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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어느 날 여자가 된다.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대부분 비현실적이고 오직 그 사건만을 성립시키기 위해 억지로 가공된 설정인 경우가 다분하다. 하지만 이런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흥미가 동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건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 특히 성적 호기심을 자아내기 좋고 가끔은 누군가의 소원이 되기도 한다. 특히 조아라에서 연재되는 대부분의 TS물은 그 특수한 수요와 공급 방식 - 독자들은 \'TS\' 라고 검색해 다양하게 같은 전제 아래 조금씩 변주된 이야기들을 찾고, 작가들은 제목에 \'TS\' 태그를 붙임으로써 그 기대에 부응한다. 이런 형식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은 곧 정형화된 이야기를 소비할 수만 있으면 만족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출난 작품은 그 탁월성으로 인해 부상하곤 한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조아라의 다양한 TS물들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아라에서 선작 1만을 넘은 TS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요소가 작품의 질이나 깊이를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에 어느정도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없다면, 행운이나 성실한 연재, 또는 홍보도 종국에는 무의미 속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작은 그러한 이야기들 중 드물게 무난히 순항해가며 점점 더 높은 선작과 추천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작 내적으로 탁월한 요소란 무엇일까?
현대인이라면 삭막한 도시나 현대적인 관료 국가의 안에서, 자신이 가축처럼 살아갈 뿐은 아닌지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은 현대라는 실체 - 역사학적으로 편리한 시대 구분으로서 현대가 아닌, 현대의 생활방식과 현대인과 현대 산업 등 - 가 태동했을 때부터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서도 이러한 소외에 대한 탈출구는 제시되지 못했고, 21세기에 이르렀다.
지극히 카프카적인 주제에 대해 언급했으니, 카프카의 작품을 떠올려보자. 특히 <변신>이 중요하다. <그래도 살아간다>를 포함하여 TS물 대부분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주인공이 완전히 다른 존재, 낯설고 이질적인 소녀가 되곤 한다. 그녀들은 즉 추방된 존재이다. 기존에 있던 남자들의 세계에서 추방된 존재이고, 넓게 보자면 현대 문명 밖으로 추방된 이들이다.
<변신>을 읽어보았다면 이들과 벌레가 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상황이 얼마나 유사한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깨어나 남자들의 세계나 관료주의적 현대 문명에서 추방되고 벌레로 변신한다. 그것을 카프카적인 공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도, 사형을 선고받을 예정인 죄수로도 변할 수 있다. 변할 수 있다기보단, 원죄에 따라 그렇게 될 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아간다>의 설아연은 평범한 남자에서 은발 적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된다. 그녀는 알비노이고, 정상적인 색소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명 세계에서 추방된 존재이다. 그것은 설아연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명 세계의 평범한 개체였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문명 세계 밖에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명 세계는 세포 하나조차 되지 못하는 아주 작은 부품인 그녀에게 무관심하다. 그녀가 그런 소녀가 된 것은 세계가 그녀를 사랑하거나 미워해서가 아니고, 운명이나 원죄로 불러야 할 어떤 것이 아주 임의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 운명을 어떠한 방식으로 헤쳐나가는지가 중요하다. 처음 몸이 바뀌었을 때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을 앓는다. 언어의 상실은 곧 문명 세계와 교신하는 제1수단의 상실이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추방되었고, 딱히 그녀의 죄는 아니지만 따라서 문명 세계와 교신할 수단을 상실했다. 설아연은 절망하고 비탄에 잠긴다. 여기서 카프카와 <그래도 살아간다>의 차이가 시작된다.
카프카의 주인공 곧 사형수들은 선고가 내려져도 체념한다. 절망이나 비탄에 빠진다기보다는 무관심하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무관심이라기보단 자신의 운명에 대한 완전한 이해다. 카프카의 세계 속에서 한 번 추방된 이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설아연은 다르다. 여자가 되고 교신 수단까지 잃었던 설아연은 치료를 통해 언어를 되찾고 살 길을 모색한다. 그녀는 언니의 도움을 받아 게임 방송을 한다. 그녀의 의지와 달리 시청자들은 그녀를 멋대로 천사님이라고 연호하고, 처음엔 꿈도 꾸지 못했던 거액을 줘서 현대 문명 - 자본주의 질서 속의 가축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한다. 그녀는 모멸감과 수치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명령에 따라 현대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문명으로 돌아갈 선택권이 없지만, 더욱 더 복잡해진 현대의 주민인 그녀에겐 문명으로 돌아가지 않을 선택권이 없다.
