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인용 번역본은 자유문고로 하겠다. 카드리지판 원문 표기는 괄호
시작은 7판 머리말로 시작하는데 역주 1번에 나온 대로 창조적 진화가 나온 이후 덧붙여진 머리말이다. 참고로 자유문고에는 이전 머리말도 함께 수록하고 있지만 아카넷은 그렇지 않다.
머리말은 <물질과 기억>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23p(1)
-이 책은 정신의 실재성과 물질의 실재성을 인정하며, 기억이라는 한 명확한 예를 통하여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정신의 실재성과 물질의 실재성을 인정한다는 말을 잘 기억해두자.
그리고 기억은 수브니르Souvenir와 메무아르mémoire로 나뉘는데 여기서는 메무아르로 쓰여 있다. 둘이 무엇이 다르고 왜 메무아르로 쓰였는지는 쭉 읽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다.
여기서 이원론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베르그송 철학을 이원론이라고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로 사용되는 원문은 아니다. 그저 이 책이 이원론으로 쓰였다는 것에만 주목하자.
이원론의 난점을 약화시킨다는 말은 뒤에서 이어지는 관념론/실재론의 대립이 문제 됨을 밝히는 것부터 시작한다.
-물질을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표상으로 환원하는 것도 잘못이요.-
-우리 속에 표상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표상과는 다른 성질의 어떤 사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
-우리에게 물질은 상(이미지)의 총화이다. 우리가 말하는 상이란 관념론자들이 표상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강하지만 실재론자들이 사물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약한 어떤 존재를 뜻한다.-
즉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물질에 대한 그러한 견해는 바로 상식의 견해이다.-
상식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어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법한 걸 말한다. 앞에 있는 노트북을 만지면서 '이건 내 대가리에서 생각하는 대로만 있어'라든지, 아예 '내가 만지고 본 것과 다르게 있는 거야'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냥 만지고 보고 내가 생각한 노트북이 있는 것일 뿐이다.
24p(2)
-따라서 상식에게 대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다른 한편 대상 그 자체가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즉 그것은 하나의 상이지만,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상이다.-
그냥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주관, 객관, 관념론이나 실재론이나, 기타 등등 철학을 덮어씌워서 생각해 보지 말고 있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이것이 이미지(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의미라고 한다.
(아 잠깐 이때 잠깐 스쳐 지나가듯이 말한
-그러한 색깔과 저항은 대상 속에 있다.-
이 말은 뒤에서 나올 '지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맥락이지 않나. <시론>을 읽은 사람은 익숙할 것이다.)
-우리는 철학자들 사이의 논란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 선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물질이 그가 지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물질을 상으로 지각하기 때문에 물질 그 자체가 모종의 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는 관념론과 실재론이 물질의 존재와 외양 사이에서 행한 분리 이전의 단계에서 그것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독자에게 그것을 잊으라고 요청한다.-
27~28p(4)에서 말하는 내용은 전부 본문에 있으니 미리 생각할 필요 없다.
-의식의 상태와 두뇌 사이에 어떤 유대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옷과 그것이 걸려 있는 못 사이에도 유대관계는 존재한다. 못을 뽑아버리면 옷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못의 형태가 옷의 형태를 그린다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것을 예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할 것인가?-
의식과 두뇌 관계의 비유.
아 참고로
물질과 기억을 다 읽고 이걸 보면 좋다. 뒤링의 교토 선언문도 부록으로 들어있으니 구성도 알차다.
일본+미국+프랑스 합동연구 논문집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베르그송 독회가 끝나고 국내외 논문을 정리하면서 다루겠다.
