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 시론 ―― 확률의 감촉(手触り)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어떤 인간이 수용소에서 갑자기 비열한 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수용소에 들어와 비열해진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던 비열한 성질이 이전에는 겉으로 드러날 필요가 없었으나 수용소 안에서 단지 표출되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M. A. 보이첸코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는 그 생활이 의식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며, 의식과 인간 본질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 여하에 따라, 동물로 전락하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살아남기도 한 것이다.’”
[중략]
“어째서 이 사람은 타락하지 않았는가? 아니,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자신들에게 구1원의 손길을 내밀고, 가장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또 다른 사람을 기억하지 않겠는가?”
(제4부 제1장, 기무라 히로시 역)
이것은 너무나도 소박해 보인다. 실제, 솔제니친은 그 작품의 많은 곳에서, 예를 들어 나로드(민중)의 ‘마음’(『연옥의 내부(제1원)』)을 강조한다. 러시아의 가혹한 현실이나 사람들의 극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그 골계스럽기까지 한 신념을 표명하는 그의 작품은, 그렇기에 도덕적이고, 게다가 도덕 교과서적인 뒷맛의 씁쓸함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너무나도 적나라한 신앙 고백이 있다. 물론, 우리들은 그것을 예를 들어 러시아 정교와의 관련성이나 19세기 슬라브파 인텔리겐치아의 전통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는, 솔제니친의 ‘한계’도 묘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한계’는, 솔제니친이 어째서 저토록 “도덕적”인가 하는 물음을 소거한 곳에서밖에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1962년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부터 시작되는 솔제니친의 작품군은 문학적 관심도 당연하지만 대개 그 정치적 문맥 속에서 읽혀 왔다. 그의 작품은 정치적 문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실제, 그 자신도 74년에 서독으로 국외 추방되기 전에는 극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역으로 그의 작품은, 정치적 문맥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재에 와서는 이미 그 가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특히 뛰어난 ‘문학자’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이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라면, 솔제니친의 작품 또한 그 방향성만이 정반대일 뿐 똑같이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역시 사회 상황의 콘텍스트 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고, 인간의 진실된 모습에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자료로서 ‘회수 가능’한 것일 뿐…….
위와 같은 기술을 보고 솔제니친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 혹은 그 제반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차적인 것이다. [중략] 게다가, 그런 나의 연설을 옛 수감자들이 읽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뭣 때문에 나에게 발언권과 연단이 주어졌단 말인가? 겁을 먹은 것인가? 명성을 얻고 연약해진 것인가? 사형수들을 배신한 것인가?
나는 사회의 테마와 예술의 테마를 결부시키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그럼에도 잘 되지 않았고, 지그재그로 구부러진 두 개의 축은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송아지가 참나무를 들이받다』 소메야 시게루 번역)
확실히 여기에는 솔제니친이 가진 ‘한계’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한계’와는 완전히 뒤집힌 것으로서의 ‘한계’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과 솔제니친은 이 ‘한계’를 사이에 두고 대조적인 곳에 서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항상 그 뒷맛의 씁쓸함을 동반한 ‘신앙 고백’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아니, 비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신앙 고백’에 있어서, 솔제니친(인텔리겐치아)의 물음은 최종적으로 좌절한다. 우리들은 그것을 솔제니친 문학의 끝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의 ‘문학’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마치 솔제니친은 ‘사회’와 ‘예술’을 대치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위의 인용은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 내용에 관한 솔제니친의 어떤 당혹감을 나타낸 대목이다. 만약 그가 ‘사회’와 ‘예술’을 대치시켰다고 한다면 위와 같이 당혹스러워할 리가 없다.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로, 솔제니친에게 있어서 예술과 사회를 나누는 것 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벨상이라는 하나의 ‘예술’의 장 안에서 말을 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을 거절하게 된다). 그는 노벨상 수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 이외의 파악 방식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문학의 본질’은 “번거롭고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는 그 발언은 솔제니친의 ‘문학의 정치성’으로서 이해되고 만다. 그러나 아마도 그에게 있어 ‘문학의 정치성’이라는 말은 넌센스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제니친의 문학 작품은 결코 뛰어난 것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는 한계에 대해 그가 그토록 자각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또한 쓴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가지게 되는 정치성에 대해서도 아마도 그는 똑같이 둔감했을 것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발언이 오해받을 가능성에 대해 우리들 측에서 보면 놀랄 정도로 무자각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를 무자각으로 만든 그 입지에 대해, 라게리(수용소)라는 것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솔제니친의 문학을 ‘정치적’으로 읽는 기존의 독해와 다름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또한 그 작품을 그것 자체로서 읽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실제, 나는 이 시론을 쓰면서 크게 전기적 자료나 인터뷰 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솔제니친의 작품을 해독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학을 정치적으로 읽는다’고 할 때, 우리들은 이미 솔제니친이 이해할 수 없었던 ‘문학’과 ‘정치’의 분할선을 설정해 버리고 있다. 앞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솔제니친은 그 분할선이 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학’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먼저 솔제니친이 서 있었던 (서게 되었던) 그 위치에 근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제니친의 ‘문학’의 원점은 라게리에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단지 그의 문학적 성향을 특징짓는 것만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라게리는 "테마"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성으로서 솔제니친 문학 속에 계속 존재한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그는 라게리를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나로드(민중)의 ‘마음’ 등을 믿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게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라게리라는 사실, 『수용소 군도』 속에서 방대한 자료를 열거함으로써 비로소 그 윤곽을 덧그릴 수 있었던 "경험"을 둘러싼 알레고리로서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의 자신의 형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발밑만 보고 살면 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왜 끌려왔는지, 언제 나갈 수 있을지,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어.
