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의 국화 (十日の菊)

제1막 쇼난(湘南) 지방 모리 저택의 온실과 거실
제2막 동(同) 정원 잔디밭의 경사면
제3막 동(同) 주신(重臣)의 서재 겸 침실

시간
쇼와 27년(1952년) 즉 미일평화조약 발효 연도의 10월 13일 밤부터 다음 날 14일 새벽에 이르는, 24시간 이내의 사건.

등장인물
오쿠야마 키쿠(奥山菊) 전 하녀장, 54세
모리 주신(森重臣) 전 대장대신, 69세
모리 시게타카(森重高) 주신의 장남, 35세
모리 토요코(森豊子) 주신의 딸, 29세
기무라 아사코(木村淺子) 주신의 누나, 75세
가이즈카 리에(貝塚里枝) 주신의 여동생, 65세
스가와라 후사코(菅原房子) 주신 부인의 여동생, 58세
카키미(垣見) 전 대장대신 관저 보이장(급사장), 60세
다무라(田村) 「주간 풍운(週刊風雲)」 기자, 30세
야마구치(山口) 동(同) 사진기자, 25세
젊은이 A, B, C, D, E

1

1장 (모리 주신・딸 토요코)

(무대 안쪽은 유리로 된 선인장 온실. 앞쪽은 의자가 흩어져 있는 거실)
(가을밤. 수많은 선인장에 둘러싸인 아버지와 딸이 있다)
토요코: 이렇게 선인장을 잔뜩 키워서 어쩌실 작정이세요?

모리: 내가 선인장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이유는 그뿐이다.

토요코: 메마르고, 가시투성이에, 기분 나쁜 생김새를 하고 있고…… 아버지가 이런 걸 좋아하시니까, 제가 혼기를 놓친 게 틀림없어요.

모리: 이것 보렴. 엉뚱하게 생긴 부채선인장, 고슴도치 같은 구슬선인장, 바위 같은 암석사자, 공작 깃털 같은 공작선인장…… 이 녀석들은 자연계의 여러 가지 형태를 흉내 내고 있지만, 흉내 낸다고 해도 결국 그 본체를 조롱하며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를 만들려 하고 있는 게야. 자연의 진지한 의도에서 벗어나, 악의라고까지는 못해도 장난기 어린 마음이 형태를 갖췄다고밖에 볼 수 없어.

……세상에서는 애비가 정치를 단념한 후 선인장으로 갈아탔다고들 하지. 이런 기묘한 기형을 키우는 즐거움은, 내가 계속 정치판에 있었다면 과연 불건전한 취미라 불려도 어쩔 수 없었을 게다. ……돌아가신 네 어미는 그래서 그런 소문에 현혹되어 이 선인장을 몹시도 미워했지. 내게서 선인장을 빼앗기만 하면 다시 정계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게야. 그건 정치가의 아내로서는 정치를 꽤나 모독하는 생각이었다고 보지 않니.

토요코: 어머니는 요양소에서 선인장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아직도 선인장 광증이 낫지 않으셨냐고. 그리고 제가 왜 노처녀일까 하는 늘 하시던 푸념을요.

모리: 토요코, 네가 시시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네다섯 명 낳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애비는 한 번 목숨을 위협받았다가 결국 살아남은 인간이다. 너도 한 번쯤은 죽도록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서……

토요코: 아아, 그 말씀은 하지 마세요!

모리: 그놈에게 버림받고 나서 살아남은 인간이지. 우린 닮은꼴이야, 우리 부녀는.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두려운 순간을, 뭐 번개 같은 거지만, 분명하게 맛보아 버린 인간들이지. 그런 놈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토요코: 아버지껜 이젠 무서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네요.

모리: 그러니까 말이다, 네가 무턱대고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무서운 경험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누군가 다시 한 번 날 겁주러 오지 않으려나, 하고 말이야. 그거 참 대단했지, 그 권총과 소총과 기관총의 향연은.