좀 옛날인데
당시 연구 주제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추가로 중간에 뒤링이 쓴 <지속과 동시성>관련 논문도 실려있는데 이걸 보면 대충 그때 그 사건이 어떤 맥락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29p (5)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명한 실마리가 되는 사실을 찾으려 할 때 곧바로 옮겨가게 되는 곳은 기억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기억이 물질과 정신 사이의 교차점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머리말의 내용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는지 안내하려는 것이다. 읽기 힘들다는 사람들을 위해 베르그송이 직접 머리말을 수정해놓았기 때문
30~31p(6)
-즉 뇌의 상태는 심리상태의 아주 적은 부분, 즉 공간운동으로 번역될 수 있는 부분만을 그릴 뿐이다. 일련의 추상적 추리로 전개되는 복잡한 사유를 생각해 보라. 그런 사유는 적어도 발생 중인 것이나마 상들의 표상을 동반한다. 그런 상들이 의식에 표상될 때에는 항상, 윤곽만 잡혀 있는 상태에서이건 또는 어떤 경향의 상태에서이건 그 상들 자체를 공간 위에 실연할 운동들이 그려진다. 즉, 그 운동들에 의해 몸에 이러저러한 태도가 새겨지고, 상들이 암암리에 포함하고 있는 공간운동적인 모든 것이 전개된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바로 그런 운동이 복잡한 사유를 전개할 때 두뇌의 상태가 매 순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뇌의 내부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윤곽만 잡혀 있거나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운동에 대해서는 알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다른 것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고 증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초인적인 지능을 부여받고, 정신 생리학의 요체를 터득하고 있다 하더라도-
뇌를 뜯어서 이리 보고 저리 뜯어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반응 체계일 뿐이다. 앞에서 프나가 춤추고 있는 걸 떠올려도 바깥에 있는 사람은 속을 알 수 없고 바깥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프나가 춤춘다는 사유 - 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날 것이고 - 속이 아닌 바깥에 있는 사람은 그 반응만을 알아낼 뿐이다. 우리가 뇌를 대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그런 반응을 가지고 프나를 어떤식으로 떠올리고 있었는지 증명할 수 없다. 짧은 치마인지, 아니면 일상 유튜브 v로그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
31p(7)
-따라서 결국 정신의 삶에는 여러 상이한 음조가 존재하며, 우리의 심리적 삶은 우리의 삶에 대한 주의의 정도에 따라 때로는 행동과 가깝게 때로는 멀게 상이한 높이로 연주된다.-
삶에 대한 주의는 본문에서 다시 나올 테니 기억해두자.
32p~34p
여기서 실어증에 대한 주석의 설명과 피에르 자네의 연구가 나오는데 34p 주석 중간에
-결국 어느 국부적 손상에 대응하는 일정한 기능 같은 것은 없고 뇌의 한 부분의 손상은 전체와 연관을 가진다는 것이다. 결국 뇌의 국지화 이론은 전면적으로 부인되는 것이다-
이것만 알고가도 문제가 없다. 실어증만 5년 동안 연구했던 베르그송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결과가 나와서 우리는 그것만 챙겨가면 될 일이다.
35p(8)
-피에르 자네 씨는 ~~ 그 병의 정신 쇠약적 형태를 탐구함으로써 형이상학적 견해라고 특징지어졌던 심리적 긴장과 실재에 대한 주의라는 생각들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역주 11번을 보면 베르그송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36p(9)에서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심리적 분석은 본질적으로 행동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 정신 기능의 타산적 (실용적) 성격을 지표로 하여 끊임없이 위치를 설정해야 한다.-
삶에 대한 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뒤에서 나오겠지만 의식은 표현 그대로 셀 수 없는 기억의 질 속에서 삶에 대한 주의 즉, 삶에 필요한 것을 필터 작용하려 한다.
-둘째는 행동에서 형성된 습관들이 사변의 영역으로 올라가면서 거기에 인위적인 문제를 만들어내며, 형이상학은 그러한 인위적 불명확성을 제거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념론이고 실재론이고 부대현상, 평행 등등 뭐가 되었든지 간에 우선 잊어야 한다. 현상학 판단중지가 생각날지도 모르고, 플라톤 대화편에서 나오는 doxa에 대한 경계가 생각날 수도 있다. 소은 선생님식으로 설명하면 데이터에 입각한 철학을 위한 작업이다.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분석하는 방법이다. <시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은 직관으로 이어진다.