[중략]
슈호프의 계산은 간단했다. 서명을 거부하면 꼼짝없이 총살당한다. 서명하면 조금은 더 살 수 있다. 그래서 서명한 거다.”
(기무라 히로시 역)
마찬가지의 묘사가 『연옥의 내부』에서는 스피리돈에 대해 전개된다. 주인공 네르진은 인텔리겐치아이며, 거의 솔제니친과 등신대로 설정되어 있다고 봐도 좋다. 그 네르진은 ‘그(스피리돈)야말로 인텔리의 배움터가 되어야 할 「민중」의 대표자이다’라고 생각하고, 스피리돈에게서 「한 알의 모래알에도 필적할 만한 러시아 농민의 처세술」을 듣게 된다 (63, 64절). 그런데 네르진은 스피리돈의 행동 기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행동은 그다지 논리 정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 있어서 스피리돈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 말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대처하고, 뛰어난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네르진은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해 스피리돈에게 묻는다.
“나로선 모르겠군. 늑대를 때려잡는 사냥개가 옳은지, 식인 늑대가 틀린 건지!”
스피리돈은 이 물음에 밝은 얼굴로 즉석에서 대답한다.
“만약 그가 그렇게 생각할 뿐,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었다면 어쩔 텐가? [중략]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겐가――그런 걸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누가 그걸 알 수 있을까?”
(기무라, 마츠나가 역)
『연옥의 내부』에서도 『암 병동』에서도 인텔리들끼리의 사변적 논쟁은 몇 번이고 펼쳐진다. 그러나 그 논쟁은 아무런 결론도 도출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나로드(민중)를 향한다. 혹은 『암 병동』에서라면, 결국 전직 대학 교수인 늙은 슐루빈은 ‘도덕적 사회주의’를 호소한다. 서두에 인용한 『수용소 군도』의 한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너무나도 소박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정치적 주장’으로 끌려 들어감으로써 작품 전체의 긴장감을 손상시키고 있는 것으로조차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네르진도 코스토글로토프(『암 병동』의 주인공)도 결코 스피리돈이나 슐루빈에게 동의하고 있지 않다. 하물며 확신 같은 건 품고 있지 않다. 과연 확실히 네르진은 스피리돈의 처세술을 듣기 전에 이미 ‘민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민중 속에서 뽑혀 나오는 것은 ‘마음’에 의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기서 이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만 한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스피리돈은 결코 ‘민중의 마음’ 따위는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스피리돈의 대답은 실은 전혀 대답이 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수수께끼에 가깝다. 여기서 예를 들어 그것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유명한 대심문관 설화 뒤에 이반에게 입을 맞추는 알료샤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솔제니친의 시도를 ‘신앙 고백’으로 환원해버려서는 안 되듯이, 이 키스를 그 알료샤와 이반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키스 자체는 알료샤와 이반의 대화가 성립해 버린다면 실은 거의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에 불과하다.
이반은 ‘조화(하모니)를 인정할 수 없다’고 호소할 수밖에 없고, 알료샤는 그것에 대해 키스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수조 킬로미터의) 간극이 펼쳐져 있는 것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은 이 대화의 성립 자체가 극히 역설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바로 여기에 이러한 대화가 성립할 가능성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에도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알료샤와 이반의 대화를 성립시키고 있는 조건인 것이다. 확실히 도스토옙스키는 이 ‘조건’을 명시한 후에 두 사람의 대화를 개시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대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두 사람에게 취하게 한 역설적인 입장은, 내 생각에 솔제니친이 서려고 했던 장소와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키스를 기적이라고 생각해버릴 때 그것은 이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독해의 진정한 어려움을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로드의 등장과 ‘마음’이라는 말의 사용을 솔제니친의 ‘종교’와 안일하게 결부시켜 버릴 때 (비록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거기에서는 똑같은 회피가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대심문관 설화와 조화(하모니)론 직전, 이반과 알료샤의 대화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제5편 제4장). 우리들은 여기에 두 사람의 대화가 성립하는 이유와 솔제니친 입장의 집약된 표현을 찾아낼 수 있다. 이반은 장군을 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료샤도 또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선악이나 정사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이른바 “어째서 오히려 비합리를 의지하지 않는가”(니체)라는 경지에 있어서 교환되고 있다.
