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구토> 를 처음으로 만난 계기는 새파란 대학교 1학년, 글쓰기 과제였다. 고작 한 번의 과제만을 위해 책을 사기에는 돈이 아깝게 느껴져 서점에 들르는 대신 도서관에서 빌리는 쪽을 택했다. 알다시피 갓 고등학교 교육을 간신히 마친 약관의 청년이 그 책을 이해할 리는 만무했다. 아무리 글자에 집중해도 단순한 상황 묘사 이상으로는 넘어갈 수 없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학문의 어려움인가 하는 탄식도 잠시, 이내 직접 읽기를 포기하고 인터넷에 해석과 요약을 검색하여 꾸역꾸역 분투한 끝에 자신도 모르는 내용을 지껄이고 있는 과제를 완성하고는 뿌듯해했고, 끝내는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부여받고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대학교 남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그도 사회적으로 형성된 통과 의례에 충실하여 1학년을 마친 후 곧바로 공군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씻고 먹고 자고 하기를 일 년을 하고도 반 년이 더 지나 익숙하게 될 즈음, 바로 그 즈음에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 아니, 사실은 '구토'였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내게 '찾아왔다'는 표현은 틀렸다. 흘려보내온 많은 시간들 중에서 하필이면 이때에 그것을 자각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전까지는 나는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덜 무서운 광석 밖에는 몸이 닿지 않았던 뿐이고, 바로 그 시점에 전에 비해 비로소 식물의 권내(圈內)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기 때문임을 그때는 전연 알지 못했다.
가벼운 그 회오리는, 끝없이 펼쳐져 고독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모래 가루들 앞에 차렷 자세로 있다가, 주의를 잠깐 잃고 그 앞에 가볍게 쌓인 낮은 둔덕에 발이 조금 닿은 것에 불과했다. 존재적으로는 그만큼 사소하고 초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흩날리는 먼지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어린 청년의 머리에는 두통이 일었고, 둔덕 앞에 누워 보내는 날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갈증을 피하기 위해 당장에라도 삶을 끝내려는 충동과 눈을 맞춘 채로 몇 날 며칠을 번뇌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어느 밤, 종이와 연필을 들고 부대 생활관의 독서실로 향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해변의 단상 - 어제는 바다에 빠졌다. 발이 물에 흠뻑 젖었다. 밤바다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기대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밀려드는 찝찝함이 싫어 해변 위로 도망갔다. 모래 알갱이가 발바닥에 빼곡히 달라붙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오돌토돌한 표면을 느낄 수 있다.
감각은 하체로 쏠린다. 발과 땅의 모래가 만나 뒤엉키고 떨어져 나간다. 지구의 자전이 반 바퀴를 훌쩍 넘겼지만 후끈한 여름의 공기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불러들인다. 곁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하지만 아무도 내 발을 쳐다보지 않는다. 왜 신발을 신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 굴곡을 드러낸 토르소, 점멸하는 술집의 네온사인, 그리고 가는 곳마다 달빛보다 환하게 비추는 가로등 불빛은 적어도 이 순간이 걱정 없이 즐길만한 기회이며 지금까지 경험하며 만들어 온 추억의 빛깔을 한층 더 다채롭고 탐스럽게 장식할 수 있는, 인생에 자주 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것들은 중심부로 가까이 갈수록 잦아들기는 커녕, 더욱 확신에 차서 끝내 현재만을 바라보라 명령하기 시작한다. 내일은 사실 오늘이 끝나야 만날 수 있는 것이지. 무한한 현재를 살 수만 있다면 내일 따위는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의구심이 들 때면 언제나 고개를 들고 주변을 바라봐. 이토록 넘치는 보증인들이 그대의 결정을 지지하겠다 힘차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다행인 것은, 발에 붙은 모래가 나의 관심을 안으로 돌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형언하기 힘든 이러한 하나의 집단 무의식 - 칼 융이 자신의 저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맥락과 비슷한 의미로서의 - 을 사뭇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끊임없이 맞물려 서로를 움직이는 톱니바퀴 무리의 한 가운데에 떨어진 단단한 알갱이처럼 체계의 총체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이리로 또 저리로 옮겨 다녔다. 나의 관찰에 따르면, 그들이 계속해서 톱니의 회전에 참여하게 하는 근원적인 안정감 같은 것은 아마도 다른 톱니들도 그와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일종의 확신인 것 같다. 사건의 우연한 조합 속에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작은 확신이 또 다른 확신을 낳고, 확신들이 모인 톱니 무리로 그것이 결국 귀결되었다는 말이다.
방금 말했듯 이 확신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게 아니다. 어떤 논리적인 이론에 바탕을 두지도 않는다. 그것은 근거가 없는 확신 - 더 엄밀히 말하자면 확신에서 알맹이를 뺀 껍데기의 확신이다. - 이 확신을 바라보고 확신하여 이루어 낸 지극히 주관적인 확신의 집합을 이루는 단위 요소로서의 확신이다. 그러므로 이쯤 되자면 '확신'이라는 단어가 본래 의미하는 바를 잃어버리게 되어, 언제까지나 서로의 믿음을 유지해주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한 톱니가 돌아가는 이유는 그와 맞닿은 톱니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맞닿은 톱니가 돌아가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맹목의 확신, 눈 먼 자의 외침, 빗발치는 욕망들이 추동하는 행렬들은 언제 끝이 나는가? 그것은 앞서 말했듯 현재를 무한히 살 수 있을 거란 그들의 믿음이 다 소진되는 때이다. 톱니가 제각기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듯 확신의 껍데기들도 저마다 상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큰 껍데기가 망가지면 전체도 크게 망가지고, 반대로 작은 껍데기는 크기처럼 미미한 영향을 준다.
