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티데모스>는 소은 박홍규 선생님의 분석이 있으니 그걸 일부분 인용하는 것으로 본문을 대체한다.
-배움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처음에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나중에 그것을 얻는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이미 소유된 지식을 통해서 동일한 대상이 더 자세히 살펴지는 측면이다. 다시 말하면, 지식은 무로부터 한꺼번에 나타나지 않으며, 결핍된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축적된다. 무지자를 표시하는 희랍어 amathia의 a는 결핍을 뜻하며, 무를 뜻하지 않는다. 무에서 지식이 나온다면, 그 지식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따라서 배운다는 행위가 불필요하다.-
-결핍의 이면은 가능성이다. 따라서 결핍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지식이 축적되는 경우에, 그 지식은 가능성을 통해서 얻어진다. 가능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존재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배움은 이러한 노력의 일종이다.-
-가능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에 대해서만 얻으려는 노력 및 진지한 추구가 요구되고, 또 그러한 것에 대해서만 권고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사물의 가능성은 여러 방향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방향성은 사물이 접근되는 측면이므로 한 사물에 대한 배움은 그 사물의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배우는 사람은 한 사물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무지이며,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상태는 모순된 상태가 아니라, 사물의 측면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지식의 결핍과 충만이 대립된 상태이다.-
-모순은 공존이 불가능하지만 사물의 측면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지식의 결핍과 충만의 대립은 공존이 가능하다.-
-소크라테스의 클레이니아스에 대한 비평은 배운다는 행위에는 여러 측면이 있으니 따라서 상반되는 측면들이 배움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클레이니아스가 모르기 때문에 소피스트에 의해서 논파당했음을 뜻한다.
-소피스트가 배움에 관해서 피력한 논쟁술의 방법이 제논의 그것과 유사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논의 이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다가 있다면 동일한 것들이 동시에 한정된 것이 되며 동시에 한계가 없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만약 다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현재 있는 것과 동일한 수의 다이며, 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그런데 그것이 있는 만큼 있다면 그것은 수에 있어서 한정된 것이다. 또 한편, 다가 있다면, 그것은 수에 있어서 무한하다. 왜냐하면 현재 있는 다 사이에 다른 수가 언제나 있으며 그리고 이 수들 사이에는 또 다른 수가 있다. 즉 다는 수에 있어서 한계가 없다. -
-위와 같은 제논의 논리에 의하면, 다는 한편으로는 유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하다. 이 두 규정은 동시에 다에 수반되며, 또 서로 모순된다. 물론 제논은 다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상반된 규정을 모순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제논의 논리는 다가 유한하다고 주장한 사람에게는 다가 무한하다고 반박하고, 다가 무한하다고 주장한 사람에게는 다가 유한하다고 논박하기 위해서 이용될 수 있다. 다가 유한성과 무한성을 상반된 규정으로 지니고 있듯이, 배움은 한편, 모르고 있다는 측면과 다른 한편, 알고 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배움은 상반된 측면의 결합 속에서 성립한다.-
-소피스트는 이 상반된 규정을 분리하여 상대방을 논박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반대를 모순으로 간주한다. 상반된 규정을 모순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어서 소피스트는 제논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상반된 규정을 모순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상반성은 연속성에 의해서 연결되며, 사물이 지닌 측면에 따라 달라지는 차이의 극한점이다. 사물이 지닌 측면은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관계 맺도록 하는 데에 요구되는 필수 조건이며, 다가 성립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다인 사물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양자택일의 모순율을 적용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아는 것을 배우는가, 모르는 것을 배우는가라고 클레이니아스에게 던져진 물음과 지식의 유희라고 소크라테스가 말한 뜻은 이러한 사실을 지시한다.-