토요코: 마침 16년 전 오늘이었죠. 어린 마음에도 기억이 나요, 그때 제가 열세 살. ……아버지를 놓친 분풀이로 군인들이 창고에 잔뜩 쏴댄 총탄 자국을, 저는 그 후로 자주 혼자 멍하니 바라보곤 했어요. 그 총탄 자국에 새빨간 양귀비꽃을 한 송이씩 꽂으며 놀다가 어머니께 혼났던 것도 기억나요.

모리: 그랬지. 딱 16년 전이다. 역시 이렇게 달이 밝고 고요한 가을밤이었지. 군인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새하얀 달빛에 총검을 번뜩이며 해변을 따라왔다. 쿠데타(Coup d'État). 비록 실패했지만, 영광으로 가득 찬 단어다. 어쨌든 10·13 사건은 대단한 사건이었어. 나는 그 2년 전, 대장대신으로 임명되어 당시 내각에 이름을 올렸을 때보다, 10·13 사건 때 표적이 되었을 때가 더 높은 영광의 절정에 서 있었던 거다.

토요코: 늘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그때는 벌벌 떠셨으면서.

모리: 내가 무서워했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야.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암살자에게, 그것도 1개 중대의 반란군에게 표적이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정치가의 빛나는 절정이다. 참으로 잘도 노려 주었지. 그 젊은 군인들의 코 위에는, 항상 얄미운 내 동상이, 국적(國賊)의 동상이, 자본가 놈들의 수호신 동상이 짓누르며 비웃고 있었던 거다. 그 한 명 한 명의 군인들 코 위에, 밤낮없이……. 나중에 그 생각을 하면, 나는 기쁨에 몸이 떨렸다.

토요코: ……하지만, 하녀장인 키쿠와 그 아들 일은……

모리: 그건 완전한 비극이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이야. 비극은 내게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일어났어. ……너도 수다쟁이 백모님들에게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 있을 테지. 나는 그 비극의 영광 때문에 내 영광이 흐려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 사건의 중요한 핵심, 가장 화려한 핵심은 무마시키고 기자들 귀에서도 멀어지게 한 뒤, 키쿠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어 시골로 은둔하게 했지. ……그렇게 16년이 무사히 지났다. 지금은 사건 기념일에 푸아그라 통조림을 들고 찾아오는 옛 보이장만이 그 흔적일 뿐이야.

토요코: 오늘은 카키미가 아직 오지 않았네요. 매년 오늘이 되면 반드시 오는데. 그 사람은 그 시절 관저의 보이장이었죠.

모리: 멍청한 사내지. 내가 눈여겨보아 들여보내 주었어. 나는 바보 같고 우스꽝스러운 사내를 좋아하니까. ……게다가 사건 당일 밤, 그 녀석은 관저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난 사건의 진짜 모습은 알지 못해. 뭐, 그것만이 그 녀석의 장점일 테지.

토요코: 아버지는 마침 사건 2, 3일 전부터 감기에 걸리셔서 도쿄 관저에서 여기 집으로 돌아와 계셨을 때였죠. 군인들은 그걸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거네요.

모리: 놈들은 그걸 알고 있었지. 멋진 달밤이었다. 그 시절엔 상층부 생활의 사소한 움직임마저 하급 장교의 귀에 찌릿찌릿 전해졌다. 같은 핏빛 꿈을 재촉하면서, 그렇게까지 노인과 젊은이가 서로 가까워진 적은 없었다. 놈들은 알고 있었어, 백 정의 기관총 앞에서는 내각도 대은행도 펠트 모자처럼 연약하다는 것을. 놈들은 잠깐 그걸 머리에 얹고 멋을 부려보고 싶었던 게야. 참으로 젊은이다운 꿈이었지. 그러기 위해서는 노쇠하고 묽은 피가 아주 조금 흐르면 족했던 거다. ……그래도 이 애비는 살해당하지 않았어! 젊은이들의 꿈을 배신하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건 없다. 나는 놈들의 꿈을 사랑했기에, 슬쩍 몸을 피해서 멀리서 놈들의 꿈을 비웃어 주는 것도 똑같이 사랑했던 거다. ……알겠니, 토요코. ……16년 전 오늘 밤, 시퍼런 칼날과 권총과 기관총에 둘러싸여 있던 찬란했던 내가, 오늘 밤은 이렇게 볼품없고 가시투성이인 선인장에 둘러싸여 있다. ……잘 알아두렴.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무대 안쪽 유리 너머로, 유령처럼 토요코의 고모와 백모들이 나타난다. 주신의 여동생인 가이즈카 리에 미망인과, 주신 부인의 여동생이자 역시 미망인인 스가와라 후사코, 주신의 누나인 미망인 기무라 아사코이다. 게다가 그 뒤로 주신의 장남 시게타카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일동, 온실 문을 통해 들어온다)


