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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보르헤스가 진행한 여러 편의 강연을 담은 이 책은 보르헤스가 쓴 작품들인 <픽션들>, <알레프>의 기발한 상상력과 작품 속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이 어떤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느정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첫 번째 강연의 주제는 ‘책’ 으로, 도서관장을 역임함과 동시에 뛰어난 작가였던 그의 생각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주제였다.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책은 기쁨을 주기 위해 읽는다. 만약 독자가 자신의 작품을 읽으면서 즐거움이 아닌 피곤함을 얻는다면 그건 작가로서의 실격이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책을 읽다 재미가 없다면 그 즉시 그만두고 다른 책을 읽어라‘ 이런 뉘앙스로 말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순간 재미가 없는데도 독파 후 성취감을 위해 꾸역꾸역 취향에 맞지 않는 작품을 읽어나가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으로 인상깊었던 주제는 불멸과 시간. 이 두 가지였다.

보르헤스는 불멸이란 주제를 말하며 윤회론을 곁들이는데, 윤회론의 핵심 주장은 ‘우리는 먼 과거에도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고, 무한한 시간 속에 있으며, 우리가 시간의 중심이고, 수없이 많은 과거의 시간들을 잃어왔으니 다가올 미래도 두렵지 않다.‘ 라는 것이다.


묘하게 실존주의의 향기를 풍기는 이 주장을 인용하면서 보르헤스는  ’어떤 작품, 작가, 말, 사물이 잊혀졌더라도 자신의 안에서 살아있다면 그건 불멸일 것이다. 내가 그 작품의 구절을 말할 때 나는 잠시 그 시절 사람이 되어 그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느끼고, 그의 일부분이 된다.‘ 라고 말한다.

애독자였던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말이면서도, 작품을 읽어 본 독자에게는 자신의 작품에 담긴 수많은 모티브와 창의성을 상상하게끔 만드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보르헤스는 과연 몇 명의 인물들에 이입하여 어떠한 느낌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냈던 걸까?


불멸과 같이 언급되지만 조금 뒤에 개별적인 주제로 등장하는 ’시간‘ 강연에서 시간은 영원성의 선물과도 같은 존재라고 덧붙이는데, 갑자기 우주, 신에 대한 어려운 인용도 나오고, 약간의 물리학적인 부분까지 덧붙이면서 제논의 역설과 관련지어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뭐 많은 인용과 주장이 있지만 결국 보르헤스가 청자에게 가장 전하고픈 말은 ’자신의 변화를 인식해서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가장 유익하다‘ 라고 전하려던 게 아닐까.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갔던 장소를 성인이 된 지금 다시 간다고 해서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내가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는 현재가 약간의 미래에 대한 열망, 그리고 약간의 과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현재는 끝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고. 그걸 인식한 순간 이미 우리에게서는 멀어져있다고 설명한다.


현재 자체는 내가 처해있는 상황의 기준점이 될 수 없다면서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만약 인간의 본질적인 원형을 복제해서 만들어진 클론이라면 우리의 원형은 영원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할 것 이라고 한다. 현재는 단지 그대로 존재할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변화를 인식하는 것을 점을 찍는 것으로 가정해본다면 변화를 여러 번 느끼면 점들이 모여 선이 될 것이고, 움직임 없던 점에서 비로소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유의미한 움직임으로 점차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상술한 주제와는 달리 다른 주제들은 자신이 영감을 받은 문학 작품들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는 신곡, 각종 탐정 소설, 천일야화 등이 있다.

그냥 가볍게 읽기 좋은 파트들이고, 불교를 비롯한 종교들에 관해서말한 내용도 존재하는데, 종교는 문외한이라 그렇게까지 마음에 와닿거나 재밌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보르헤스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파트는 ‘악몽’ 인데, 위의 시간, 불멸 주제와 어느정도 결이 비슷했다.

보르헤스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파트는 자신과 다른 작가들의 실명을 다룬 ‘실명’ 이다. 보르헤스는 유전력이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점차 시력을 잃어갔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책을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 더 넓은 시각을 가지면서도 실명한 것에 좌절하지 않고 꾸준한 활동을 했다는 것이 대단했다.


책을 읽어보면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진행한 강연인데도 다른 주제와의 자연스러운 연결점이 있고, 내용이 어느정도 이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가 얼마나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작품을 썼는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자국 사랑이 엄청난 분이셔서 아르헨티나 작가들의 시나 소설의 인용이 많이 나오는 것도 특징인데, 재밌어보이는 작품을 떠먹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말하는 보르헤스> 는 그의 소설들과 다르게 가볍게 읽기에 좋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 어딘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인간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더 이상 ‘보르헤스’ 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위대한 작가들의 반열에 드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단순히 겸손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정말로 형편없는 작가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강연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능력을 의심했을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연을 지켜보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굉장히 조용하고 소심하게 말했다고 하니까.


“작품은 출간된 당시와 같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들이 그것을 더 풍요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라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그의 소설들은 그때와는 다르게 읽히며, 셀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많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기에 좋은 보르헤스 입문서이며, 수많은 분야를 아우르며 즐거움과 지혜를 탐구했던 독서가가 그간의 열망을 기록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