『“잡아먹어라!” 장군이 소리치자 사냥개 떼를 일제히 소년을 향해 풀었어. 어머니의 눈앞에서 개의 먹이로 줘버린 거지. 개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를 갈가리 찢어버렸어! ……그 일 때문에 장군은 후견인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나 봐. 자아, 여기서, ……이 사내를 어찌해야 할까. 총살해야 할까. 말해봐, 알료샤.』
『“총살해야 해.” 알료샤는 창백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형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브라보!” 하고 이반은 기뻐 날뛰며 소리쳤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건…… 아니, 훌륭한 고행승이군! 그런데, 네 가슴속에도 제법 악마의 자식이 숨어 있는 것 아니냐, 알료샤 카라마조프 군!”』
『“난 바보 같은 말을 했어. 하지만……”』
『“하지만, 그거야. ……” 이반이 외쳤다. “잘 들어, 도련님, 이 지상에 그 바보 같은 것이 크게 필요하단다. 세계가, 그 바보 같은 것, 그 위에 성립되어 있어서, 그것이 없었더라면 이 세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
(이케다 켄타로 역. 방점 인용자)
알료샤는 여기서 장군을 총살해야 한다고 말해버린다. 그러나 이 발언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알료샤에게 던져진 질문은 어느 쪽에 대답하든 ‘그리스도인 것’을 단념해야만 하는 종류의 질문인 것이다. 만약 알료샤가 ‘그리스도인 것’에 고집한다면 그는 이반의 질문을 얼버무리거나 그 문제 설정 자체를 무효화시켜 버리는 형태로밖에 대답할 수 없다. 만약 고통이 해소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통 그 자체가 소멸해 버리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료샤는 대심문관 설화 뒤에 아마도 이반의 ‘나는 조화(하모니)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절규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반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스피리돈의 저 대답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네르진은 그 스피리돈의 대답을 만났을 때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그의 대답 방식은 네르진의 질문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서 알료샤는 장군을 총살해야 한다고 대답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는 이반의 물음을 얼버무릴 수도 충분히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미소를 띠며 ‘바보 같은 말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솔제니친이 어째서 그토록 ‘민중(나로드)’을 고집하는가 하는 의문과 평행한 관계에 있을 것이다.
『수용소 군도』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솔제니친의, 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은 이른바 ‘해소 불가능’한 것이다. 체포될지 안 될지, 10년형일지 25년형일지, 혹은 총살일지, 어디에 무슨 죄로 언제 보내질지, 모든 것은 거의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그들은 그저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유를 캐묻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와 같은 물음을 제기할 때, ‘자신의’라는 한정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경위를 이른바 ‘부조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¹⁾
예를 들어 나치라면, 가스실로 보내지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것이 아무리 지리멸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무언가의 ‘이유’는 존재했다. 즉, 거기서는 “어째서 나의 아버지는 살해되었는가”라는 물음이 유효할 수 있다. ‘어째서’라는 의문사와 ‘나의 아버지’라는 고유명사가 결부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 물음은 ‘나의 아버지’를 ‘유대인’이라는 일반 명사로 치환하여 “어째서 유대인은 살해되었는가”라는 형태로 처음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후자의 문제의 답이 결코 전자의 물음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자의 물음을 발한 사람에 대해 후자의 대답을 돌려주는 것은, 나치의 예의 경우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거기서는 실제 아버지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살해된 것이므로. 그 이상 소급하려 한다면 “어째서 나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는가”라고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실은 이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아버지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인 것이고, ‘유대인’이라는 속성을 떠난 곳에서 ‘나의 아버지’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물음은 “어째서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인가”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은 매우 근원적인 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도 그 물음에 답할 수 없고, 또한 물음을 제기하는 측도 이미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어째서 나의 아버지가 암에 걸렸는가”라고 물을 때, 실제로는 그 물음은 용이하게 그러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변해버리고 말 텐데도 불구하고, 그 소행을 금지함으로써 우리들은 ‘어째서’라는 의문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나치의 예를 넘어 그 물음을 제기했다 하더라도, 이 금지는 유지되어 버린다. 바꿔 말하면, 거기서는 ‘근원적인’ 물음과 ‘비근원적인’ 물음 사이의 분할선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수용소 군도』의 경험은 철저하게 ‘해소 불가능’한 것이다. 거기서는 “어째서 스탈린 체제가 생겨났는가”라는 물음과 “어째서 나의 아버지가 살해되었는가”라는 물음 사이에 실은 일체의 관계가 없다. “나의 아버지”는 “스탈린 체제” 속에 있었기 때문에 죽임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조건이기는 하지만 이유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내 아버지의 이웃은 아버지와 별다름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체포되는 일도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내 아버지와 그 이웃의 차이를 “어째서”라는 말로 물을 수 있는가. 나치의 경우라면 그 차이를 ‘유대인’이라는 일반 명사로 치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용소 군도』의 경험에서 그러한 치환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확률적으로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내 아버지와 그 이웃과의 차이. 한쪽은 체포되고 다른 한쪽은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차이에 이유 따윈 없다. 거기서는 “어째서”라는 물음이 금지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용소 군도』에 그려져 있는 광경은 단순한 ‘정치적 탄압’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정치적’이지도 않은 것이고,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한 판단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이 죽임을 당하는 쪽이 되고, 다른 인간은 죽이는 측에 서지 않을까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느새 역전되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주체나 의지라는 개념이 통용되지 않는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 죽고 양심이 없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의지를 가진 자는 마음대로이지만 그것은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라는 물음을 발한다고 한다면, 사람은 처음부터 대단히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는 ‘근원적인’ 물음과 ‘비근원적인’ 물음의 구별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의 아버지는 어째서 죽임당했는가”라는 물음은 처음부터 “나의 아버지는 어째서 나의 아버지인가”라는 형태로 제출되어 버리는 것이다.