2장 (주신・토요코・리에・후사코・아사코・시게타카)

리에: 오라버니, 큰일 났어요. 키쿠가 곧 집으로 올 거예요.

모리: 뭐, 키쿠가? 그럴 리가. 그 녀석은 16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

아사코: 16년 동안 안 보였다고 그게 대수니, 주신. 설령 16년 동안 거기 보였다 한들 내일 당장 안 보이게 될지도 몰라. 내 모습조차 남들 눈에 75년이나 계속 보였지만 말이야.

모리: 실없는 헛소리는 누님, 그만두세요. 그보다 어째서 키쿠가 여기에 온다는 겁니까?

후사코: 리에 형님께서 설명해 주실 거예요. 방금 돌아오셔서 저희 모두 그 얘기를 듣고, 황급히 알려드리러 온 거랍니다.

리에: 저, 역 앞까지 장을 보러 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이에요. 과일가게에 들렀는데 자몽이 없어서, 목도 마르고 뭔가 마실까 하고 과일 파르페 가게 쪽을 들여다보았죠. 그랬더니 안쪽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어요. 그중 한 명이 어깨가 떡 벌어진 모양새나 짧은 목을 보아, 단번에 카키미라는 걸 알 수 있었죠. 하지만 집에 오는데 여자와 동행했다는 게 이상해서, 저, 가게 앞의 포도며 감이며 가을의 윤기 나는 과일 더미 사이로 유리문 너머 카키미의 일행을 훔쳐보았어요. 수수한 기모노를 입고 벌써 쉰이 넘었을 텐데도 아직 색기가 남아있는 얼굴 생김새는, 오라버니, 제 눈이 틀림없어요, 확실히 키쿠, 키쿠였어요. (일동 탄식)

모리: 하지만 어째서 카키미가 키쿠와……

리에: 글쎄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 두 사람은 같이 올 게 뻔해요.

모리: 뭐 하러 와, 돈 빌리러?

후사코: 어머나, 형부에게 돈이라니요! (일동 머금고 웃는다)

모리: (독백) 도대체 뭐 하러 오지, 이제 와서 그 녀석이.

토요코: 걱정하실 거 없어요, 아버지. 누구나 옛날의 무서운 기억을 이번에는 달콤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다시 맛보려 하는 법이니까요. 키쿠도 16년 전의 은혜나 원한을 이제 와서 들춰낼 생각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아사코: 어린애 주제에 무슨 소리니.

토요코: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저를 붙잡고 어린애라고 해주시는 건 큰고모님뿐이네요.

아사코: 그 여자는 네 아버지를 도왔단다. 네 아버지 목숨을 구했어. 원한은 시간이 쌓이면 잊힐지도 모르지만, 일단 남에게 베푼 은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법이야.

리에: 하지만 큰언니, 그 여자는 오라버니 얼굴에 먹칠을 하는 방식으로 목숨을 구했잖아요.

아사코: 위급한 상황이었으니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뭘 했든 상관없지. 자, 오늘 밤은 기대되는구나. 주신이 큰 은인인 여자와 16년 만에 대면을 할 테니까 말이야. 이걸로 나도 오래 산 보람이 있어. 세상일은 본래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게 진짜지.

후사코: 비아냥거리실 때가 아니에요, 큰형님. 다 같이 지금부터 상의해서, 어떤 태도로 키쿠를 맞이할지 생각해야죠.

