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칸은 <프로타고라스> 덕의 다양성 문제에 이렇게 말한다.


-덕들의 다양성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에서 일부러 덕의 단일성 테제를 확정되지 않은 채로 놔두면서 논의가 추가될 여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덕들이 개별적으로 정의되고 그것들의 단일성이 正義에 대한 定의에 의해 함축되어 있는 <국가>에서조차, 플라톤은 자신이 제시한 설명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국가 4권) 그리고 <법률>에서 여러 덕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 경우에서 여럿 안의 하나에 관한 탐구가 특히 철학적 사고 훈련을 위해 좋은 논제라고 역설한다. (법률 12권) -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애초에 덕은 셀 수 있는 건지, 배워서 얻을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교육적으로 보면 단일하냐 다양하냐의 문제보다 유용성 측면에서 검토해야 되는 건 아닌지. 여러 가지 물음이 쏟아질 수 있다. 그토록 알고자 함은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사칙연산처럼 셈해서 답을 도출해 낼 수 있는지부터 검토해야 될 것 아닌가. (이전 대화편들) 아포리아는 프로타고라스에서도 계속해서 유지된다.


352c

-앎에 대해서 그들은 영락없이 다른 모든 것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노예에 대해서처럼 생각해서죠.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도 그게 그런 것이라 여기시는지, 아니면 앎은 영예롭고 사람을 지배할 수 있으며, 누군가가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알 경우에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압되지 않고, 앎이 시키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을 하게 되는 일은 없게 되어 지혜가 사람을 능히 도와줄 수 있는 걸로 여겨지는지요?-


역시나 잘 몰라도 어쨌든 지혜는. 앎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앎이 시키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을 하게 되는 일은 없게..'를 보면 앎이 강력한 족쇄처럼 느껴질 수 있다.


뒤에 이어서


358b~

-여러분 다음 것은 어떻습니까? 이를, 즉 괴로워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걸 지향하는 모든 행위들은 훌륭한 것들이 아닌가요? 그런데 만약에 즐거운 것이 좋은 것이라면, 자기가 하고 있는 것들보다도 더 좋은 다른 것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또한 실현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리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더 좋은 것들을 할 수 있는데도, 이후에도 그것들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지는 것은 무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저 자신에게 이기는 것은 지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럼 어떤가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무지를 이런 걸로, 곧 큰 가치를 지닌 문제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속고 있는 걸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 누구도 적어도 나쁜 것들로 또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자발적으로 향해 가지는 않으며, 좋은 것들 대신에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향해 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성향에서 찾아볼 수도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또한 두 가지 나쁜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부득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경우에도, 그 누구도, 덜 나쁜 걸 선택할 수 있는데도, 더 크게 나쁜 걸 선택하지 않겠죠?-


명확한 앎, 하지만 정확하게 기술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앎은 하나의 척도가 되어주는 걸까? 여럿의 척도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쪽이 아니니까. 찰스 칸이 말한 대로 측정과 계산에 따른 소크라테스의 합리적 선택 모델은 삶의 모든 결정들이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오직 두 가지 계량 가능한 가치들로써 이루어진다는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을 하려고 대화편을 꺼내든 사람들의 눈높이를 겨냥해서, 대중은 결국 선악을 구분할 다른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랬을까?


355a를 보면 확실히 어떤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언급하고 있다.

-혹시 그대들에겐 일생을 괴로움 없이 즐겁게 보내고서 끝맺는 것이면 족한가요? 만약에 그걸로 족하다면 그리고 좋은 또는 나쁨 이외에, 이것들로 귀결하지 않는 것으로 그대들이 말할 수 있는 게  다른 걸로는 아무것도 없다면, 이다음 걸 들으시오.-


실재에 대한 플라톤의 탐구 중 어느 한 측면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잠깐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프로타고라스 편에 대한 분석>을 보도록 하자


-철학은 실재 자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철학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이상학자는 거인적인 투쟁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실재 자체는 영원히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이 물음 자체가 분석적이다. 철학자는 이 점에 있어서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는 다만 논쟁을 벌이고 가설을 세울 따름이다. 가설은 실재 자체를 완전히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워지는 것이다. 플라톤은 스스로 실재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직접 자기에게 주어지는 실재를 묘사할 따름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주어지며 기술될 수 있는 실재의 범위는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형이상학자가 지향하는 실재 자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 속에는, 비록 그 사건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실재의 나머지 부분으로의 통로가 들어있는 사건이 있다. 물론 이 통로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주어졌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불안한 것이지만, 실재 자체에 육박하려는 철인의 투쟁에 희망을 던져준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넘어서 실재의 나머지 부분으로 가는 통로는 바로 대화이다. 대화는 그 자체로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어느 정도 넘어서는 사건이며,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실체의 나머지 부분이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주어질 수 있는 통로로서의 사건이다.


-말에는 내용이 있으니, 그 내용은 말이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매개로 하여 드러나는 실재의 내용이다. 사물의 실재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이론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측면도 있고 행위의 유용성이나 목적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또 희로애락이나 신비적 체험의 대상이 되는 측면도 있으며, 신화가 꾸며지며 시가 읊어지는 측면도 있다. 실재로서의 사물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물들과 충동하거나 화해하며 미래의 여러 사건을 받아들일 운명에 놓여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분석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적인 사건이다.-


계속된 아포리아로 지치게 만들고 있지만 플라톤 대화편은 소은 선생님이 말한 대로 진상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하르트만과 유사한 설명인데 그건 나중에 기회 되면 글을 써보겠다. 하르트만은 소은 선생님이 높게 평가하셨던 독일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서.