자유문고판에는 제7판 이전의 머리말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41p (11)
-우리는 잠시 물질에 대한 이론들도 정신에 대한 이론들도, 또 외부 세계의 실재성이나 관념성에 대한 논의들도 모두 모르는 체하려 한다.-
어떤 이론을 대입해서 인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자. 그냥 뭔가 있다. 이 무언가 있다는 것을 존재라는 말로 어렵게 표현하지 말자. 책의 첫 문장부터 모르는체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냥 뭔가 있다는 것만 안다. 타자치고 있는 내 손의 움직임, 노트북에 팍팍 떠오르는 글씨, 창을 내려놨지만 프나가 열심히 춤추고 있는 유튜브 소리가 들리고 있다. 난 지금 뭐 하고 있지. 취미생활로 이거나 쓰고 있구나 등등 여러 생각도 떠오른다. 그냥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일 뿐 이게 존재냐, 관념이냐 실재냐, 내 주관이냐 앞에 것들이 객관이냐 따지지 말자. 그리고 뭔가 있다는 걸 이미지(상)이라는 뭉뚱그려진 단어로 표현하자.
-즉 내 감각을 열면 지각되고 닫으면 지각되지 않는 상들 앞에 있다. 그러한 모든 상은 내가 자연법칙이라 부르는 법칙들에 따라 서로에게 작용, 반작용한다.-
눈을 감으면 노트북이 안 보이고 프나도 안 보인다. 다만 다른 상(청각으로~)은 여전히 있다. 귀를 막아본다. 눈을 뜬다. 눈과 귀에 들어오는 이런 진동들은 자연법칙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의해서 서로 작용 반작용한다.
-그 법칙들에 대한 완벽한 앎은 틀림없이 각각의 상들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계산하고 예견하게 해줄 것이므로 상들의 미래는 그 현재에 포함되어 있고 거기에 아무 새로운 것도 보태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귀는 공기의 진동을 받아들여서 일정한 전기 신호로 바꾸어 뇌로 전달한다. 아 그렇구나 그러면 귀를 막으면 소리가 덜 들리겠구나. 충분히 계산하고 예견할 수 있다. 그러면 귀를 막은 우리에게 상들은 변화된다. 상들은 그런 현재에 들어가 있기에 귀를 막으면 덜 들리고, 열면 더 들리는 것이다. (시론에 따르면 질이므로 다른 질이 들리는 것. 하지만 우리는 지금 상식선에서 논의하는 중이다.)
-그러나 지각에 의해 밖으로부터 인식될 뿐 아니라 느낌(affections)에 의해 안으로부터도 인식된다는 점에서 다른 것보다 두드러진 상이 하나 있다. 내 몸이 그것이다.-
affections에 대한 건 그냥 문장의 맥락에 맞게 해석하면 된다. 베르그송은 철학에 신조어를 최대한 지양했다.
프나가 춤추고 있는 걸 인식했는데 어? 이거 가만 보니까 내 밖에서 프나가 춤추고 있는 걸 내 안에서 프나가 춤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약간 흥분되는 것도 그렇고. 아 그렇구나 난 몸이 있구나를 명확하게 알게 된다.
-나는 그 느낌이 일어나는 주변 상황을 검토해 본다. 그러면 그 느낌은 항상 마치 최후의 행동에 잘 결정되지 않은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 것처럼 밖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동과 내가 수행하려는 운동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느낌이 일어나는 주변 상황. 누가 치마 흔들면서 춤추고 있다.
...
밖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동은 아직 안 나왔지만 물질의 진동을 말한다. 우선 넘어가자.
내가 수행하려는 운동 사이.
굳이 말 안 해도 쉽게 이해되리라 믿는다.
44p (12)
-정조적 상태가 도달하는 행동은 한 운동에서 다른 운동이 나오듯 이전의 현상들로부터 엄밀하게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진정으로 새로운 무엇을 우주와 그 역사에 덧붙이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예컨대 정조적 상태로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하자. 그 운동은 다른 운동으로 계속된 질의 연속으로 나아간다. 그럴 때 이전 운동에서 뒤이어 이어질 운동을 엄밀하게 도출해 낼 수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완전히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덧붙여나간다. (시론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새로운 것을 덧붙여나간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움직여서 개입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자. 바로 내 몸이다.