토요코: (다정하게 시게타카에게) 오빠는 어때?

시게타카: 아아, 드디어 내게 물어봐 주었구나. 넌 다정해. 아무도 내 의견을 묻는 놈 따윈 없거든. ……그래서 내 의견이 뭐냐 하면, ……그래, 내 의견은 아무것도 없어.

토요코: 그치만 오빠도 전쟁의……

시게타카: 그 말은 하지 마!

아사코: (웃음을 터뜨리며) 바보 같은 짓이지. 이 집에선 다들 과거에 위협받으며 살고 있어. 나만 예외이긴 하지만.

시게타카: 그야 큰고모님 자신이 과거이시기 때문이죠.

아사코: 뭐라고 떠들든 마음대로 해.

토요코: 어머, 선인장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무슨 꽃이죠? 아버지. (순백의 커다란 꽃이 여러 송이 피어난다)

모리: 월하미인(月下美人)이라는 녀석이다. 이 녀석이 오늘 필 줄은 생각도 못 했군.

리에: 예뻐라, 점점 꽃잎을 펼치고, ……

모리: 옛날엔 내 주변에 경찰이 잔뜩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후사코: 보세요, 꽃이 다 피었어요.

모리: 하지만 지금은, ……막상 이렇게 맞이하고 싶지 않은 방문객이 온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주변엔 호위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사코: 참 예쁘네. 새하얗고, 달이슬을 맞고 피는 걸까.

시게타카: 아버지, 우리를 과거로부터 지켜줄 경찰은 없습니다.

(이때 상수(왼쪽) 현관의 벨이 울린다. 일동 흠칫하며 그쪽을 향한다. 일동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쿵쿵거리며 시게타카가 현관문을 열러 간다)


3장 (앞 장의 인물들에 카키미가 더해짐)

카키미: 늦었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늘 그렇듯 스트라스부르의 푸아그라를 가져왔습니다. (일동 숙연. 카키미 이상하다는 듯이 다짐하듯) 1년에 한 번입니다만, 각하께서 좋아하시는 건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오늘 밤이 16년째군요. 이렇게 여러분의 무사하신 모습을 뵈오니, 16년 전 오늘 밤에 비해, 카키미는 기쁘고 또 기뻐서 저절로 눈물이…….

리에: 당신 혼자인가요?

카키미: 예?

리에: 오신 건 당신 혼자인가요?

카키미: 이런, 천리안이시군요. 오늘 밤은 실은 아주 드문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열흘 전쯤, 뜻밖의 인연으로 16년 만에 그 사람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오늘 밤 이 이상의 선물은 없겠다 싶어 데리고 온 것입니다. 얼굴을 보기 전엔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틀림없이 여러분은 앗 하고 놀라실 겁니다. 자, 들어오시오. (문밖을 향해 부른다. 키쿠 들어온다)


4장 (앞 장의 인물들에 키쿠가 더해짐)

키쿠: (조용히 들어오며)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여러분도 변함없이…….

(일동 침묵. 이윽고 주신이 입을 연다)

모리: 허, 오랜만이군. 이거 참 진객(珍客)이로다.

카키미: (그 말에 기세를 얻어) 진객이지요, 정말 진객이라, 틀림없이 여러분이 기뻐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키쿠 씨가 방문하는 걸 자꾸만 꺼려하길래, 억지로 끌고 온 셈이지요.

모리: (비꼬듯이) 거 참 눈치도 빠르시군.

키쿠: 아닙니다, 제가 뵙고 싶어서 카키미 씨를 졸라 데려와 달라고 한 것입니다.

모리: 그런가, 거 참. ……나도 만나보고 싶었다.

키쿠: 발림말만 하시는군요, 나으리. 저를 만나고 싶지 않으신 마음은 잘 헤아리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꼭 뵙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요.

카키미: 어이어이, 키쿠 씨, 말이 다르지 않은가. 내 체면을 구기면 곤란해.