-행복은 분명히 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며, 올바른 사용은 지혜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모든 사람은 지혜롭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282a) 그런데 지혜는 가르쳐질 수 있으며 저절로 사람 곁에 오지 않는다(282c). 지혜는 가르쳐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서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성공을 거두게 한다.-
-행위가 없어도 무엇이 이루어짐은 저절로 이루어짐이며, 저절로 이루어짐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저절로 이루어짐은 우연적이다.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음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이 있어 이루어짐은 행위이거나 행위가 아닌 작용이다. 그런데 행위는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행위는 이렇게 두 방향으로 갈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올바름이란 주어진 사물에 대해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우, 행복을 일으키는 원인이므로, 올바름은 주어진 사물과 행위의 주체의 행복한 상태를 연결해 주는 일정한 규정을 따름이다. 따라서 올바름은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일정한 법칙을 따름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행위가 많은 부분으로 분절됨에 따라서 더욱 복잡해진다.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목공술은 나무를 올바르게 사용하게 하는 지식이다. 나무는 여러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나무는 일정한 부분으로 잘리고 다시 결합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나무의 성질과 가구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람의 행위는 일정한 사물이 있고 나서 그것에 대하여 이루어진다. 올바른 행위는 행위 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제품 사이의 일정한 관계를 따른다. 그러한 관계를 따르지 않고 이루어짐은 행위의 밖에서 이루어짐이며 우연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사물의 관계 법칙을 따르게 하는 것은 지식이다. 그리고 행위는 행위의 주체자와 대상과 목적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식은 행위의 주체자와 대상과 목적을 연결해 준다. 그리고 이 연결은 행위에 선행하므로 주체와 대상과 목적을 분리시키는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다. 지식 속에서는 행위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은 일치되어 있다. 지식 속에서 행위의 주체는 사물과 목적에 도달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그것과 합일한다. 행복은 이 합일된 상태가 시공간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실현은 위에서 지적되듯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즉 행위는 그 배후에 우연성이 개입된 가능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능성을 통하여 이루어진 행위는 그 배후에 있는 우연성 때문에 완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행위는 지식 속에서 합일된 행위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의 일치를, 완전히 실현시킬 수는 없고 부분적으로 실현시킨다. 이렇게 행위는 정도의 차이를 두고 실현된다. 정도의 차이를 두고 무엇이 실현될 때, 높은 정도의 실현은 낮은 정도의 실현에 비해서 좋음<eu>이라고 규정되고 낮은 정도에서 이루어진 실현은 나쁨<kakos>이라고 규정된다. 좋음은 상대적인 규정이며 비교될 수 있는 것에 대해 적용된다.-
-그러나 한편 소크라테스는 280a에서 성공과 과오를 대비시킨다. 성공은 행위가 그 행위의 목적이 되는 상태에 도달했음을 뜻하며, 과오는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선과 악, 성공과 과오는 상반된 것이며, 행위의 결과는 실패와 성공 중 어느 하나로 결정된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행위가 사물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행위가 따르는 법칙과 실패하는 행위가 따르는 법칙은 다르며, 행위는 두 법칙 중 어느 하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동일한 측면에서 동일한 규정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받아들이지 않음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리와 허위가 양립할 수 없음과 동일하다.-
