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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으로 도서를 제공받은 글입니다.)


소설에서 의식은 곧 한 사람이다. 분열적인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제임스 조이스나, 수많은 의식들이 뒤섞이는 도시를 보여주고자 했던 존 더스 패서스나, 각각의 의식이 각각의 사람과 직결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화에서도 지그 베르토프가 '키노아이Кино-глаз'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듯, 한 장면을 찍는 카메라는 곧 한 사람의 의식이다. 몽타주와 컷업 기법의 괴이함은 이러한 전제로부터 오는데, 서로 다른 의식을 담고 있는 통일체로부터 난도질 당해 떨어져 나온 각각의 고기뭉치는 모여서 하나의 단일체처럼 스스로를 꾸며내지만, 동시에 그 누구의 눈으로 봐도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질적인 속성의 다발처럼 보인다. 의식이 물질적인 형태로 고정된 문자와 영상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 밖의 어떤 물화된 의식이라도 이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물론, 우리의 몸은 바로 그 물화된 의식이며, 체화된 인지로 구성되어 있다.


몸-마음의 관계와 체화된 인지는 그런 점에서 자주 왜곡되어 수용된다. 의식을 신경계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는 합리적인 비판은, 동시에 그 의식을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몸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독단으로 끝나곤 한다. 의식이 손실된 몸이 여전히 있는 것처럼 환상통을 느낀다는 것은 마음과 몸 사이에 쌍방향 교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몸과 마음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의 두 양태라는 접근이 뭔가 어색함을 암시한다. 어떠한 상태의 몸은 어떠한 상태의 마음을 낳지만, 그 마음이 반드시 그 몸을 통해서만 수반될 수 있다는 것은 무리한 가정이며, 순수한 의식을 다른 매체를 통해 구현해내려는 시도는 현재 불가능할지언정 계속 시도되어야 할 목표로 남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전제 위에서 마음이 통일성을 갖고 계속 유지되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불교철학의 역사가 의식의 한 찰나가 어떻게 다음 찰나의 의식을 낳고 이어질 수 있는지를 논하는 역사였듯, 몸-마음을 물질적 단위로 분할하려는 시도는 의식 현상을 늘 단절되고, 복제되고, 왜곡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레이 네일러는 이 체화된 인지를 다루는 SF 작가 중 가장 탁월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전작 <바닷속의 산>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네일러는 커넥톰이라는 물질적 신경 구조를 다루는 데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를 다루기 위해 현상학적 주변환경Umwelt을 감싼다. <바닷속의>에서 그것이 인공지능과 세계자본주의 체계, 문어와 난파선이었다면, <터스크>에서는 다미라라는 한 의식 커넥톰을 두 개의 서로 다른 환경, 인간 사회와 매머드 사회를 차용한다. 다미라는 인간 시절 밀렵으로부터 코끼리를 보호하려는 생태학자였고, 백업된 의식으로서는 복원된 매머드 중 하나로서 사육된 매머드에게 매머드의 사회성을 가르치는 우두머리가 된다. (매머드 버전의 영화 <아바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현재 의식 상태를 몸으로부터 추출해내 기록해둘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서로 다른 몸을 통해 펼쳐지는 방식은 단순히 서로 다른 감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는 평행선상의 경험이 인간으로서의 세계와 매머드로서의 세계에 겹쳐지는 식으로 등장한다.


다만 이 씨앗과 토양의 비유는 SF적 판타지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사회와도 겹쳐진다. (혹은, 사람의 의식 역시 사람의 움벨트에 감싸인 형태로 제시된다고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의식이 자신의 몸과 세계에 대응하여 성장하듯, 밀렵꾼의 어린 자식도 '좋은 것만 물려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결국 나쁜 것까지 전부 물려주고 마는 못난 아버지들'의 세계에서 자라나며, 그 세계에서 자라난 아이는 매머드가 된 다미라의 세계는 물론, 러시아인과 네네츠인의 세계 사이에서 자라난 다른 밀렵꾼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덕분에 각 인물들의 충돌은 일반 문학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바닷속의 산>에서 연구1원들의 섬과 AI 기반 원양어선이 물질적 충돌하는 순간, 그 어긋나는 동기와 세계관은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고 엇갈린 채 지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의 출신지 러시아에서도,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는 케냐에서도 그곳 사람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중간지대의 인간 다미라는 정작 자신과 가장 비슷한 처지인 네네츠계 러시아인 밀렵꾼을 즉시 죽여버리며, 인간으로서 다미라와 소통하고자 하는 밀렵꾼의 자식은 왜 자신이 구함받았고 왜 버려졌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평행선을 달리는 세계 속 의식의 충돌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 작가에 대한 약간의 조사를 해보니,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 레이 네일러는 SF 작가로 활동하기 전에 수십년 간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는 외교관으로 일생을 보냈고, 그 전부터도 퀘벡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지내며 내국민인 동시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줄곧 받았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형태의 의식이 펼쳐지는 환경을 확대하는 관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의 삶을 바라본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의식이 어떻게 그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방식으로 펼쳐지며, 그 전혀 다른 전개가 신기할 정도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사회에서 그렇듯 의식에서도 그렇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인 동시에 너무나 사회적인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과학을 믿고, 분할되어 포착될 수 있는 물질적인 마음을 믿지만, 그 재료가 정작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초기조건으로부터의 공학적 계산으로 가늠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SF 독자로서 레이 네일러와 같은 시야를 공유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한 찰나의 의식이 다음 찰나의 의식과 분리되어 서로 다른 분신으로 나뉘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믿으며, 그 논리적 전제 위에서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지평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다른 자신을 게임 이론에 기반해 판단하고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마법사들만이 자신을 서로 다른 분신으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하는 판타지 <배움의 어머니Mother of Learning>를 네일러는 그리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비현실적으로 간소화되어 의식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전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의 의식이 무수한 복제본으로 나뉘어 그 모두가 약간씩 다르더라도 개중 하나만 살아남는다면 그 의식이 바로 자신이라고 통일성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SF <순열도시Permutation City>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아마 내가 ,터스크>를 읽고 좋다고 느낀 부분이 네일러 본인에게는 가장 와닿지 않는 이유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내가 이 글을 읽고 내 방식으로 무언가 감동하였다는 것 자체는 납득할 것이다. 그런 다양한 재료로 풍부한 글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