그러나 껍데기가 하나라도 깨지기 시작하면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빨리 오냐 천천히 오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 붕괴의 미약한 시작은 점점 세력을 키워 형상을 다듬던 끌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와중에 튄 파편들이 광고판에 닿아 빛이 나는 글자들을 알아볼 수 없게 해체하기도 하며, 가녀리고 얇은 콩나물 모양의 줄기를 잘라 거꾸로 세운 4분음표로 가로등을 바꿔놓게도 만든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무작정 앉았지만, 고민도 잠시, 그는 금방 예전에 해운대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휴가를 떠올렸다. 울적함을 자아내는 밤바다, 진자운동을 하며 전진하는 수천 쌍의 육체가 이루는 기억 속 풍광이 내면의 변화와 잘 조응한 까닭일까, 풍광의 정과 내면의 반이 부딪쳐 형성하는 합은 문장을 고칠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로 종이에 옮겨졌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약간의 후련함과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느낀 그는 전날 보다는 편안함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전역했다. 대학 생활도 전과 같이 이어졌다. 수업을 듣고 과제로 바쁘던 그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의미를 더하기 위해 문학 전집을 차례로 읽는 습관을 들였다. 그리고 어느 날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재빨리 예전의 기억을 더듬고는 곧바로 사르트르의 <구토>를 주문하려 했다. 배송까지 3일이 걸렸다. 3일? 격정에 사로잡힌 그는 동네 근처의 서점 전부를 두 시간 동안 샅샅이 뒤졌다. 아동용 서적이나 교보재 위주의 변변찮은 곳뿐이었다. 알고 보니 걸어서 30분 거리의 백화점 안에 큰 서점이 하나 있었다. 그곳으로 가야한다. 영하의 온도 속에 입김을 뿜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벌벌 떨며 도착한 그곳은 다행히 예감을 배반하지 않았다. 일주일도 채 안 되어 마지막 장을 닫았다.
카뮈가 카프카를 언급한 것이 생각났다. <소송>과 <실종자>, 그리고 <성>을 주문했다. 문득 군대에서 우연찮게 카프카 단편선을 읽은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변신>. 아! 바로 그것이었다. 나를 육신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회오리. 독서실에서 해변의 단상을 옮겨적던 그는 다름 아닌 커다란 벌레, 한 마리 곤충이었다! 그는, 아니 그것은 박제되어 접착제로 옴짝달싹 못하며 책상과 의자 사이에 한 시간 가량 붙어있었던 것이다. 붕괴의 파편이 부숴뜨려 알아볼 수 없게 해체한 광고판의 그 글자들이 바로 로캉텡이 보았던 커다란 빛의 언저리, 안개를 뚫고 나타난 카페 마블리의 불빛이었다. 멀쩡히 서서 용도에 맞게 사람들을 위해 충실히 어둠을 밝혀주고, 손에 든 먹을 음식과 마실 음료를 분간하게 해주던 가로등이 갑작스레 콩나물 모양의 줄기를 잘라서 거꾸로 세운 4분 음표가 된 까닭은 성벽과 발전소에 의지하며 삶의 권리로 충만한 어떤 아버지가 산책을 하다가 붉은 걸레 조각, 사실은 걸레가 아닌 피를 내뿜는 괴로운 고기 덩이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마치 무대에 선 배우를 스포트라이트로 비추듯, 회오리가 나를 감쌀 적에 황량한 사막이 내 앞에 드러나고 그 위에 뜨거운 열기로 녹아내린 시계와 마로니에 뿌리가 춤을 추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 일상으로 돌아온다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나? 자연 법칙이 바뀌었나? 중력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나? 혹시 어제까지는 성립하던 거시세계의 프린키피아와 미시세계의 양자역학이 듣도 보도 못한 사이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었나? 그게 아니라면 설마 창조주가 원인 모를 이유로 죽고 천진난만한 그의 아들이 권세를 휘어잡고 칼날을 구부려 우주를 제멋대로 주무르기라도 하는 걸까? 사막에서는 그렇다. 따라서 단지 사막이 아닌 까닭이다. 무성한 잎을 거세시키고 길들인 까닭이다. 흐르는 존재에 방향과 의미를 덧씌운 까닭이다. 부지점장이 은행 업무에 열중하고 요제프를 견제하며 승진 경쟁에 박차를 가하기 때문이다. 마로니에 뿌리가 그 사전적인 의미를 따라 줄기와 잎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힘쓰기 때문이다. 일상의 범주에서 그것들은 더는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쩔 줄 몰라 존재의 음경을 등방으로 뿌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막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의식적인 티켓을 부여받았다. 회오리는 '찾아가는' 대상이 된다. 그는 판단 중지(Epoche)로 괄호를 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 괄호를 벗겨버릴 수도 있다. 언제든지. 페르소나를 쓰면서도 얼굴을 당기는 끈을 자각할 수 있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살짝 내려 벗긴다던가, 아니면 두 겹 세 겹으로 꽁꽁 싸맬 수가 있게 되었다. 소송이 진행 중일 때 재판소에 찾아가다가도 흥미를 잃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그래서 다시 내일의 은행 업무를 준비하고 부지점장을 견제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독서광을 일방적으로 대하지 않고, 원할 때에 문책하고 그러고 싶지 않으면 휴머니즘을 존중해 그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 디저트로 집어 먹는 블루베리는 여전히 혀에 달콤하고, 일을 마치고 고단한 몸을 따뜻한 물에 씻기면 개운한 것은 다르지 않다. 침대에 몸을 누여도 전처럼 솔솔 잠에 들 뿐, 악몽과 공포로 가득찬 밤을 보내지도 않는다.
다만 자유가, 나에게는 돌을 굴리고 선악의 이편을 건널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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