-소크라테스가 280e에서 한 말에 따르면 사람이 어떤 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때보다 더 큰 악이 나오며, 사물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 말은 두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 행위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양자택일적으로 대립되고 있음이 그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 행위를 하지 않음은 행위의 비존재이므로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관계가 없고, 필연적으로 동시에 선도 악도 아니며, 따라서 선과 악을 동시에 배제한다. 곧, 선과 악에 대해 우연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시에 선도 악도 아닌 것은 선악의 중간에 위치함이 그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을 올바르지 않게 사용해서 이루어진 악은 사물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때보다 더욱 나쁘며 따라서 선도 악도 아닌 것에 비해서 더욱 나쁘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선도 악도 아닌 것은 선보다 나쁘지만, 악은 선도 악도 아닌 것보다 나쁘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선, 선도 악도 아닌 것 그리고 악은 단계적으로 계열화된다. 이렇게 되면, 사물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둠은 적극적인 행위의 결여이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좋은 행위이건 나쁜 행위이건 그것들은 행위라는 점에서는 같다. 따라서 그것들이 행위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 사이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도 동일하다. 다만 성공하는 행위와 실패하는 행위는 그 관계 맺음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그 관계 맺음의 변화를 통하여 실패한 행위는 성공하는 행위로 옮겨갈 수 있다. 성공을 가져다주는 사물의 관계 맺음을 따름이 올바른 행위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맺음 대신에 다른 관계 맺음을 따름은 나쁜 행위이다.-
-그런데 행위의 주체와 대상과 목적의 합일은 지식으로부터 주어진다. 따라서 성공은 지식을 따른 것이며 실패는 지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281a에서 좋은 것, 예컨대 재산, 건강, 미 등은 사용함에 있어서 지식은 행위를 교정하면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곧 행위는 교정될 수 있으며 교정은 지식에 의해서 가능하다. 교정을 뜻하는 희랍어 katorthein은 성공시킨다는 뜻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렇게 성공과 과오는 행위가 지식에 인도되어 이루어지는지의 여부에 의하여 결정된다. 지식만이 오직 성공의 원인이며 무지는 과오의 원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성공이 지식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성이 없는 경우에는 적게 행위 하면 과오를 적게 범하며, 과오를 적게 범하면 불행이 적다고 말하고 있다. 행위의 강약과 대소는 그것 자체로서 선악이 되지 못하며 지식의 유무와의 관계에서만 그 선악이 결정된다. 곧 성공에 필요한 행동력은 지식과 다름이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 행동력은 용기, 부지런함 그리고 예민한 시각과 청각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는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행동력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선을 지식과 지식 아닌 것, 예컨대 건강, 재산, 명예 등으로 나눈다. -
-그리고 지식 아닌 것들이 무지에 의하여 지배되는 경우에는 그것들에 반대되는 것, 즉 병약(病弱), 빈곤, 불명예보다 더욱더 큰 악이 나오므로 그것들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이렇게 지혜만이 선이고 무지는 악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천명한다. sophia는 사물을 실제로 잘 처리하는 영리함을 뜻하며, 지식 epistēmē도 사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기술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지식은 지적인 측면을, 기술은 효율성을 강조할 따름이다. 성과 없는 지혜나 지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와 성공은 동일시되고 선으로 간주된다.-
-지혜나 지식은 저절로 사람 곁으로 오지 않는다. 기술과 똑같이 지식이나 지혜는 사람에 내재하는 능력이다. 외부에서 저절로 오는 것, 예컨대 신적인 영감이나 계시는 기술도, 지식도, 지혜도 아니다.-
-디오니소도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반격하고 나선 후에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분석될 수 있다.
클레이니아스가 배운다는 것은 그가 현재의 무지의 상태에서 그것의 비존재, 곧 그것과는 다른 상태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를 뜻한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운동을 배제하고 이 사태를 각각 다른 상태로 절단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서로 모순된 것으로 대립시킨다. 소피스트는 배움에 관해서 클레이니아스를 논파할 때도 이러한 모순의 논리를 사용했다. 이러한 모순의 논리로 소피스트가 클레이니아스를 논파할 때, 배운다는 행위가 상반된 규정을 동시에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상반된 규정은 클레이니아스의 존재 자체로 옮겨진다. 그러하여 무지의 상태에 있는 클레이니아스의 존재와 지식을 소유하는 클레이니아스의 존재는 모순된 것으로 단절되고 비동시적으로 적용되므로, 이 모순은 배우는 상태가 아니라 배우는 클레이니아스의 존재 자체가 단절로 소멸해 버리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물은 어떤 방식으로 있는 것이다(284c). 