-비록 플라톤의 대화 속에 뛰어들어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나,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도 간접적으로나마 문자를 통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성해 보면 플라톤이 대화를 쓴 그 자체가 실재의 진상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플라톤의 저서 이외에 역사적인 사건을 고유 명사를 사용하여 기술한 또 하나의 저서가 있는데 그것은 성서이다. 그런데 성서는 실재의 구제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기록하였는데, 플라톤의 대화편은 실재의 진상이 드러나는 사건을 그렸다. 성서를 쓰는 사건이 이루어진 후 인간 구제의 사건이 전 세계를 향하여 퍼져 나갔듯이, 플라톤이 대화를 쓴 사건이 이루어진 후 실재의 진상을 밝히려는 사건이 입으로 혹은 문서로 혹은 행위로 그 방법은 다르나 전 세계를 향해 퍼져나갔다. 플라톤의 대화를 분석한다는 것은 이러한 파동의 한 여적이다.-


소은 선생님은 프로타고라스에 나온 신화를 중요시한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는 사람의 본성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사람의 본성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사람의 유능성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고찰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유능성은 사람의 사람다움의 극한치로서 그것은 바로 사람의 본질의 완전한 실현이다. 유능성이 가르쳐질 수 있으며 지적 파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 작용 이전에 작용을 지배하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은 현상계를 넘어 있으며 현상계 영혼이 끊임없이 동경하고 지향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사람의 유능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현상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방해물이 제거되어야 한다. 영혼의 정화도 이러한 제거의 일면이다. 영혼의 정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지혜이며 지혜를 통하여 조화로 가득 차고 분열이 없는 일자로서의 영혼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주지주의적 입장이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의 신화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영혼의 일정한 원형이 이념적인 세계에 있을 수 없다. 영혼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이념계에서 현상계로 하강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현상계를 초월하는 이념적인 세계로 비상하기는커녕 끊임없이 물질로 해체되어 사멸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이 지상에서 생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의 영혼은 사멸과 탄생 사이에서 방황하며 조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이 감성적인 세계를 버리고 그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죽음을 파악한 <파이돈>편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죽음에 대한 철학을 본다.



그리고 소은 선생님이 329d~에서 나온 얼굴의 비유를 해설한 걸 봐보자.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지혜, 절제, 정의, 경건 등의 유능성에 있어서 성립하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금덩어리에 있어서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은 것인지 또는 사람의 얼굴에 있어서 성립하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은 것인지를 물었을 때 사람의 얼굴에 있어서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다는 프로타고라스의 대답은 사람의 유능성을 유기체적인 측면에서 고찰한 소치라 말할 수 있다. 사람의 생산적 기술은 손과 발이 지니는 기능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혜, 정의, 절제, 경건 등의 유능성에서 성립하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사람의 얼굴의 전체와 부분에 관계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의미가 있다면 추측건대 사람의 얼굴에는 눈과 같은 인식 기관이 있고 사람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으며, 또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경건한 표정을 통하여 그 사람 속에 깃들어 있는 경건한 마음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유능성 넷의 관계를 유기체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신체의 어느 부분보다 얼굴에 비유하는 것이 적합한 것으로 보였을는지 모른다.-


-동물의 얼굴과는 달리 사람의 얼굴에는 위와 같은 여러 표정이 나타나며 어떤 사람은 경건하게, 어떤 사람은 지혜롭게, 어떤 사람은 절제 있게 보인다. 즉 사람의 얼굴은 사람이 위와 같은 유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위에서 말한 여러 유능성은 마치 귀와 눈처럼 각각 그 성격과 기능이 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361d에서 소크라테스가 다시 신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걸 해설한다.


-사람의 영혼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한 측면은 동물로서의 측면이며 또 한 측면은 이성적인 측면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가 나눈 대화에서 영혼의 두 측면은 서로 분열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두 측면을 통일시키려고 시도하며 신체적 차원에서도 성립하는 쾌락과 고통이 각각 선과 악에 속함을 인정하고 계량술에 의하여 지적 능력 속으로 포섭하려고 시도한다. (위에 358) 그러나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쾌락이 선이 될 수 없으며 쾌락 가운데도 선이 아닌 것이 있으며 고통 가운데도 악이 아닌 것이 있다. 그리고 선악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쾌락의 계량 방식은 양적이며 기계적이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에서 선려나 후려가 행동의 동기가 되며 사물은 생물의 기능과 신체적인 부위에 대하여 그 선으로서의 기능을 달리한다.-


-위와 같이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는 사람의 유능성의 본성은 서로 다르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주장을 부각시켰을 뿐 결코 이 대화편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의 승리를 뜻하지 않음은 소크라테스가 최후에 프로타고라스의 신화의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속에 암시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마디 한마디 잘라서 그 의미를 따지고 음미해 가는 단변술을 사용했고 프로타고라스는 장광설에 능하다. 그러나 단변술을 사용하는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장광설을 한마디씩 분석하고 비판하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대화의 방법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최후에 프로타고라스의 신화의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주는 <에우티데모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