앞서 서술했듯 우리의 일상생활도 또한 실제로는 그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의해 지탱되어 성립하고 있다. 단지 일반적으로는 ‘비근원적인’ 해답에 의한 일종의 착각이 물음을 노정시키지 않을 뿐인 이야기다. 그러나 『수용소 군도』의 세계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그러한 착각을 허락받지 못한다. 물음은 부정할 여지 없이 근원적이 되어버리고, 그때 사람들은 일상적 세계와 다름없이 답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덧없는 근원적인 물음을 되풀이하든가, 아니면 이미 물음을 세우는 일 없이 운명(확률)을 감수하든가, 그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그것 이외의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그 수용소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경험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그 별종의 가능성 주변을 항상 돌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그는 ‘민중(나로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혹은 ‘마음’, ‘도덕’, ‘대지’, ‘긍지’라는 말도 좋다. 그것들의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가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나이브한 이상주의에서는 아니다. 그것은 극한 상황에 있어서 절망적으로밖에 될 수 없는 듯한 사고방식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다시 묻고자 하는 작업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그는 그 사고의 존재 방식을 잘못 짚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자신이 극단적인 상황에 있어 절망적으로 되지 않는 사고를 몸에 익힌 것도 아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뛰어난 작품이지만, 솔제니친은 주인공 슈호프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단편, 예를 들어 『마트료나의 집』이나 『크레체토프카 역의 사건』의 문체와 비교해 보면 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문체는 금욕적일 정도로 즉물적인 것이다.
솔제니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윤리나 도덕이나 희생이 아니다. 그런 것이 통용되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는 무엇이 도덕적인지 결정할 수 없는 세계에서의 도덕적 방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그는 놀라고 있는 것이다. 『수용소 군도』 속에서 몇 번이고 말해지고 있듯이 거기에서는 무엇을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한" 것인지도 결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심문의 경우). 그러나 그럼에도 거기서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있다. 솔제니친은 그 경이를 이야기하려 할 때 도덕적인 화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그것을 우리들의 말하는 ‘도덕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고 그 ‘도덕성’이 비난받거나 찬상되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솔제니친의 사고의 근원성은 소거되어 버리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개인적으로”라고 말한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거짓말을 거부했다고 해서 보답받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헛수고일지도 모르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결과로 끝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자신의 딸을 인질로 잡혀 있고 게다가 당신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자백에 있어서 수인의 친구를 고발할 것을 강요받고 있었다면 어떨까? 게다가 결국 당신의 행동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심문관의 변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거짓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의 문제를 세우는 것은 넌센스인 것처럼 생각된다. 실제 거기서는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그 상황을 카프카 작품의 정경과 비교해 봐도 좋다. 그 안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일 수밖에 없다. ⁽²⁾
앞서 서술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한 구절에서 알료샤가 이반에게 “바보 같은” 대답을 돌려준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찾아낼 수 있다. 솔제니친은 슈호프나 스피리돈 같은 인간이 입장이 바뀌었을 때 얼마나 잔혹함을 드러낼 수 있는지 충분히 지칠 정도로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러시아의 ‘민족=국민(나로드)’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 같은 나로드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도 알고 있다. 그의 경험을 보는 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그의 "경험"이라는 것을 ‘비근원적’으로 읽어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읽혀 버린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솔제니친 자신은 자신의 근원적인 언어가 ‘비근원적’으로 읽혀 버리는 그 차이(라게리를 체험하고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차이)에 지나치게 둔감한 것처럼 보인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이르러서는 『1944년 8월』이나 그것을 「문학적 텍스트」로서 솔제니친으로부터 떼어내 읽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하여 읽을 때 우리는 어째서 그의 텍스트를 ‘비근원적’으로 읽어버리는 것일까. 뒤에 서술하듯 예를 들어 카프카의 작품과 달리 솔제니친의 작품에는 독자를 ‘근원적’인 것으로 향하게 하는 장치가 일절 결여되어 있다. 그는 그러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고찰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솔제니친 작품의 본래성에 있어 읽고자 한다면 ‘솔제니친’이라는 하나의 사실성과 작품을 대조시켜 그 차이에 대해 고찰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성은 텍스트의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앞서 "경험"이라고 부른 사실성은 이른바 텍스트 그 자체를 성립시키고 있는 장소이며, 텍스트가 쓰였다는 사실성에 의해서만 소급되는 경위(境位)인 것이다.
『수용소 군도』의 세계에 있어서 사람은 절망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토록 절망적이지 않다. 사실로서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또한 기본적으로는 같은 기적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반의 사고가 어째서 ‘유클리드적’인가 하면 그것은 그의 사고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타락할 것이라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 이외의 결론을 그는 "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는 “무엇을 해도 허용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그의 행동은 지극히 모럴리스트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그 결론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클리드적’ 사고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이다.
알료샤는 ‘비유클리드적’ 세계에 살고 있다. 적어도 이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는 그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한 뒤 알료샤에게 입을 맞추게 되었을 때 “문득 어떤 환희에 잠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용한 장소에 있어 이반은 알료샤에게 구체적인 국면을 들이대고 있다. 그는 알료샤의 ‘얼버무림’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전략을 취하지 않으면 고통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반은 알료샤 해답의 ‘근원성’을 충분히 알았다. 그 후에, 그는 묻는 것이다. ――장군은 총살되어야 할까?
