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응시하는 데서 오는 이 쾌락은 그의 노트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분명히 리히텐베르크는 해방을 맛보게 해주는 시의 넉넉함이나 진정한 고백의 어조를 띠기 위해 필요한 표현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과감성의 결핍은 그의 명상에서도 족쇄로 작용하여 그의 성찰들은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리된 채 흩어져 있었다.
이 이중적인 충동─광활한 공간에 대한 갈망과 칩거 생활에 대한 욕망, 감옥처럼 느껴지는 한계 밖으로의 도피와 그 울타리 안으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현기증─, 모리츠는 일찌감치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내부에 가장 치열한 신비주의적 갈망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신비의 길 끝간 데까지 이르게 해줄 힘 또는 은총을 가지지 못한 이 독특한 인간들은 잔인한 내적 성찰의 고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드물게는 엑스터시에 빠지기도 하지만 쓰라린 환멸을 더 자주 맛보게 되어 있는 이 존재들에게 있어서 진보란, 간혹은 그들이 경배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떨쳐낼 수 없는 저주로 느끼는 그 내적 숙명의 자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리츠에게서 어떤 정신적 정복, 또는 도달되거나 초월된 어떤 단계를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단지 연속적인 감정의 상태들, 내부의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헛되이─사용한 쇄신된 이미지와 상징들만이 있을 뿐이다.
육체적 해체 앞에서 느끼는 기쁨은 깊은 희망의 조형적이고 환각적이며 물질적인 상징이다. 육체로 상징된 나는 우주 속으로 팽창하여 용해되고자 하는 욕망을 방해하는 협소한 감옥처럼 느껴진다. 보다 큰 어떤 것 안에서 용해되고 해체되는 것, 외부와의 접촉을 고통스러워하는 부류의 인간들이 즉각적으로 품게 되는 갈망은 그러한 것이다. 인간 세상을 향한 그들의 첫 외침에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받은 이 사람들은 나라는 고립된 공간 속에 버려진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한계의 협소함을 느낌으로써, 그들은 모든 침입으로부터 잘 보호된 어떤 피난처로 스며들어가거나, 공간 속에 스스로를 분산시켜버리거나 또는 광대한 망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그곳으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러므로 무덤과 육체적 해체의 이미지는 수축과 팽창이라는 대조적인 두 방식으로 하나의 깊은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낭만주의자들과 독일 관념론에 접근시키는 근본적인 감정을, 그리고 또한 그를 그것들과 구분되게 하는 것, 즉 그 감정을 지배하여 그것을 우주에 대한 그의 비전의 중심 그 자체로 삼아, 원래는 자의식에서 오는 불안 혹은 병에 불과했던 것을 형이상학적 정복의 도구로 변모시키는 능력의 결핍을 손으로 만지듯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 그의 왕성한 상상력은 그에게 제공되는 모든 것을 흡수하여 밤에는 꿈을, 낮에는 공포를 엮어낸다.
─알베르 베갱, 낭만적 영혼과 꿈 中
노발리스와 슐레겔 형제가 기가채드로 보일 지경
이거 책 재밌음? 낭만주의는 왜 파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