추방되었을 때조차 다시금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그 부와 아름다움의 서술을 보고, 설아연같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는 현대인들도 있다.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보자면, 이 소설은 그러한 현대인들이 추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관조하고 있다. 설아연 같은 존재라면 어쩌다 추방되었을 때조차 문명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추방의 위험성마저 없어졌다는 것은 즉 완전한 예속이다. 작가의 탁월성은 아이러니를 통해 최근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소외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탁월성으로 인해, <그래도 살아간다>는 걸작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조아라의 다양한 TS물들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아라에서 선작 1만을 넘은 TS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요소가 작품의 질이나 깊이를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에 어느정도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없다면, 행운이나 성실한 연재, 또는 홍보도 종국에는 무의미 속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작은 그러한 이야기들 중 드물게 무난히 순항해가며 점점 더 높은 선작과 추천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작 내적으로 탁월한 요소란 무엇일까?
현대인이라면 삭막한 도시나 현대적인 관료 국가의 안에서, 자신이 가축처럼 살아갈 뿐은 아닌지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은 현대라는 실체 - 역사학적으로 편리한 시대 구분으로서 현대가 아닌, 현대의 생활방식과 현대인과 현대 산업 등 - 가 태동했을 때부터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서도 이러한 소외에 대한 탈출구는 제시되지 못했고, 21세기에 이르렀다.
지극히 카프카적인 주제에 대해 언급했으니, 카프카의 작품을 떠올려보자. 특히 <변신>이 중요하다. <그래도 살아간다>를 포함하여 TS물 대부분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주인공이 완전히 다른 존재, 낯설고 이질적인 소녀가 되곤 한다. 그녀들은 즉 추방된 존재이다. 기존에 있던 남자들의 세계에서 추방된 존재이고, 넓게 보자면 현대 문명 밖으로 추방된 이들이다.
<변신>을 읽어보았다면 이들과 벌레가 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상황이 얼마나 유사한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깨어나 남자들의 세계나 관료주의적 현대 문명에서 추방되고 벌레로 변신한다. 그것을 카프카적인 공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도, 사형을 선고받을 예정인 죄수로도 변할 수 있다. 변할 수 있다기보단, 원죄에 따라 그렇게 될 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아간다>의 설아연은 평범한 남자에서 은발 적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된다. 그녀는 알비노이고, 정상적인 색소를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명 세계에서 추방된 존재이다. 그것은 설아연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명 세계의 평범한 개체였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문명 세계 밖에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명 세계는 세포 하나조차 되지 못하는 아주 작은 부품인 그녀에게 무관심하다. 그녀가 그런 소녀가 된 것은 세계가 그녀를 사랑하거나 미워해서가 아니고, 운명이나 원죄로 불러야 할 어떤 것이 아주 임의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 운명을 어떠한 방식으로 헤쳐나가는지가 중요하다. 처음 몸이 바뀌었을 때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을 앓는다. 언어의 상실은 곧 문명 세계와 교신하는 제1수단의 상실이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추방되었고, 딱히 그녀의 죄는 아니지만 따라서 문명 세계와 교신할 수단을 상실했다. 설아연은 절망하고 비탄에 잠긴다. 여기서 카프카와 <그래도 살아간다>의 차이가 시작된다.
카프카의 주인공 곧 사형수들은 선고가 내려져도 체념한다. 절망이나 비탄에 빠진다기보다는 무관심하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무관심이라기보단 자신의 운명에 대한 완전한 이해다. 카프카의 세계 속에서 한 번 추방된 이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설아연은 다르다. 여자가 되고 교신 수단까지 잃었던 설아연은 치료를 통해 언어를 되찾고 살 길을 모색한다. 그녀는 언니의 도움을 받아 게임 방송을 한다. 그녀의 의지와 달리 시청자들은 그녀를 멋대로 천사님이라고 연호하고, 처음엔 꿈도 꾸지 못했던 거액을 줘서 현대 문명 - 자본주의 질서 속의 가축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한다. 그녀는 모멸감과 수치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명령에 따라 현대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문명으로 돌아갈 선택권이 없지만, 더욱 더 복잡해진 현대의 주민인 그녀에겐 문명으로 돌아가지 않을 선택권이 없다.
추방되었을 때조차 다시금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그 부와 아름다움의 서술을 보고, 설아연같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는 현대인들도 있다.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보자면, 이 소설은 그러한 현대인들이 추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관조하고 있다. 설아연 같은 존재라면 어쩌다 추방되었을 때조차 문명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추방의 위험성마저 없어졌다는 것은 즉 완전한 예속이다. 작가의 탁월성은 아이러니를 통해 최근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소외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탁월성으로 인해, <그래도 살아간다>는 걸작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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