이 물음에 있어서 이반은 ‘근원적’과 ‘비근원적’의 경계가 그어질 수 없는 장소에 알료샤를 몰아넣고 있다. 예를 들어 여기서 입맞춤을 하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이미 ‘근원적’과 ‘비근원적’ 사이에 경계를 그어 버리고 있다. 그 뒤에 장군의 처분이 어떻게 될지는 그것은 전혀 ‘비근원적’인 문제가 되어 버리고, 알료샤는 위험한 물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 이 입맞춤은 결코 근원적인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과 ‘비근원적’ 사이에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안전한 ‘근원성’을 확보하려는 진부한 전술일 뿐이다. 그러니까 만약 여기서 근원적이려면, 알료샤는 ‘근원적’으로 대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 있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제니친은 근원적인 지점에 서 있다. 그러므로 그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답해야만 한다. ‘유클리드적 사고’에 있어서는 ‘근원적’인 경위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이반의 물음이며 『수용소 군도』의 문제였다. 스피리돈은 확실히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피리돈은 결코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스피리돈이 타락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스피리돈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의 자취일 뿐이다. 그러나 그 기적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유클리드적 사고’는 그 기적에 있어서 근원으로부터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솔제니친은 도대체 어떠한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스피리돈이 타락하지 않았던 것은 ‘유클리드적 사고’에 있어서는 그저 확률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백 명, 천 명 중 한 사람이 우연히 스피리돈이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솔제니친의 의문은 뒤집어져 있다. 그가 묻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 아닌 이 스피리돈이 백 명, 천 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의 ‘이유’인 것이다. 이것이 저 “나의 아버지는 어째서 나의 아버지였는가”라는 물음과 동형이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솔제니친의 윤리적 언설은 항상 이 ‘이유’로서 제출되고 있다. 그는 확률의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대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고가 전근대로 퇴행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지점에 있어서이다. 그는 ‘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확률이므로,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청년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등이라고 대답해 버린다. 그러나 그의 ‘도덕’을 결과를 위한 수단으로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스피리돈은 항상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행동했지만, 그것은 역으로 수단과 결과 사이의 연관이 끊어진 상태에 있어서 굳이 ‘이유’를 찾아내려는 시도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솔제니친의 그 시도는 결국 전근대적 언설(예를 들어 루스, 러시아 정교의 강조, 사하로프에 대한 비난) 속으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사고에 있었던 물음, 인간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확률적으로밖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윤리와 ‘어째서’를 세우고자 한 그의 시도가 전근대적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솔제니친이 그러한 물음에 전근대적인 대답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처럼 질문을 세워버리면 전근대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 태도를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그의 말인 ‘마음’ 따위가 픽션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근원적으로 사고하는 이상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그는 그 어떤 종류의 거리, ‘근원적’인 것과 ‘비근원적’인 것이 강하게 분열하는 긴장에 있어서 근원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반에게 질문을 받아 “장군은 총살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한 알료샤와 같은 위1상에 있다.
그렇기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하모니론이나 대심문관의 이야기가 인용된 후에 이어지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이다. 알료샤의 이 대답이 없었더라면 하모니론은 시작되지 않는다. 이반은 알료샤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이든 ‘비근원적’이든, 어느 쪽이든 대답은 바보 같을 것으로 결정되어 있다. 실제, 특별히 알료샤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장군은 총살해야 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것은 솔제니친이 “개인적으로 거짓말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닮아 있다. 알료샤도 솔제니친도 결국은 그러한 진부한 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유클리드적 사고’의 무적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클리드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사람은 긴장을 견딜 수밖에 없다. 이반은 알료샤의 대답을 듣고 “브라보!” 하고 외친다. 그것은 “세계가 그 바보 같은 것 위에 성립되어 있어서, 그것이 없었더라면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이해하고, 또한 근원적인 위치에 설 수 있을지 어떨지, 하는 것이다.
‘비유클리드적 사고’는 기적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따분한 희망에 불과하다. 역으로 ‘비유클리드적 사고’는 ‘유클리드적 사고’ 속에서야말로 찾아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는 법칙(19세기 중엽)을 “수평화의 시대”라 부르고 “그것을 정지시키려 한 순간에 그 일과 또한 수평화의 법칙을 전개시키는” 까닭에 이 시대를 멈출 수는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현대의 비판』). 그러나 이 가장 기적에서 먼 것처럼 생각되는 수평화의 시대의 철저함에 있어서만, 사람이 신 앞에 서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도약”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유클리드적 사고’의 철저함에 있어서만 “비유클리드적 사고”를 얻을 수 밖에 없다는 이 역설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사람은 우선 속지 않으면 안 된다. 솔제니친은 두 세계의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다. 그는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적 세계의 한가운데, 이른바 ‘계보학적’으로 기적이 발견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솔제니친은 사하로프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하여 불만을 느꼈던 것이다. 그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를 이어주는 희미한 흔적에 소급함으로써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솔제니친의 문학은 항상 ‘유클리드적 세계(정치적 언설)’와 ‘비유클리드적 세계(종교적 언설)’ 사이에 불안정하게 왕복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솔제니친은 기적을 ‘정치적’으로 묻고, 정치를 ‘기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의 ‘정치적’ ‘문학적’ 발언의 골계스러움의 이유인 것이다.