-즉 내가 우주라 부르는 상들의 총체 속에서는 내 몸이 내게 그 유형을 제공하는 어떤 특별한 상들의 매개에 의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행된다.-
역주 20번을 그대로 옮겨본다.
-다른 모든 상의 운동은 자연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데 반해, 내가 즉 내 몸이 개입하면 그 운동은 더 이상 필연적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가 된다. 그런 행위는 나에게 알려진 위험과 주의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행위 즉 자유로운 행위로서 내 몸이 그 유형을 제공하는 지각상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즉 내 몸의 행위, 나의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이제 몸을 중심적으로 탐구해 본다.
44p(13)
-진동들을 신경중추에 전달하는 구심신경, 중추로부터 출발하여 주변으로 진동을 전달하고 몸의 부분 또는 전체를 움직이는 원심신경.
구심신경과 원심신경에 대한 건 시론 독회하면서 설명했으니 자세한 건 넘어가겠다.
45p(13)
-구심신경도 상이고, 두뇌도 상이고, 감각신경에 의해 전달되어 뇌까지 미치는 진동도 또한 상이다.-
이 모든 건 존재고, 관념이고 나발이고 전부 상일뿐이다.
-뇌가 물질계의 부분이지 물질계가 뇌의 부분이 아니다. 물질계라는 이름을 가진 상을 제거해 보라. 그와 동시에 그것의 부분인 뇌와 뇌의 진동도 제거해야 될 것이다.-
우리 몸은 어디 동떨어져 있는 건가? 그렇지 않다. 우주를 제거했는데 내 뇌만 온전히 남아서 둥둥 떠다니나? 조금 협소하게 크툴루가 크와앙 해서 대한민국이 날아갔다고 해보자. 내 뇌는 살아있을까? (뇌라고 했지 정신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로 뇌와 뇌의 진동이 사라진다고 가정해 보라. 그때는 거대한 그림 속에서 하찮은 세부만이 제거될 뿐이다. 우주는 온전히 존속한다. 뇌가 상 전체를 좌우하는 조건이라는 생각은 진실로 자기모순이다. 뇌는 가정에 의해 전체 상들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 뇌가 짓 물려서 터져도 우주는 여전히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거지.
나의 몸은 물질계에서 하나의 상일뿐이다.
하지만
46~47p(14)
-다만 나의 몸은 아마도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되돌려 주는 방식을 어느 정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내가 아끼는 만년필이 있는데 앞에다가 프나 영상을 틀어주면 만녀필은 무얼 선택할까? 내 몸과 이 만년필은 다르다.
여기까지의 논의로 메를로퐁티를 가져올 수 있는데 그건 나중에 시간 나면 따로 글을 써야 되는 긴 글 주제다.
47p
-여러 대상들을 움직이게끔 만들어진 대상인 나의 몸은 따라서 행동의 중심이며, 그 몸이 표상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행동의 중심이 되는 것이지 물질세계 전체 표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걸 좀 협의적으로 해석해서 몸의 중요성을 하찮게 보고 있다고 주장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현상학 관점에서 보면 그럴 법하다. 하지만 지금 현상학 하는 게 아니니까. 되는 거랑 안 되는 걸 구분하고 있는데 ... 그리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구를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몸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 새롭고도 실재적인 작용을 가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 대상들에 비하여 특권적 위치를 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어서
p47~49 (15)의 설명
그리고 마지막에
(16)
-그것들은 내 몸의 작용력의 증가나 감소에 따라 정돈되는 것이다.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은 그들에 대한 내 몸의 가능한 행동을 반영한다.-
49p(16)
구심신경의 절단은 중심을 통과하면서 주변에서 주변으로 이행해 가는 흐름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가운데 그 사물들에 대해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양과 질의 운동을 내 몸으로 하여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즉 신경이 없으면 행동을 할 수 없다. 행동을 할 수 없으면 지각도 사라진다.