키쿠: 이제 됐어요. 제가 아무래도 이 댁의 문턱이 너무 높아서, 문턱을 넘었으니 이제 된 거예요.

카키미: 아니, 참, 각하, 이렇게 되어버려 제 입장이…….

모리: 괜찮네, 괜찮아, 신경 쓰지 말게.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겠나. 키쿠, 오해하면 안 돼. 나를 비롯해 가족 모두가 얼마나 너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몰라. 만나면 반가워서 각자 쌓인 이야기도 있을 테고.

키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거실의 적당한 곳에 앉는다) 16년이나 지나서 이런 마음이 든 것은, 올해 추석(오봉)에 아들의 성묘를 갔을 때였습니다.

리에: 어머, 아드님, 오죽하시겠어요…….

키쿠: (리에를 힐끗 차갑게 보며) 시골에서는 구정(구력 오봉)을 지내니까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오후, 아들이 좋아하던 초콜릿을 들고 바닷가에 있는 무덤까지 걸어갔습니다. 물론 버스도 있습니다만, 버스가 없던 옛날을 기리며 걸어갔지요. 무덤 앞에 꽃을 바치고, 녹아가는 초콜릿을 올렸습니다. 그때 바다 위에는 이상한 모양의 구름이 떠올라, 그것이 해를 가리고 빗살처럼 빗질된 햇빛이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높은 소나무 우듬지에서 매미가 울고, 파도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어요. ……문득 그때, 파도 소리도 매미 소리도 일제히 딱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귀가 갑자기 들리지 않게 된 것처럼요. ……그때였습니다. 오른쪽 귀 바로 옆에서, 틀림없는 아들의 목소리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가 속삭이듯 이렇게 말하는 게 들렸습니다. 『어머니, 모리 씨 댁에 가보세요. 꼭 그곳에 가보세요.』

(일동 탄식)

……그전까지는 평생 찾아뵙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시골 가게를 정리하고 도쿄로 올라왔습니다. 신의 이끄심이었을까요. 넋이 나간 듯한 기분으로 긴자 거리를 걷고 있는데, 딱 카키미 씨를 만난 것입니다. 들어보니 매년 사건 기념일에 이렇게 카키미 씨가 댁을 방문하신다기에, ……

아사코: 오오, 그런가. 그래서 온 게로구나.

리에: 이것도 아드님의 마음이 이곳에 남아, 당신과 다시 한번 옛 인연을 데우기 위한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준 걸 거야.

시게타카: 하지만 그렇게 自殺한 아들이……

모리: 이놈! 시게타카!

토요코: 오빠!

카키미: 여러분, 어떻습니까, 매년 그렇듯, 지금은 옛날의 무서운 불행은 잊고 서로의 무사함을 축하하는 모임으로 하심이.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호텔에서도, 경사스러운 결혼식 도중에 터무니없는 분란이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저희들의 연륜이 힘을 발휘하는지라, 그저 바보처럼 접시를 들고 다니며 인사만 꾸벅이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요. 술입니다, 술. 예년처럼 한잔 어떠신지요? 비장의 포도주에, 스트라스부르의 푸아그라로……

모리: 아아, 카키미, 좋은 생각이다. 당장 부탁하네.
카키미: 예. 알겠습니다. (인사하고 우측 무대 끝으로 퇴장)

키쿠: (온실을 보며) 어머, 훌륭한 선인장이네요. 누가 손질을.

모리: 나지.

키쿠: 나으리께서 직접! 옛날에는 관저 정원에 벚꽃이 잔뜩 피었다가 다 지고 난 후에, 「어라 올해는 안 피었네」 같은 말씀을 하시곤 했지요.

(일동 약간 안심하여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후사코: 관저의 벚꽃은 정말 훌륭했지.

키쿠: 하지만 벚꽃 밑이 굵은 자갈이었잖아요. 다들 청소하느라 애를 먹었었죠.

리에: 넌 시종일관 관저로 심부름을 갔으니 기억하고 있구나.

(카키미, 푸아그라와 얇게 썬 토스트, 글라스와 적포도주를 은쟁반에 받쳐 들고 나타난다)

카키미: 자, 각하, 드시지요.