이반의 하모니론이 감동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논증이 실로 구체적인 것(예를 들어 저 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때렸던 여자아이)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거기서 질문받고 있는 것은 ‘확률’인 것이다. 이반은 “그 여자아이”라는 형태로 질문함으로써 확률적 위1상을 명확히 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확률적인 물음은 ‘근원적’과 ‘비근원적’의 분할선을 유지할 수 없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알료샤와 이반이 만나는 것이다. 이반이 말하듯이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여기서는 문제가 아니다. 아마 이반은 “신은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집요할 정도로 “신은 없다”고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그토록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분열을 기적을 눈앞에 두고서 믿을 수 없는 유클리드적 사고의 한계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이해에서는 ‘근원적’과 ‘비근원적’의 구별이 또한 유지되어 버린다. 이반은 믿고 있는 것이다. 믿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역설을 역설로서 또다시 ‘기적’에 둘러싸고 마는 것 자체가 이반의 문제인 것이다. 구체적인 것에 집착함으로써만 이 위치로 소급할 수 있다.
나중에 인용하겠지만, 솔제니친은 정치를 비판할 때에 그 구체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히스테릭한 휴머니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 사이의 미세한 흔적으로 소급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것에서 확률적인 위1상으로 사고를 순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료샤와 이반의 대화의 가능성이 그 흔적으로 소급함으로써 성립하고 있는 것처럼, 솔제니친은 철저히 ‘도덕적인’ 입장밖에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도덕적 언설은 이 두 가지 사고 사이의 왕복 운동 안에서 발해지고 있다. 정치적인 발언도 문학적 기술도 모든 것이 그는 ‘도덕적’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그는 근원적으로밖에 사고할 수 없다. 그 의미에서 그는 확실히 ‘문학자’는 아니다.
여기서 비로소 솔제니친에게 있어서의 문학과 그 ‘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앞서 솔제니친의 ‘한계’는 우리들에 있어서의 ‘한계’와 뒤집힌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들과 솔제니친은 그 ‘한계’를 사이에 두고 대조적인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은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우리들과 솔제니친에 있어서는 ‘어째서’라는 질문이 던져지는 지점이 완전히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근원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문학’을 성립시키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문학’을 만들 수 없다. 구체적으로 적어 보자. 예를 들어 우리들은 스피리돈의 언어에 솔제니친의 소박한 ‘신앙 고백’을 듣고 ‘민중’이라는 말에 단순한 이상주의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읽는 방식은 역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솔제니친은 ‘근원적’인 말투를 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 금지에 의해 비로소 “어째서”라는 질문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금지는 어떻게 해서든 어떤 왜곡을 품게 된다. 거기에 어떻게 해서든 ‘확률적’인 위1상이 비쳐 보이고 마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실패’는 그 의미에서 생각해야만 한다. ⁽³⁾
스피리돈의 존재라는 사실성을 그리려 한다면, 그때 그는 역시 ‘근원적’으로 쓰는 방식을 피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스피리돈의 저 수수께끼와 같은 대답을 소거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스피리돈의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다. 그 부분은 ‘근원적’인 채로 남아 버린다. 우리들에게는 그것은 비약인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솔제니친은 그곳에 어떤 비약을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스피리돈으로 비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그는 어떡해서든 스피리돈으로부터 비약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오독해서는 안 된다. ‘민중(나로드)’이라는 말은 스피리돈이라는 사실성을 ‘근원적’인 영역으로의 매몰에서 구해내려는 시도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근원적인 호소는 곧바로 ‘근원적’인 영역으로 매몰되어 버린다. 그때 이미 그 호소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는다. 솔제니친은 그 매몰에 대해 지극히 민감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는 74년에 추방될 때까지 항상 구체적인 형태로 소비에트 정권과 싸워 왔다. 아마도 그 실천 속에서 그는 그 감각을 길러왔던 것이다.
서방으로 추방된 후, 그는 자신의 여러 가지(정치적, 문학적) 발언이 번번이 오해받는 것에 실망을 표명하고 있다.
“이전에는 그래도 저는 인생 경험이라는 것은 국민에서 국민으로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 생각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76년 3월 BBC 인터뷰 『자유에의 경고』 수록, 소메야 시게루 역)
그의 실망은 거의 전면적으로 맞다. 우리들에게는 그의 정치적 발언은 골계스럽고 소용없는 것처럼 보인다. 75년, 76년 미국의 강연도, 90년의 논문 『어떻게 해서 러시아를 전면적으로 재건할 것인가』(번역 『소생하라, 나의 러시아여』)도 그 점에서는 변함없다. 두 쪽 다 일부 정치 세력(전자에서는 대소 강경파, 후자에서는 러시아 내셔널리스트)이 기뻐할 만한 내용이 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확실하게 솔제니친은 그런 정치적 맥락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는 항상 근원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발언이 근원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그는 둔감하다. 라기보다 근원적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등의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솔제니친을 그러한 지점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라게리’라는 사실성인 것이다.
