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나이 먹음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 모르겠음


나의 경우에는 생애의 가능성이 점점 닫혀간다는 느낌임.


특히 몸이 약해지고 가동 범위가 좁아지면서


물리적 영역에서 다양한 의미로의 가능성이 닫혀감을 실감하고


결국 끝이라는게 있겠고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걸 


절실하게 느끼게됨. 


어떤 종교학자는 노화가 시작되는 30대부터


인생의 유한함이 감지되기에 


위대한 선각자의 각성의 시기가 30대초에 


몰려있다고더 하던데, 나는 각자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서 깨달음 같은것은 모를 일이고.




얼마전 책장을 보는데


너무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음.


그럴듯한 신문 서평과 마케팅에 넘어가 충동구매한


생존 수명이 1년에도 못미칠 종이 쓰레기가 흘러넘쳐서...


주인이 안치운 개똥을 보물로


착각해서 모셔둔 수집가처럼 느껴졌음.


하여 날을 잡고 봉다리에 꾹꾹 책을 눌러담아서


폐지 줍는 할머니들 줏어가시라고 집 앞에 버려두니


싹 쓸어갔음. 속이 시원하더군.




옛날에 선우용녀 할매가 예능인가 어디에 나와서


이제 나는 늙어서 만원짜리 허접한 식사하기 싫고


먹는건 비싸게 먹고 싶다는 얘길 했는데


그 당시는 아직 내가 나이먹어간다는 실감이 없던때라


노인네 주접 떠네 하고 넘어갔는데,


나도 주접의 의미를 이해할


나이가 되니 그게 뭔 소린지 알게되었음.




하여, 최근에는 시간의 무게를 잘 견뎌내왔고


앞으로도 잘 견딜게 분명한 책들 위주로만


모아가며 천천히 읽어가고 있는데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고있음.


원래 독서가 어느정도 습관으로 자리잡은 사람들은


빠르게 읽기 부심, 다독부심 그런게 있잖아.


나만 그렇다면 부끄럽지만 여하간 내겐 그런게 있었음.


웨이트 리프터에게 무게 부심이라는게 있는것처럼


가벼이 여겨지지 않는 작가의 책을 내가 이만큼을


이렇게나 빠르게 읽었다는 그런 부심.




지금은 어차피 시간은 유한하고


내가 그럴듯한 도서명을 얼마나 주어섬기든


읽은 책의 목록은 읽어야할 책의 목록에 비하면


먼지같을 거라는 실감이 있음.


그래서 그런지 문장하나를


노인네가 오물오물 밥을 씹어먹듯 


느리고 차근차근 읽게되었음.




최근에는 하루키의 장편을 영어번역으로 읽고있는데


과거 같으면 사건의 결말로 내달리는 독서를 했다면


지금은 하루키가 작품에서 언급하는 음악 넘버들을


청취 목록으로 만들며, 음악의 가사를 해석하고


뮤지션의 생애도 파악해보는 등 


곁다리로 빠지는 방식으로의 여가를 누리고 있음.


독서라기보다는 


독서를 빙자한 혼자놀기를 ADHD틱하게 하는것도 같은데


최근에 위스키에 입문 하고


빌 에반스가 진짜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임을


깨닫고 그의 넘버를 연주해볼 나를 꿈꾸며


피아노 입문이나 독학 유튜브 따위도 찾아보고 있음.


이런 독서도 꽤 괜찮다는 생각임. 




아 번외로 


나는 일본작가들을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때문에 일본어와 한국어의 닮음을 감사하고 있음.


최근 오에 겐자부로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책을 읽으면서


그 작가들이 택한 표현이나


단어가 주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그나마라도


다른 언어권 독자에 비해 잘 이해할 수 있을듯 하여 기쁘다고 


생각했음. 그런데 하루키책은 영어 번역으로 읽을때


또 새로운 말맛이 있는것 같아서 새로운 기쁨을 느끼고 있음.


하루키 장편을 다 읽고나서


그가 생의 말년에 서있다는 사실과


더 읽을 장편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꽤나 서글펐는데, 하루키 작품 영어번역은


이런 감정을 잊게 해줄만큼 좋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