아사코: 이 순간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주신은 자네 덕분에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겠지.

카키미: (각자에게 술을 권하며) 아니, 제게도 옛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기분입죠.

시게타카: (글라스를 받으며) 그렇게 조금도 다를 바 없다면, 슬슬 저 정원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와야 할 텐데.

아사코: 시게타카는 훌륭한 아이야. 무슨 일이든 직언하는 용기가 있는 건, 이 집에선 이 아이뿐이지 않을까.

시게타카: 미일평화조약도 얼마 전 드디어 발효되었고, 큰고모님, 거리에 군함 행진곡이 흐르고, 모든 것이 옛날로 돌아가는 거니까, 저 반란군의 기관총 소리도……

아사코: 이 나이가 되었어도 귀는 먹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또 해변 쪽에서 군인들 군화 소리가 들려오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알아채고……

카키미: 키쿠 씨는 그날 밤 어떻게 하고 있었지?

(일동 흠칫 놀라 얼굴을 마주 보고 입을 다문다)

모리: 카키미, 한 잔 더 주지 않겠나.

카키미: 예, 지금 곧.

(카키미, 다시 주신의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고 푸아그라를 권한다. 주신이 그의 귀에 무언가 속삭이려 할 때)

키쿠: (카키미에게) 당신, 관저에 있었으니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카키미: (다시 키쿠 쪽으로 돌아가서) 매년 오늘 밤엔 이곳에 찾아와, 16년 전 그날 밤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보면 어느새 밤이 깊고, 염치없이 묵고 가는, 뭐 그런 식이지요. ……저, 10·13 사건 때 당신은 확실히 이 댁에 있었지. 사건 와중에 하녀방에서 벌벌 떨고 있었겠지. 그걸 생각하면, 각하, 귀엽게 느껴집니다. 아무튼 이 사람도 16년 전엔 이미 나이가 꽤 든 여인이었지만, 이 댁 하녀들 중에서도 제일 미인이어서, 지금이니까 하는 말입니다만, 관저 보이들도 종종 이 사람 소문을 내곤 했지요.

(일동 곤란한 듯 침묵)

하지만, 키쿠 씨, 제가 매년 이곳에 폐를 끼치고 있으면서도, 전혀 당신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구먼. ……실은 나도 오늘 밤 이곳에 와서 여러분 앞에서 당신의 추억담을 듣는 게 즐거움이라, 그래서 여기 오기 전까지 한마디도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던 거야.

키쿠: 그야, ……말씀드려도 괜찮다면 말씀드리죠.

모리: 키쿠!

카키미: 거 보시오, 각하께서도 듣고 싶어 하시잖소.

키쿠: 나으리께서 듣고 싶어 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고, 저도 16년 동안 침묵해 온 일입니다만, ……뭐, 당신에게 들려준들 어쩔 수 없지요. 여기 계신 분들은 잘 아시는 이야기니까요.

(잠시 침묵. 카키미는 이윽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일동 묵연. 토요코, 갑자기 키쿠 앞으로 나선다)

토요코: 그렇다면 제게 이야기해 줘요, 키쿠 씨.

모리: 토요코!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다 말해주지 않았니. 그걸 제3자 앞에서 굳이…….

토요코: 저, 키쿠 씨의 입으로 듣고 싶어요. 슬픔과 원한으로 굳어버린 낡은 석상 같은 당신의 입에서, 직접 그날 밤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시겠어요? 키쿠 씨. 당신의 고생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후로 저도 저 나름대로 여러 슬픔과 고생을 겪었어요. 여자가 버림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도 알게 되었고요. ……점점 나이를 먹고, 혼자서. 그건 뗏목에 묶인 채 시간의 바다로 떠내려가는 것과 같아요. 시시각각 앞바다로 떠내려갈수록, 구해주러 올 사람을 만날 희망도 옅어지죠. 모두가 이제 아무도, 제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게 돼요. 파도조차, 바람조차도. 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입은 말라 찢어질 것 같아요. ……제게 지금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진실이에요. 당신 입에서 오늘 밤 그걸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모리: 진실이라면 내가 충분히 주었을 터인데.