그런데 존재의 어떤 방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방식은 사물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정의는 각각의 사물이 있는 대로 규정한다(285e). 곧, 정의는 일자(一者)와 타자(他者)를 엄밀히 구별해 준다. 다시 말해서 정의가 구별해 주는 것은 일자의 자기 동일성과 타자의 타자성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 방식들은 동일성과 타자성으로 구분된다. 클레이니아스가 배울 때, 클레이니아스는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다만 무지의 상태가 그것의 타자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로 바뀔 따름이다. 모든 행위와 제작은 주어진 어떤 상태에 타자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소피스트가 말하는 것처럼 행위와 제작은 허무를 상대하지 않지만, 또 존재 자체를 상대하지도 않는다. 자체적인 것에 대한 말은 없다. 그것은, 그것을 말하려고 하자마자, 행위의 대상으로, 곧 타자로 변하고 말하는 사람은 무엇에 관해서 무엇을 말한다. 자체적 존재는 행위나 제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자체적이다.-
-소피스트는 각각의 사물을 고정시키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시킨다. 이러한 소피스트의 방법은 그들이 284a에서 허위를 아래와 같이 논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은 말을 할 때, 존재하는 것 가운데에서 말해지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곧 말하는 사람은 다른 것과 분리해서 바로 그 대상을 말하며, 따라서 참다운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에 계속되는 문장 속에서 비존재는 허무이므로 비존재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허무는 말해질 수 없으므로 말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를 말하고 진상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존재가 직접적으로 주어질 때 타자는 완전히 제거된다. 즉 타자는 무와 동일하다. 반박이 있을 수 없다는 대목에서 소피스트는 한 사람이 한 사물의 정의를 말하고 다른 사람이 다른 사물의 정의를 말할 때, 후자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전자의 정의를 말하지 않으므로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되며, 따라서 어떻게 말하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반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타자를 말함은 말을 하지 않음과 같다. 타자의 배제는 타자를 말함을 배제한다. 곧 타자의 배제가 운동의 배제를 동반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자체성이 야기한다. 소피스트가 모순을 이용하여 클레이니아스와 소크라테스를 반박할 때도 운동과 타자성은 배제되었다.-
재밌는 부분.
298
-실로 어머니께서도 모두의 어머니이신가요?
-물론 어머니께서도
-또한 그러니까 성게들의, 선생님의 어머니께서는 성게들의 어머니이시기도 하네요.
-자네의 어머니께서도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강아지들 그리고 새끼 돼지들의 형제이시네요.
-자네 또한 그러하니까 그러고 보니 자네 아버지는 멧돼지이고 개인 게야.
-선생님의 경우에도 그러하니까요.
다음 주는 뤼시스입니다.
소피스트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아주 재밌는 대화편이었습니다 '카르미데스'와 '프로타고라스'처럼 액자식 구조를 사용했는데, 그 두 작품보다 형식적인 부분에 대한 활용이 매우 돋보여 아주 좋았습니다 '카르미데스'에서 '너 자신을 알라'를 주장했던 크리티아스처럼, 여기서도 (마치 '고르기아스'에서의 칼리클레스와의 대화에서처럼) 과한 것은 좋지 않다느니, 이후의 이데아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 등을 소피스트 측에서 소개하게 하는데, 마치 비단 논변의 결과만이 아닌, 사유의 과정까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아이러니를 이용해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작중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둘 다 단어 의미의 모호성을 사용하지만, 전자는 상대방을 놀리는 데만 사용하는 반면, 후자는 의미 간 연관관계를 포착하여 건설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에서도 이러한 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logos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서 pragma를 향하는 플라톤 철학의 모습이 이런 곳에서 드러나는 듯합니다 여담으로, 크리티아스에게 의탁한 카르미데스와는 달리, 어리바리한 모양도 벗어던지고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반박한 클레이니아스의 모습도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중기 대화편으로 갈수록 퀄리티가 수직상승하는 모습에 다음 대화편들도 기대가 됩니다...
뤼시스는 짧으니까 상관없겠지만 중간중간 시간이 없어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시면 말씀해주세요. 이거 저희 둘만 하지 따로 참여하시는 분은 더 없는 거 같아서... 유동적으로 느리더라도 같이 마지막까지 할 수 있게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ㅠㅠ
@레알이랑 이제 슬슬 플라톤 간판 작품들 나올 때라 다른 분들도 들어오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