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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에 대한 관심 없이 퀑탱 메이야수를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혹은, 그럴 경우 메이야수에 대한 열광을 이해하기 어렵다. 메이야수는 00년대 프랑스에 열풍을 일으켰고, 현재까지도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분류되는 분파의 창시자 격으로 남아 있다. 그는 사실상 흄이 실증주의의 이름으로 쫓아내고 칸트가 관념론과 경험론을 통합하며 배제하고자 했던 형이상학을 재호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유한성 이후>에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상관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칸트 이래의 인식론적 전환을 무효로 하고 지식의 성립 조건을 다루지 않는 것. 그리고 이렇게 봤을 때 메이야수는 그저 돈키호테일 뿐이다. 그 수많은 논박을 그저 무시한 채 무엇을 이야기하자는 것인가?



여기까지가 철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의 논점이다. 이제 조금 시야를 돌려, 그러한 철학관 바깥의 세계에서 바라보자. 칸트의 시대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시대이기도 했으며, 헤겔의 시대는 콩트의 시대였고 마르크스와 마흐의 시대로 이어졌다. 카시러와 후설의 시대는 맥스웰과 헬름홀츠의 시대였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언가 인간 외적으로 존재하고 관측되는 존재자들의 시대였고, 그 어떤 조건이 붙든 인간과 주관과는 거의 무관한 듯한 조건부로 지식이 생산되던 시대였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쌓이는 지식은 어떤 방식으로 조작될 수 있는 자연을 보여주었으며, 그 지식을 정의하는 데에 늘 실패하는 것과 별개로 이 지식은 분명 유용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칸트는 지식이 올바르다고 판명할 수 있는 조건을 분명히 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 어떤 식으로든 효능을 입증한 지식이 왜 올바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유한성>에서 "선조성"이라는 이름으로 던지는 화두는 이것을 간단히 요약한 것인데, 인간과 의식의 존재로부터 너무나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과거에 대한 과학적 지식, 곧 선조성을 철학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 지식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왜 그 근거와 체득 과정에 있어서 인간과 주관으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그 관측자의 주관적 체험으로부터 소급되어야 하는 조건을 설정하는가? 그리고 애초에, 왜 그 조건이 관측자의 주관적 표상에서는 멈출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주관과 객관 사이에 뚜렷한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고-그러니까, 물질대사를 통한 작용에 영향을 받는 직관의 초월적 조건을-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이 지식이 올바르기 위한 조건에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단순히 관측 장비가 오차 범위 내에 있으며 이 이론이 올바르다는 가정 하에, 그 지식이 옳다고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이것은 과학의 발전에 대한 패배주의적 수용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 끼운 첫 단추에 대한 문제에 더 가깝다. 메이야수가 칸트를 주로 비판하는 것도 당연한데, 뉴턴의 자연철학이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도약하여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절대적이라는 의미가 아닌, 인간의 주관에 단단히 조건지어졌다고 보기는 힘든-지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대에 칸트는 사실상 철학과 과학을 분리시키며 객관의 과학과 주관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그었다. 인간의 인식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한 토대는 사유에서 시작되어 사유에서 끝났으며, 외적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제1성질인 연장과 지속은 경험을 위한 제2성질이자 인간적 조건, 시공간으로 흡수되었다.1) 그 전제 하에서 어떤 사건은 인간에게 표상으로 떠오르기 위한 전제로서 시공간을 가져야 했으며, 그 사건과 연루된 물자체가 자체적으로 특정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지식은 늘 거부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문제의식은 유효하다. 흄이 사건 A와 B가 순차적으로 일어날 때 거기에서 A가 B를 야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오직 사람의 주관 밖에 없다고 비판하며 인과율을 자연적 속성이 아닌 인간적 속성으로 귀속시킨 것은 그럴듯한 비판이다. A 뒤에 B가 일어나는 일이 1000번 발생하더라도 1001번째 A 이후 B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을 수 없는 것 또한 합리적인 비판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수용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사람이 손쉽게 인과율을 믿는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왜 1000번이나 A 다음에 B가 반복되었는지를 물어야 했고, 그것이 과학의 접근이었다. 반면 철학의 접근은 그 어떤 합리성으로부터 그것이 틀릴 수 있는 조건을 찾으며 무조건적 현전과 합리 사이의 간극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은 역으로 객관과 완벽하게 유리된 형이상학의 세계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클로소프스키가 <니체와 악순환>에서 주관에 침투하는 객관, 이유 없이 존재하는 객관을 통해 효과적으로 모든 주관적 사유를 그저 인간이라는 물질 매체를 반영할 뿐인 변덕스러운 관점주의로 무화한 시점에서, 인간적 조건은 그저 또 하나의 중간다리로만 남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메이야수는 기이한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한다. 모든 지식이 인식론적 조건을 두고 있다는 상관주의적 전제를 그대로 수용했을 때, 그 전제로부터도 하나의 절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자신이라는 절대적 지식을 얻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논증해내려 했듯, 메이야수는 일련의 귀류법적 논증을 거쳐 모든 것이 조건적이라면 바로 그 모든 것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만 어떤 성질을 띤다고 볼 수 있기에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우연적 성질을 띤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은 흄의 인과성 비판을 의식의 존재로 반박한 칸트의 논증을 재반박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정말로 우연적일 뿐이며 어떤 사건 뒤에 특정 사건이 반드시 벌어져야 한다는 인과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의식은 그 어떤 표상도 떠올릴 수 없을 것이고 우리의 의식은 모든 것이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혼돈 속에서 허물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반박에 대한 재반박은 우연성에 대한 빈도주의 확률이 근본적으로 모든 사건의 집합이 헤아릴 수 있는, 그래서 비율을 통해 확률을 정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 반례는 자명하게도, 칸토어의 비가산집합이다.2) 칸트는 모든 성질이 우연적일 경우 특정 성질이 유지될 확률이 매우 낮아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그 확률의 곱집합의 극히 낮은 가능성을 도출하고 있으며, 이 확률이 처음부터 계량 불가능할 경우 그 결론은 공허하다. 따라서 칸트는 여전히 모든 속성의 필연적 우연성을 반박하지 못한다. 메이야수는 이것을 절대적 지식의 시작점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과학과 철학의 접근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 시작점으로부터 철학이 대체 어떤 지식을 산출해낼 수 있는가? 과학적 지식이 공허하며 모든 사건은 그 어떤 반복 없이 단 한 차례, 특이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은 메이야수가 집합론을 쓰기 위해 참고한 알랭 바디우의 방식이며, 솔직히 메이야수에 비해 훨씬 더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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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은 그 새로운 지식에 대해 메이야수가 나름대로 제시하는 하나의 방법론이자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우연적이라는 하나의 진리로부터 무엇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스티븐 샤비로가 <탈인지>에서 SF를 철학과 비교하며, 철학이 어떤 명제가 옳은지를 검증하는 분야라면 SF는 그 명제가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가능한 현실을 외삽해내는 분야라고 정의했듯3) 메이야수는 SF를, 특히 개중 과학 밖 소설인 XSF를 이 진리가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펼쳐질 세상을 보여주는 분야라고 정의한다. 과학법칙이 반드시 맞아떨어지는 세상을 보여주는 SF가 있고, 과학법칙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SF가 있으며, 과학법칙이 어쩌다 가끔, 우연적으로 어긋나는 SF가 있다. 첫번째는 일반적인 SF이고, 두번째는 일반적인 몰락이고, 세번째가 개중 흥미롭다. 이 세상에서 자연법칙은 어느 정도의 빈도로 반복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빈도로 완전히 어긋날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는 질서를 믿을 수 없는 만큼, 혼란조차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사실, 바로 그런 세상이야말로 실제 세계일지도 모른다. <형이상학과>에서 메이야수는 흄의 인과성 비판과 반복되는 사건에 대한 귀납논증의 한계를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루며, 그레이엄 하먼이 <기이한 실재론>에서 러브크래프트를 통해 묘사한 우연적이고 기이한 존재론을 좀 더 쾌활하게, 그러나 훨씬 더 필연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상관주의로부터 도출된 진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깨달음은 우리가 수십만 번의 검증 끝에 갑자기 반례가 나타날 수 있는, 얼마나 우연적인지도 우연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포퍼의 반증주의를 존재론 차원으로 격상시킨듯한 괴상한 선언. (물론 메이야수는 포퍼의 반증주의가 흄의 비판을 실증주의적으로 약화시킨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우리는 과학법칙이 분명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믿는 동시에, 그 진실이 언제고 무너질 수 있는 현재까지의 시한부 진실이라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이중사고 속에 있어야 한다. 가장 고약한 것은, 정말 그럴 수 있다는 확률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새로운 지식인가? 결국 메이야수는 거창한 말을 통해 돌고 돌아, 과학적 지식이 현재까지 정확하더라도 즉시 반박되거나 붕괴될 수 있는 사상누각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것뿐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것을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고 단언하지 못하게 막는다. 아마 이 정도가 메이야수에 대한 내 솔직한 입장이지 않을까.