예를 들어, 마찬가지로 ‘확률’의 위1상을 물으려 했던 작가로서 카프카를 들 수 있다. 카프카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근원적’인 것과 ‘비근원적’인 것의 경계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그 경계를 거부하고 독자를 해소 불가능한 곳으로 향하게 한다. 그는 우리들의 “어째서”라는 물음 제기를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이라면 그와 같은 시도가 얼마나 손쉽게 ‘둘러싸여’ 버릴까 생각할 것이다. 그의 작품은 용이하게 구체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읽혀 버린다. 카프카의 작품에 있어서 “어째서”의 붕괴는 종종 나치즘의 문제나 실존적 고독과 관련지어지지만, 그와 같이 생각했을 때 이미 거기에서는 저 ‘확률적’인 위1상이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솔제니친이 기획하고 있는 것은, 경계가 없는 지점에 있어서 “어째서”라는 문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전략은 카프카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런 전술을 취할 것이다. 그 전략은 우리들에게는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포위의 곤란함과 그와 우리들 사이의 결정적인 단절을 엿보게 할 수 있다. 우리들은 ‘확률’을 생각하려 할 때 카프카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라게리에 있지 않은 것”인 것이다. ⁽⁴⁾
‘라게리라는 것’에 직면했을 때 솔제니친이 취한 전략은 그것을 근원적인 것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키스를 하게 두지 않았던 것이다. 키스를 허락해 버리는 사고가 얼마나 전체주의에 근접해 가는 것인가, 그에게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것’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 사고는 전체주의에 대항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집을 ‘사변적으로’, 즉 이른바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 서술해 버린다면 그것도 또한 ‘근원적’ 언설로서 둘러싸여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솔제니친은 도덕적 언설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또한 소행적인(비방법론적)인 것. 그것은 스피리돈으로부터 소행되어 있는 것이며, 근거와 보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전체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을 터인 ‘기적(나로드)’의 흔적을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솔제니친은 때때로 전체주의를 긍정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솔제니친이 생각하고 있던 ‘마음’은 이와 같은 사고의 계보를 확실히 가지고 있다.
솔제니친은 ‘실패’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들에게 솔제니친의 작품을 이 시론에서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읽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그의 문학을 역사적 자료 속에서 회수 가능한 것, 혹은 역사화에 실패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회수 불가능한 텍스트를 고쳐 쓴다고 한다면 솔제니친이 그것을 ‘근원적인 것’으로서 피하고자 했던 그 뜻도 또한 명백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는 이유로는 빠지지 않는다. 만약 그에게 ‘실패’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스피리돈으로부터 완전히 비약할 수 없었던 까닭에 빠져들어 버린 텍스트의 왜곡 속에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왜곡조차 없었던 것이라 한다면 사람은 솔제니친의 얼핏 보기에 단순한 도덕주의가 잉태하고 있는 ‘라게리라는 것’을 눈치채는 일이 불가능함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솔제니친과 우리들의 사이에는 양자가 그것을 통해 마주 보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그 ‘한계’가, 여기에 있다. 반복해서 말하듯, 솔제니친의 전략인 텍스트를 ‘비근원적’인 것으로서 독해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것이야말로 솔제니친의 금지를 깨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나 자신, 이 시론에 있어서 솔제니친의 금지를 범하지 않는 독해는 따분한 자기 확인밖에 만들어내지 않는 듯이 생각된다. 그리고 또한 그 금지를 범하는 듯한 독해는, 솔제니친과 우리가 서로 건너가려는 그 ‘한계’를 완전히 말소시켜 버리고 만다. 결국 우리는 “기적”과 “확률”의 사이에 서서 양쪽의 위2상을 번갈아 가며 왕복할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제니친은 그 우상화에 저항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프카 이상으로 철저하게, 『수용소 군도』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솔제니친의 세계는 명백하게 카프카의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나 발언은 전혀 카프카적이지 않다. 이 시론은 그 거리의 주변을 둘러싼 것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솔제니친은 다시 데탕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하로프를 방문했습니다. 귀가할 때 전차를 타고 돌아갔는데 살해당했습니다. 아니, 서방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비에트 사람입니다. 니콜라이 크류치코프의 곳에 체카의 검토관이 노크하는 것도 있습니다. 크류치코프가 문을 열자 그놈들은 그를 흠씬 두들겨 팼습니다. 그의 집에서입니다. 그리고 떠났습니다. 이유는 크류치코프가 운동에 가담하고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은 주택 내입니다. 오후 5시, 레닌 거리에서 말리바 란다는 차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큰 소리를 치며, 강도, 강도, 라고 외쳤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이 그것을 들으면서도 지나쳐 갔습니다. [중략] 이것이 우리나라의 헬싱키 정신 및 긴장 완화라는 상태입니다.”
이 물음을 세우는 방법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하모니를 거부할 때의 논의의 진행 방식과 동형인 것이다. 냉전은 단지 구체적인 것만을 생각했을 때 비로소 끝날 수 있다. 솔제니친은 결코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잃고 있지 않다. 그 일에 우리들이 좀 더 시간을 들여 그 ‘정치적’ 문맥이 중성화되었을 때 오히려 명백해질지도 모른다. 솔제니친이 서려 했던 위치는 그 자신이 결코 자각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근원적인 곳에 있다.
(각주 부분)
(1) 이른바 ‘부조리’에 대해 카뮈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경험을, 하나의 운명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는, 의식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내는 이 부조리를 전력을 다해 자신의 눈앞에 계속 들이밀지 않는다면, 사람은 이 불합리한 운명을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의식적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일이다. 영구 혁명의 주제가 이렇게 개인의 경험 안으로 옮겨지게 된다.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려 두는 일이다.”
