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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사회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셸 푸코가 정의하던 규율사회는 냉전으로 정의되는 면역학적 시대로서,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를 부정하려는 다른 자아를 부정하려고 한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위험을 끼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하려 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최근 우리 사회가 이러한 면역학적 사회적 담론(반 이민정책 따위의)이 유행하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가 어느 때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주장하는건 논리적 비약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오히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이란 면역학의 근본 범주로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에 이질성은 오늘날 아무런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어버리고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 되었다. , 오늘날 이루어진 세계화의 추세에선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걸림돌이 될 뿐이고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날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없어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가 규율사회를 대체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 불린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다.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된다.”라는 동사로 표현된다.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규율사회와 성과사회의 사회적 무의식 속에서 사회의 생산성을 최대로 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있다고 말한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금지의 부정적 도식보다는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


 규율사회가 금지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히스테릭과 편집증이었다면, 성과사회는 무엇이든 전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울증과 소진 증후군이 고유한 질병이 되었다. 우울증에는 타자라는 개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burn out)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나타나는 과잉 자기관계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 버리며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한다. 우리들은 저자가 말하는 절대적인 경쟁’(스스로를 끊임없이 뛰어 넘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입에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에 실패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우리 청춘들의 모습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이런 모습이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성과사회의 고장 난 기계다. 우리는 사회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졌다.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아 우리를 관계 맺지 못하게 한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타자에게 구애받지 않고 움직인다. 가상 현실 속 상상적 공간에서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수 많은 트위터리안들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버린 성과주체의 전형적인 모습인 듯 하다.) 우리의 삶에서 타자가 일을 중단시키고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도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성과주체는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유대능력의 상실은 성과주체가 자아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나 본인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자아에 몰입하게 되면 현실의 자아는 이상자아에 비해 초라하고 볼품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라고 여기게 된다. , 모든 타자에게 해방된(규율사회에서 해방된) 성과주체들은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조건(언제나 우리는 해야만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대입, 취업, 결혼, 자녀의 양육 등등)이 주체를 자기 자신의 나르시스적 반복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런 까닭에 주체는 하나의 형태, 안정적인 자아상를 그리지 못한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찾아오지 않는다. 완결이란 단어는 성과사회에서 사라져 버렸다.


느낀점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언제나 나는 기다리고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나는 기다린다. 오히려 어디라는 공간이 지나가는 시간처럼 느껴지고 기다림이라는 시간이 내가 머물러 있는 공간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경험은 아닐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저자는 타자의 발견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타자라는 것은 부딪히고 억압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가지지만 우리를 지탱하고 더 낫게 만든다는 믿음을 저자는 가진 듯 하다. (피드백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부족한 설명을 보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타자의 존재와 아무것도 아닌 날의 쓸모를 저자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의 안식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의 쓸모(쉬는 날)를 만든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좋은 책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 착각하던 나에게 저자는 너에게 지친게 아닌 너를 향해 지친다.’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타인이 싫어지고 사회에서 쓸모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성과주체를 위로하고 작금의 현실을 파악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3번을 읽었지만 아직도 작가의 해결방안 파트는 잘 이해하지 못해서 많은 내용을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렵네요.. 군에 입대하기 전에 올린게 제 마지막 글이니 한 1년만에 글 올린듯 합니다. 휴가 복귀하면서 투명사회라는 한병철의 다른 저작도 샀으니 3번은 읽고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이라 죄송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