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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작가 보리스 사빈코프의 작품인 창백한 말은, 실제 혁명가로 활동하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그쪽 분야에서 이름을 좀 날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글이 더 몰입이 잘 되고 사실적으로 읽힌다고 해야 할까.
주인공인 조지는 러시아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다른 단원 4명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난다. 작품은 조지의 일기를 읽는 것처럼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을 내용으로 풀어나가는데, 조지의 독백이나 생각 위주로 문장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작품에 기독교적인 이야기와 인용도 많았는데, 잘 모르는 내가 봤을 때는 약간 몰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으나, 기독교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물들의 대사를 짧고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은 대체로 건조하게 서술하면서 작품 전체에 깔린 무거운 긴장감과 날이 지나갈수록 점차 다가오는 거사일을 마주하는 인물들의 초조함, 떨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서도 조지의 독백은 좀 만연체로 적힐 때가 많았는데, 표현들이 산문에 가까워서 곧잘 읽히면서도 풍부했다.
약간 마일드한 도스토옙스키 같았다. 둘 다 러시아 사람이기도 하고.
주인공인 조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한없이 냉철한 인믈로 그려진다. 머릿속에는 온통 총독을 암살하려는 생각으로 들어차있고, 거사가 몇 번이고 실패해도 판단력과 집중을 잃지 않으며, 다른 단원들의 사기를 돋우는 리더 격의 인물이다.
그러나 각자가 바라는 이상이랄 게 존재하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총독을 암살하려 하는 다른 단원들과는 다르게 조지는 명확한 입장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어려서부터 테러리스트 일에 몸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조지는 이러한 자신의 삶이 막연하게만 느껴져 거듭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숱한 실패 이후 동료 4명 중 2명의 숭고한 희생으로 총독을 암살하려는 작전은 성공으로 돌아갔으나, 조지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나마 쫒던 목표마저 없어진 조니는 삶에 지겨움을 느끼며 이리저리 떠돌게 된다.
그는 유부녀인 옐레나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 그녀가 유부녀였기 때문에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조니는 이리저리 걷다 옐레나의 남편을 만나게 되고, 순간 그간의 고뇌, 옐레나에 대한 욕망들과 같은 감정이 치솟아 총으로 그녀의 남편을 죽이게 된다.
대의적인 명분 없는 개인적인 살인을 저지른 그는 사랑을 독차지하려다 그만 옐레나의 마음을 잃고 만다.
그와 함께했던 단원들은 모두 죽거나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마음 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키던 옐레나 또한 이제는 없었다.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사랑에 몸을 바쳐 죽기를 원했으나, 더 이상 그럴 수도 없게 된 것이었다.
대의를 위해 벌인 살인과 사적인 욕망을 위해 벌인 살인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과연 조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 걸까 궁금증을 남긴 채로 소설은 끝난다.
오늘은 맑고 사색적인 날이다. 네바 강물이 햇빛에 빛난다. 나는 그 당당한 표면과 깊고 조용한 물결의 품을 사랑한다. 바다에는 슬픈 노을이 꺼져가고 선홍색 하늘이 타오른다. 애달프게 파도가 친다. 전나무는 고개를 숙였다. 나뭇진 냄새가 난다. 별이 빛나기 시작하고 가을밤이 오면 나는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다. 나의 권총은 나와 함께 있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
사회주의 향이 아주 찐한 게 맛있어 뵈네...
@ㅇㅇ 작가분이 업계 레전드라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어요. 길이도 짧고 읽기 쉬워서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