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자체가 이미 세계상이며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변화에 대한 고전적이거나 새로운 유럽의 관념들은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킬 뿐, 진단상으로나 치료상으로 현실의 층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째서 다른 사회상에 반대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회상을 처음부터 구축하지 않고서 어떻게 메시아적인 위치에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메시아적인 위치는 이미 우리가 오랫동안 수행해왔지만 이제 더 이상 생태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하나의 조작에 불과합니다.
─니클라스 루만, 아르키메데스와 우리
예술 자체도 현대에는 그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 한다. 실제적인 것을 사라지게 하고 그것을 단지 다른 풍경으로 대체하는 예술뿐만 아니라, 자기를 실천해가면서 저절로 없어지는 예술(헤겔). 바로 그 점에서 예술은 사건을 만들었고,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나는 분명 '과거형'을 사용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예술은 이미 사라졌지만 자신이 사라진 줄 모르고 있고,게다가 더 황당하게도 혼수상태에 빠진 채 자신의 길을 계속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자신의 사라짐 이후에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의 패러다임이 된다. 자기의 사라짐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자신의 사라짐을, 지나칠 정도로, 생생한 형태로 연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사라짐 상태에 있고, 사라짐 이후까지 궐석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정치 무대는 동굴의 그림자들을 비추는데, 그들은 활동하고는 있지만 비현실적인,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존재들일 따름이다.(이런 식으로 사라진 모든 것, 즉 제도와 가치, 개인을 나열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차후로 우리는 한 종으로서, 이미 클론, 정보화, 네트워크의 형태로, 이렇게 인위적으로 살아남아 있다. 사라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사라지기를 멈추지 않는 무언가를 이렇게 항구적으로 연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예술은 죽기 전에, 그리고 죽는 대신에 사라질 줄 아는 것이다.
아무튼 아무것도 간단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문제는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이다. 이건 마치 루이스 캐럴의 체셔 고양이와 같은데, 그놈의 미소는 고양이 형상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공중에 떠다닌다. 또는 신의 심판과도 같다. 신은 사라지지만, 그 뒤에 자기의 심판을 남겨 둔다. 그러므로 고양이의 미소는 이미 그 자체로 무시무시하지만, 그 고양이 없는 미소는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 ⋯⋯. 그리고 신의 심판은 그 자체로 무시무시하지만, 신 없는 신의 심판은 ⋯⋯.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그러나 푸코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릴 이유는 없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했던 바는 무엇인가? 실제로, 이 형식은 좋은 것이었던가? 이 형식은 인간 안의 힘들, 즉 살고 말하고 노동하는 힘들을 풍부히 하고 또는 심지어는 보존할 수 있었던가? 이 형식은 실존하는 인간이 폭력적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가? 그러므로 항상 되풀이되는 하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인간 안의 힘들이 오직 바깥의 힘들과의 관계 맺음에 의해서만 하나의 형식을 구성한다면 이제 그것들은 어떤 새로운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 그로부터 이제 더 이상 ‘신’도 ‘인간’도 아닌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니체가 "위버멘쉬"라고 불렀던 문제의 정확한 설정이 될 것이다.
─질 들뢰즈, 푸코
오... 아르키메데스와 우리... 굿; - dc App
대담집이라 그런지 시시콜콜하면서도 인간미 스근하게 우러나오는 이야기들 많아서 재밌더라
@ㅇㅇ 이런 책이 잘 팔려야 철학 출판이 활기가 도는데 ㄹㅇ 안타까울 따름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