50p (17)
-나는 상들의 총체를 물질이라 부르며, 그 상들이 내 몸이라는 어떤 특정한 상의 가능한 행동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을 물질의 지각이라 부른다.-
50~54p(17~19)의 내용은 간단하다. 뇌수의 진동은 물질세계의 일부로 그 역시 이미지라는 것이다. 내 몸도 당연히 이미지이고 물질이다. 내 몸에 머리에, 두개골로 보호받고 있는 뇌도 역시 물질이고 이미지다. (여기서 이미지(상)를 보고서 '이미지? 뇌가 내 상상이라고?'라는 의문이 들면 잠시 책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추천한다.)
그러면 뇌가 물질이고 이미지라면, 그것만 똑 떼어내서 사유할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분석이고 권장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물질계의 모든 운동은 연속되어 있다. 그런 연속을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시론>에서 논의한 대로 불완전한 방식이다.
54p(19)
-대상은 그 물리적 특성을 다른 대상과 유지하고 있는 관계로부터 빌려 온 것이고, 그의 각 결정, 따라서 그의 존재까지도 그것이 우주 전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빚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각이 단지 두뇌 덩어리의 분자적 운동들에만 의지한다고 말하지 말자.-
-지각이 분자운동과 함께 변하기는 하지만 그런 운동 자체는 나머지 물질계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자.-
이후 우리 첫 챕터의 결론이자. 물질과 기억의 중심 테마가 나온다.
우리는 머리말에서부터 관념론과 실재론의 중간을 이미지로 보기로 했다. 가장 일반적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상식선에서 보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는데 좋은 도식이 있다. 우리가 이미 <시론>에서 질리게 봐왔던 도식을 떠올리면서 아래를 읽어보자.
55P(20)
-여기 내가 세계에 대한 나의 지각이라 부르는 상들의 체계가 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상, 즉 나의 몸이 조금만 변해도 밑바닥으로부터 꼭대기까지 완전히 뒤집어져 버린다. 그 특별한 상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다른 상들이 조절된다. 만화경을 돌린 것처럼 그것의 각 움직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
이렇게 A가 있다. 관념론인지 실재론인지 그런 건 생각하지 말자 그냥 이런 게 있다. 내 몸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행동의 자유로, 움직임으로 변하게 만들 수 있다. 이걸 극단적으로 뻗어나가면 당연히 안 된다고 보았던 '물질계 자체'의 표상을 만들어내고 모든 게 나의 표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럴 일 없다. 왜냐하면 A는 B와 닿아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여기 그 동일한 상들이 이번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진 것으로서 있다.-
이걸 B라고 하자. 몸으로 물질계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건 각 물질들이 물질 자체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내뇌망상으로 이리저리 멋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명확하게 있다. 어디 물리 법칙을 손쉽게 어길 수 있던가. 펜을 던지면 위로 솟구치지 않고 아래로 떨어진다. 이걸 뇌로 어찌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바로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려 보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물질계의 모든 건 연속해 있다.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이제 머리말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
-이 책은 정신의 실재성과 물질의 실재성을 인정하며 기억이라는 한 명확한 예를 통하여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이제 <시론>에서 보았던 것과 다른 또 다른 만남을 마주한다. A와 B가 만나는 그림은 이미 <시론>에서 여러 번 봤으니까 다시 옮기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다.
-이 두 체계가 공존한다는 것, 또 동일한 상이 우주 속에서는 비교적 불변적이고 지각 속에서는 무한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론> 독회를 하면서 보았던 지속이 생각난다면 성공이다.
