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헤세 그 스스로도 어느정도 인정했듯이 싯다르타는 '경전-혼자하는 부처놀이'의 스펙트럼에서 상당히 오른쪽에 있고
서양인이 자의적으로 하는 부처놀이에 오리엔탈리즘이란 혐의가 따라오는 건 자연스럽긴 한데
그것 뿐이다라는 것은 다소 부당한 부분이 있는 평가라 생각하고 글을 썼었다만
부족한 것 같아서 좀 더 파고 들어가서 얘기를 이어가겠음
뭔가 불교를 좋게만 말하려 한다고 믿고 읽는 사람이 있을까봐 미리 밝히는데
불교 신자들에게 다소 불쾌한 내용일 수도 있음
불이의 불교의 포용성은 무엇도 특정 가치에 귀속되지 않는 유연성을 말함
태초의 말씀같은 신성한 uno라는 절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포용성은
주류의 관점이 관용으로 소수자를 수용하는 태도와 같지 않음
말하자면
주된 관점(신성)이 각 경계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경계를 압도적인 빛으로 시야에서 지우는 게 아니라
주된 관점을 인정을 안해서 "불변으로 고정된 신성과 추함"이라는 구분이
무의미한게 불교의 시작인 셈이지
그러니 불교는 언제나 불편할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함
선은 집중으로 변환되고 집중은 기술이 되고
기술은 폭력의 형식으로 전환되는게 일반적인 흐름이자 일어나고야 마는 현상이거든
그래서 검선일체라는 검술 수행의 극의를 승려가 선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같은 맥락의 사유가 전쟁과 징병의 윤리로 동아시아에서 호국승병이란 형태로 나타나고
일본에선 2차대전까지 연결 되어 승려가 나서서 독려하는 침략 전쟁이란 역사가 존재하거든
이걸 불교의 타락이라고 말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함
지금도 제니가 "내가 젠을 말하노니 꿇어라"라고 일갈하는 뮤비에 승려가 유튜브로 심오하다 반응하고 있거든
그게 틀려먹었고 같은 수준의 폭력이나 타락이 이어진다는 취지의 말은 아니고
불교의 유연성이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을 유예하여 세상에 작용하는 방식이 그렇고 불교는 원래 그래라는 게 잘 안 통한다는 말임
그 중에 어떤 것만 원래 그래야하는 불교가 아니라 인정을 못한다는 건 유연성의 장점만 불교로 인정겠다는 욕심의 결벽이고
모든 건 같은 이유로 반복되지만 나를 기준으로 한 선에서 인정하는 "진정한 불교"란 환상만으로 안심에 도달하는 거지
불교의 포용성은 순수하지 않지만
그 불순함은 오염이 아니라 구조고 그 모든걸 현상 그대로 다 일단은 포괄하는게 불교의 구조인 것임
다만 그 관용과 폭력이 그 자체로 배제되지 않은채 혼용되는 그 유연성과 상대성은 편하지만
그만큼의 책임을 각각에게 요구하고 있어서 불편한 것이고 그 유연성과 상대성을 스스로는 편하게 여기면 안된다는 말임
말하자면
고통을 보는 법 벗어나는 법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는 각자에게 맡겨진 것이고
어떻게 그것을 따랐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고 인정을 해주는게 불교의 포용성일 뿐
그 고통에 대한 충동과 반응은 너에게 달려 있는 문제지만 그 결과의 업은 본인이 정하는 게 아니지
그리고 그 업에 대해서 설명해줄 절대자는 끝내 만날 수 없다는 말이고 용서도 없다는 것임
윤회로 자아를 잃고 다른 관점 다른 기준에서 세상을 겪는 것으로
그 어쩔 수 없이 밀려 떠내려감으로 업을 치루는 것을 반복할 뿐이지
또한 그 강물처럼 떠내려감을 깨닫는 건 대단하고 남다른 통찰로 이룬 발견일 순 있어도 모든 걸 지워주는 성스러운 빛이 아님
그냥 그대로 가라앉고 싶으면 가라앉고 떠내려 가려면 가거라 나는 다시 또 흐르리라 같은 저주가 주는 위안일 수는 있어도
헤세의 소설이 불교를 믿고자 하는 신자의 입장에서
목적으로 도달하는 수단 즉 경전이나 수행법의 구조적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맞고
불교를 사유체계로 이해하고 그 구조에 대한 이해와 거기서 느낀 감흥을 개인적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생각함
불교에 대한 이해가 좀 맘에 안든다 오리엔탈리즘이다 뭐 이런 구체적인 지적에 일리가 있는 점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대고 싶진 않은데
암튼 그래서 불교랑 아예 상관없다? 불교는 소재일 뿐 전부 헤세나 서양의 사유다? 그게 오히려 불교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해서 써봣음
동의하기 힘든 게 헤세의 싯다르타는 불교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히피즘의 결합에 가깝다고 생각함. 싯다르타의 여정 자체가 진정한 자아 '진아'를 탐색하는 과정이고 이는 불교적 맥락에서는 쉽게 포용하기 힘든 부분이잖앙. 무아는 불교의 기초에 놓여있는 개념이고 이걸 다르게 해석하는 순간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 팔정도, 무아 등등이 다 무의미해지는 걸 그리고 결국엔 깨달음의 본질에는 '사랑'이 놓여 있다는 점 또한 불교와는 많이 다른 지점임. 불교에서는 사랑 또한 연기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상에 가까운 것이지 깨달음의 본질에 놓일만한 무언가가 아님. 헤세의 싯다르타는 불교적 개념들을 따왔을 뿐이지 서양 근대 철학적/종교적 기조를 충실히 따랐다고 보는 게 적합하지 않을까.
헤세의 의도가 어떠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굳이 불교적으로 해석해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함.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그게 불교적이진 않은거지. 불교가 다양한 모습이 있고 모호한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모든 승려들이 무아 개념을 완벽하게 수호하는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불교라기보다는 내면의 진정한 자아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서구의 종교/철학적 맥락에 더 맞닿아 있다고 느껴졋우
댓글 대부분 인정함 다만 나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깨닫는 건 그를 부처로 만드는 그 깨달음이거나 혹은 네가 생각한 진정한 자아를 찾은 게 아니란 생각임 그냥 이게 반복될 거란 저주에서 얻는 위안이라고 보고 그게 왜 위안이 되는지에 대한 사유가 불교적이란 생각에 써봣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기독교적 세계관도 결합이 되어있다는 평가를 매우 긍정함 그런데 같지 않고 불교에 대한 사유가 드러나는데 기여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함
@ㅇㅇ(211.220) 또 덧붙히고 싶은 말은 무아,진아에 대한 해석은 불교 안에서도 달라지는데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여래장은 모두를 부처가 될 예언적 본질인 보살로 만들고 그건 초기 불교 경전과 모순이지만 공이라는 맥락으로 그걸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대승불교를 불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 해석을 기반으로 한 사유가 불교적이지 않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함
그럼에도 헤세의 사유엔 기독교의 영향이 있고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임을 부정하진 않음 그래도 스펙트럼 안에 넣어줘도 괜찮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