운”은 “미시마가 스스로를 연출하며 만들어낸 '죽음'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유적 표현인 “막”에 대한 형용사다. 세계에 대한 꾸밈말이 결코 아니다. 즉, <하스미의 수사적 전략에 대한 생각>에서 펙펙이가 전제한 <세계=두꺼움>은 명백한 오독이다.
둘째로, 애초에 <미시마에 대한 말 by 하스미 시게히코>에 게시된, 하스미의 것으로 추정되는: 출처가 없고, 발언의 앞 뒤 맥락이 거세되었으며, 인용된 문장의 원 글이 학문적 성격의 글인지, 설득을 위한 논증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간략화될 수밖에 없는 인터뷰인지도 불명확한, 이 말모음은, 성서가 아니다. 그저 "행위의 증언"일 뿐인 말모음을 두고서, 각 문장이 서로 호응한다고 굳게 믿어버리고, "형용모순"이나, "말의 중2스러운 사용"을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축자주의>의 함정에 말려든 실패인 것이다.
셋째, <펙펙이는 그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인 하스미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의심이 강한 확신으로 굳어지는 지점이 있다.
<하스미의 수사적 전략에 대한 생각>에서 펙펙이는, <하스미 본인 역시 "일본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그의 문학,영화 비평의 미학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라며, 충격적인 주장을 사실로서 전제하고있다.
과연 하스미는 "일본적인 것"에 애착을 드러낼까?
아니다.
펙펙이가 전제한 충격적인 주장은 사실과 완전히 반대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일본적인 것,프랑스적인 것,미국적인 것,한국적인 것의 틀 자체를 혐오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 번역,출간된 하스미의 저서 중, 가장 판매량이 높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유명한 <감독 오즈 야스지로>에서 하스미는, 오즈를 "일본적인" 미학을 대변하는 작가로 보는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단단히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하스미의 수사적 전략에 대한 생각>에서 펙펙이가 주요한 근거로서 끌어오는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서 조차, 하스미는 오즈를 두고 했던 말을 반복 한다. 한국어로 버젓이 번역,출간되어있는 <나쓰메 소세키론>의, "알라딘 책소개 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저자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그의 작품에 숨겨지고 매몰된 의미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것의 ‘말들의 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소세키를 “지극히 물질적인 언어의 실천가”로 포착하고 있다. 또한 그는 소세키라고 생각되는 그림자와의 조우를 회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세키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기억을 잊어버릴 것, 그리고 소세키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 것, 그리하여 언어 의외의 어떤 것도 시야로부터 일소해버릴 것을 강조한다.-
다시 묻는다. 과연, 하스미는 "일본적인 것"에 애착을 드러내는가?
완벽한 오독이다.
<하스미의 수사적 전략에 대한 생각>의 댓글에는, 펙펙이를 "전문가"취급하는 코멘트가 달려있다. 글이 논증적 형식만 취하고 있다고 해서, 대충 좋은 글이겠지 치부하고 넘겨버리는 습관은 이래서 위험하다. 자기가 말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한 사람의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믿어버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펙펙이의 작업은 지극히 위험하다. 다행히 독갤에서 펙펙이의 글에 호응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잘 모르는 대상을 자신의 편협한 의식으로 성급히 판단내리고서, 그렇게 편견으로 더럽혀진 관념대로만 주변을 꾸며놓는 그 태도는, 전염되기가 쉽다.
우리는 세계를 마음대로 이해해버리지 말고, 우리 주변의 대상을 -그 대상이 우리와 대립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항상 겸허하게 들여다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나의 투쟁>의 비극은, 언제고 재현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건 거의 하스미 개설로도 읽을 수 있을 법한 글이구만... 개추
이건 대체 뭔 컨셉임
울갤러니까 그정도는 아해해주셈
@Pi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