-각 상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주위 상들이 그것에 가하는 작용의 정도에 따라 분명히 정해진 방식으로 변하는 한 체계와, 모든 상이 오직 하나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그 특별한 상의 가능한 행동을 반영하는 정도에 따라 가변적 방식으로 변화하는 또 다른 체계가 존재하는 바. 이 두 개의 다른 체계에 동일한 상들이 동시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에 연유하는가?-
이번 주 독회 분량은 여기서 끝이다. 아카넷 판본으로 보는 사람들을 위해 자유문고 33번 역주를 옮겨 적으면서 정리해 본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아무런 이론적 투여 없이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본 지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술이다. 그러면 우선 내 몸이라는 특별한 상이 주변의 상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내 몸은 상들의 총체인 우주에 내 몸이 그 유형을 제공하는 상인 지각에 의해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하고 있다. 내 몸은 그러한 행동의 중심일 뿐 표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은 그들에 대한 내 몸의 가능한 행동을 반영한다. 물질이란 상들의 총체를 가리키며, 그 상들이 내 몸의 가능한 행동과 관계를 맺을 때 물질의 지각이 된다. 그러면 지각의 문제는 동일한 상이 두 체계 즉 1.상이 분명히 정해진 방식으로 변하는 체계와 2.내 몸의 가능한 행동을 반영하는 정도에 따라 변하는 체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서 연유하는지의 문제로 설정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논의이다.-
아직도 아리송한 사람이 있을까봐 반복해서 추가로 설명하자면
베르그송이 처음 말한대로 다 잊고서 시작하기보다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쓰는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부터 따져가면서 이해하면 좀 더 쉽게 와닿을 수 있다. 베르그송 말은 무시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미지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자. 쓰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이 또한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이야기해 보자. 우선 우리 주관이 물질에 대해 어떤 지각(베르그송이 말하는 지각말고 우리가 익히 평소에 쓰는 지각, 보다, 만지다 등등) 하면 '물질 자체' '물자체'와는 다르게 표상된다. 라고 보통 이야기한다. 칸트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지극히 정상이다. 칸트는 그정도로 위인이었으니까. 자 이때 지각되면서 표상된 것이 물자체와는 다르다는 그 차이점에서 우리가 평소에 익히 알던 '이미지'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이미지는 결국 물질 자체와는 다르다~. 그리고 물질은 주관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미지는 이런 객관적인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것에 바탕을 둔 주관과 객관을 이어주는 것을 말하게 된다.
만약 이미지라는 개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물질과 기억>을 읽는데 접목시키면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머리말+1장 첫머리부터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다 잊고서 새롭게 접근해야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베르그송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후 독회시간에서 보겠지만 지각 개념부터 평소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아직 안 했으니 지각은 넘어가고, 물자체와 이미지는 완전한 불일치로 다르다는 점을 거부한다. 물론 그 둘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다. 기억이 있으니까. 이것도 아직 안 나왔으니 우선 넘어간다. 어쨌거나 물질 자체와 이미지는 분명 차이가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베르그송 이번 독회 시간 요점이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가? 물질 세계는 곧 이미지들의 총체라는 말이 나온다. 1차 성질(기하학적 연장)과 2차 성질(색, 맛같은 감각적 질)을 구별하던 개념은 이제 베르그송 앞에서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야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일컫는 걸로 쓰였던 이미지라는 개념이 이제 물질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뜻이니까. 베르그송에게 1차 성질이 물질에 속한다면 2차 성질도 마찬가지로 주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도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머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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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가 기계론적 철학자들에 반대해서 물질의 제2성질이 적어도 제1성질만큼의 실재성은 가진다고 주장했을 때 철학에는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
라고 하면서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을 흐리게 만들었던 버클리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버클리의 입장 자체도 비판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높게 평가하는 것.)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혹시라도 베르그송이 이미지라는 개념에 무언가 새로운 걸 부여했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잘못된 해석이고 <시론>을 다시 읽으러 가야 된다. 기존에 버클리나 칸트가 쓰던 이미지와 다른 거 아닌가요? 물론 그들이 쓴 이미지를 떠올리면 안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미지라는 말 자체를 신조어처럼 새로운 개념어로 만드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이미지로 있는 그대로 주어진 바를 밝혀내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우리가 익히 알던 것을 잊고서 출발하자고 한 걸 떠올려 보자. 어디서부터 출발했던가. 다시 한 번 소은 선생님 식으로 말하면 데이터이다. <물질과 기억>에서 주 데이터는 우리가 가진 몸/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은 의식아닌가요? 라는 의문이 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이미 <시론>을 읽고 왔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doxa를 걷어내고 직접 주어진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철학한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보고 있는 것이지 새로운 이미지 개념을 덧씌우려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위에서 확인한 A와 B가 서로 맞닿아 있음을 잘 챙기고 이후의 독회 시간으로 미루겠다.
프랑스 철학 공부하려면 베르그송은 모르면 안되는걸 읽을때마다 항상 느끼게 될 만큼 대단한…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