*



1) 그러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가 칸트의 논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반박은 맥락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의 존재 방식이 우리의 표상 방식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선취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표상 방식조차 시공간과 무관할 수 있으며 그 밖의 모든 선험적 초월성에 대한 전제 역시 의혹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보일 뿐이다. 그러니, 제2성질만이 접근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비판 대상이며 우리가 제1성질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의식에 수용되는 제2성질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과학적 접근 방식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2) 이 순간이 메이야수가 가장 미심쩍어지는 순간이라는 건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확률이 (특정 사건의 경우의 수) /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로 정의되는 빈도주의 확률에서 분모가 무한한 비가산집합으로 제시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애초에 바로 그게 확률분포다. 그 무한한 세계의 가능성만큼 귀납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세계의 가능성 역시 무한할 가능성은 당연히 계량할 수 없고, 그것이 결국 어떤 0이 아닌 확률로 귀결될 가능성도 당연히 존재한다. 모든 성질이 우연적이라는 전제는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이지 않다. 사실 이 논증의 도식 자체가 애초에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 있는 오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3) 이 외삽법으로서의 문학은 SF의 역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정의다. 하인라인은 기존의 펄프 픽션 SF와 사변소설로서의 SF를 분리하며 사변소설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전제로부터 그럴듯한 미래를 외삽해내는 분야라고 설명하였고, 어슐러 르 귄 역시 그러한 외삽으로서의 SF를 사회적 차원에서 시도하며 존재할 수 있는 사회와 문명의 구조를 핍진성 있는 사고실험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과학 법칙과 어긋나지 않는 SF를 보여주고자 한 하드 SF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21세기 최고의 SF 작가로 꼽힐 테드 창과 그렉 이건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한국에서도 단요의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에서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으로부터 그려내는 외삽법을 엿볼 수 있으며, 이 목록을 굳이 더 이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