토요코: 아니요, 아버지는 결국 선인장처럼 물이 필요 없는 식물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후사코/리에/아사코: 그래. 맞아.

시게타카: 키쿠 씨, 나도 듣고 싶소. ……나도 그 사건 날 밤에 당신이 겪은 슬픈 일의 모든 것을 듣고 싶어. 이 집에는 단 하나의 진실한 고뇌도 슬픔도 없소. 당신이야말로 진짜야. 안 그렇소?

카키미: (마침내 힘을 얻어) 여러분이 저렇게 말씀하시지 않소. 말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만, 가슴에 맺힌 건 뱉어내는 게 좋아. 안 그렇습니까, 각하.

모리: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으음.

키쿠: ……마침 내일은 아들 쇼이치(正一)의 기일이기도 하고, 옛날 일을 들추는 것 같습니다만, 말씀드리는 게 쇼이치의 영혼을 위로하는 길이기도 하겠지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쇼이치와 저는 홀어머니와 외동딸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고, 쇼이치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죠. 어쩌다 휴일에 만나는 게 낙이었습니다만, 이윽고 쇼이치는 군대에 징집되어 오다와라(小田原) 연대에 들어갔습니다.

시게타카: 맞다. 반란군은 도쿄가 주력이었지만, 우리 집을 습격한 건 오다와라 연대 놈들이었지.

카키미: 전 군대 쪽은 영 문외한이라서…….

아사코: 너한테 묻지 않았어.

키쿠: 그건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갑자기 짧은 면회가 허락되어, 저는 휴가를 내고 오다와라로 달려갔습니다. 말수가 적은 아이였습니다만, 그때 쇼이치의 눈은 평소와 달리 많은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져간 초콜릿을 맛있게 먹고서 포장지를 돌려줄 때, 작은 종잇조각을 끼워서 주었습니다. 제가 바로 읽으려 하자, 나중에 읽으라고 눈치를 주었죠.

카키미: 헤에, 그거 금시초문이군. 그런 일이 있었나.

키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몰래 펼쳐보고, 제 가슴은 마구 뛰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죠. 「앞으로 일주일이 위험합니다. 모리 씨가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리 씨에게는 알1리지 마시고, 어떻게든 모리 씨를 살릴 방법을 생각해 주십시오.」

카키미: (몸을 내밀며) 흠. 흠.

키쿠: 물론 세상 분위기도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나으리께서도 신중한 분이시라 경찰의 호위도 만전이었고, 만약을 위해 이 침실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비밀 통로가 파여 있었습니다. 관저의 비밀 통로 공사를 한 자가 극비리에 이곳에도 불려 와 공사를 마쳤었지요.

리에: 뭐든 쓸모없는 건 없구나, 키쿠. 그게 전쟁 중에는 이상적인 방공호가 되었단다.

키쿠: 그래도 한밤중이 불안해서 저는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자, 이제부터가 말씀드리기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

모리: 뭐든 말해도 좋아. 무엇이든 말해도 돼.

키쿠: 만약 아들에게서 정보가 샜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아들 신상에 해가 미치고, 한편으로 나으리는 어떻게든 구출해 드려야 했습니다. 제가 몸을 바쳐 나으리를 구할 길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일어서서 모리에게 다가간다) 그렇지요, 나으리.

모리: 그 말대로야. 넌 훌륭한 여자다.

키쿠: 마님께서는 아시다시피, 사건 전해부터 긴 투병 생활을 시작하셔서 요양소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그 무렵부터 나으리께서는 종종 저를 희롱하시게 되었습니다.

모리: 그렇지. 그래.