(『시지프스의 신화』)
라게리적 상황의 진정한 어려움은 정확히 무엇이 ‘반항’인지 알 수 없는 데에 있다. 그리고 본문 중에서도 서술하고 있듯이 솔제니친이 신비주의적인 말을 써야만 했던 것은, 바로 무언가 ‘반항’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는 곳에서 일어난 ‘반항’을 서술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의식적 반항’이라는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솔제니친이 거기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확률적인 위1상이 소거되어 버리고 만다. 물론 여기서 순수하게 내적인 ‘반항’을 호소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솔제니친은 그러한 것에는 흥미를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내면성을 넘어 ‘문제의 회피’라고 불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솔제니친이 인텔리겐치아에서 나로드로 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
(2) 확실히 C. 르포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여분인 인간』), 솔제니친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체포는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지금은 편리한 변명거리가 생겼다(에렌부르크). 아니, 제비뽑기는 제비뽑기라 하더라도 그 몇 개의 번호는 미리 알려져 있었다. [중략] 공공연하게 그것에 반대한 자는 즉시 끌려갔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혼의 선택이지 제비뽑기가 아니었다!”
(『수용소 군도』 제4부 제3장)
그러나 이것도 역설적으로 읽혀져야만 한다. 이 문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솔제니친이 그렇게 서 있던 위치의 불안정함을 잃어버렸다고는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장의 제목(「은밀하게 깃든 위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여기서 스피리돈과 같은 형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는 "제비뽑기는 아니다"라고 말하고밖에 있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이른바 소급적인 것이다. 실제 르포르는 이것을 오독하고 있는 반면, 솔제니친이 "외견상은 상반되는 두 요소의 사이에 끊임없이 분열을 계속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제6장은 『수용소 군도』 제3권에 있어서 "정의의 폭력"의 긍정 분석에 할애되고 있지만, 르포르는 솔제니친의 그 모순 (한편에서는 "마음"이나 "선"을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스파이를 살해하거나 재판하거나 하는 것을 보고 환희하고, 그 마음에 깃든 선의 등과 같은 무구함을)을 정치적인 현실주의로 귀착시켜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솔제니친의 공포감은 아마 소박한 혁명가에 대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제 그 제3권의 구성 중에 르포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수용소 군도』를 독해한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라게리를 "경험한다"는 것을 요청한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신은 라게리를 체험하지 않은 이상 정치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독해에서 멀어져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뒤에 언급하는 것처럼, 이러한 역설을 역설로서 강요해버리는 것 자체가 솔제니친과 우리 사이의 이른바 "한계"이며, 또한 동시에 이반의 사고를 심각하게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르포르는 솔제니친의 가장 중요한 왜곡을 발견하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읽고자 하는 의도 때문에 그 의미하는 바를 회피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예를 들어 I. 월러스틴은 에콜로지나 페1미니즘 등의 운동을,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 흡수되어 버린 기존의 좌익(반시스템 운동)과 구별하고 그
"가장 중요한 특성은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 대립의 우선성을 --때로는 그 의의를-- 암묵적으로 --또는 대놓고-- 거절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포스트 아메리카』).
나는 월러스틴이 논의를 세우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지적은 올바른 것처럼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솔제니친의 정치적 발언이 히스테릭하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전체주의에 한하지 않고 어떤 정치 시스템을 비판할 때 불가피하게 취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은 솔제니친의 언동은 이른바 ‘정치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생각되는(우리에게) 정도로 골계스러운 것은 아니다. 실효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논문 「가라, 나의 러시아여」의 큰 실제 발행 부수나 지금도 솔제니친이 구 소련에서 보지하고 있는 권위를 볼 때 우리들
은 그들(불가피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그와 같은 차이를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카프카와 솔제니친의 차이에 대해서는 원고를 새롭게 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 ‘구체적인 것’에 대한 해답 방식의 전략에 있어 어떤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여기서는 그것을 논할 여유가 없지만 다음 벤야민의 말은 참고가 될 것이다. “카프카에 있어서는 늘 몸짓에만 얽매여 있는 곳,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한 무리의 우화의 그 구름을 붙잡는 듯한 개소가 만들어진다. 카프카의 문학은 이 몸짓에서 출발한다. 그가 작품의 발표를 삼간 것은 유명하다. 그의 유언서의 작성은 작품의 소각을 명령하고 있다. 카프카 연구에서 피해서 지나갈 수 없는 이 유언서
에 의하면, 작품이 저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며, 카프카는 자신의 노작을 실패작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좌절시킬 수 없었던 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하는 것이다. 문학을 교훈적인 것으로 이행시키고 우화로서 문학에 견고함과 수수한 색조를 회복하려 하는 그의 장대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학을 이성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작가라고 한다면 그는 다름 아닌, ‘그대 우상을 만들지 말지어다’라는 구약의 말씀을 그토록 꼼꼼하게 지켰던 시인 외에는 없다.” (발터 벤야민 『프란츠 카프카』) 여기서 벤야민이 카프카 속에 지적하는 ‘몸짓’이란 즉 ‘구체적인 것’ 외에는 없다. 카프카도 또한 확률적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으로의
@Pie, 이행을 시도하고 있다. 그가 ‘법’이나 ‘규칙’이라는 형태로 제출하는 문제군은 그 소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늘 저 덧없는 "어찌할 방도가 없음"이 따라다니고 있다. 그리고 솔제니친은 바로 여기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상이란 ‘확률’의 소거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