키쿠: 그러는 사이 점점 노골적으로 말씀을 하시게 되었고, 소실로 삼으면 어떻겠냐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카키미: 헤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이거 참 놀랍군요. 우리 보이 동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한 셈이로군요. 각하께서도 참 손이 빠르셔서……

키쿠: 사건 2, 3일 전에 가벼운 감기로 이곳에 돌아오셨을 때, 제가 이것저것 간호를 해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신의 손을 잡고) 이런 식으로 제 손을 잡으셨지요. (일동 놀란다)

아사코: 솔직하군. 솔직해. 널 다시 보았다, 키쿠. 인간은 그래야 하는 법이지.

키쿠: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여기서 나으리의 마음에 응하여, 매일 밤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 외에 내가 여자의 힘으로 도와드릴 길은 없다고. ……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끄러운 듯이. 그랬지요, 나으리. 작은 목소리로, 부끄러운 듯이.

토요코: (시게타카에게) 아버지를 둘러싼 건 권총이나 기관총만이 아니었네.

시게타카: (토요코에게) 가만히 있어. 저 여자는 봐줄 생각이 없는 거야.

키쿠: 드디어 그날 밤이 되었습니다. 쇼와 11년 10월 13일 그날 밤이. ……(토요코에게) 아가씨, 아가씨는 아직 열세 살이셨습니다. (시게타카에게) 시게타카 도련님은 열아홉이셨죠. 쇼이치보다 두 살 아래셨으니까요. ……아직 그 나이에는,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훨씬 젊고 생기가 넘치셨죠. ……그 사건이 번개처럼 푸른 빛을 이 가족에게 던져 넣었습니다. ……그날 밤, 분명히 말씀드리죠. 저는 나으리의 아내였습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겠죠, 나으리. 그날 밤 저는 이 몸 하나로 당신에게 기쁨을 주고, 이 몸 하나로 당신의 목숨을 구하려 한 완전무결한 아내였습니다.

모리: 지금 네게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16년 전 어느 밤의 번개 이야기니까. ……밖은 고요했지. 오늘 밤과 같은 달밤이었다. 너는 벌거벗은 채 고개를 들고, 어째선지 표범처럼 문밖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

키쿠: 『빨리! 빨리 도망치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맡겠습니다.』

모리: 나는 그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너는 다짜고짜 나를 재촉했지. 침실에 있는 채로, 진작 네가 챙겨둔 양복과 코트, 구두가 든 가방을 안고, 나는 비밀 통로의 비밀 문을 밀었다. 왜냐하면, 네 눈에는 저항할 수 없는 강한 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 문 앞에서 나는 뒤돌아보았다. 너는 아직 벌거벗은 채였다. 침실의 어스름한 빛에 비친 네 알몸은 위엄이 있었고, 옷을 입은 네게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위엄이 있었다.

키쿠: 『빨리! 안녕히! 다시는 살아서 뵙지 못할지도 모릅니다』――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비밀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자, 저는 안심한 나머지 기절하듯 침대 위로 벌렁 누워 쓰러졌습니다.

리에: 우리는 그 무렵엔 이 집에 없었으니까 나중에 이야기만 들었지만, 자주 듣다 보니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사코: 정말 그러네.

후사코: 시게타카나 토요코도 위험했다고 하니까.

시게타카: 군인들은 집 안을 뒤지고 내 방이나 토요코의 방도 들이닥쳤어. 나는 토요코를 안고 있었지. 군인 한 명이 위협하려 했다. 상관이 이렇게 소리쳤기에, 나는 분노에 휩싸였던 걸 기억해. 『여자나 아이에게는 손대지 마라!』 라고.

카키미: 참으로, 큰일이었군요.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키쿠: 눈 깜짝할 새의 습격이었죠. 홍수가 날 때가 그렇다고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발이 젖어 있었어요. 나으리께서 비밀 통로로 도망치셨을 때는, 이미 문지기 경관은 살해당한 뒤였지요. ……벌거벗은 채 눈을 감고, 저는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제 살갗 위로, 무서운 사건을 새기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발끝이 기어 올라오기까지의 그 기나긴 시간이!

토요코: (독백하듯) 그래요. 첫날밤, 남자를 기다릴 때처럼.

키쿠: ……하지만 갑자기, 문이 무서운 힘으로 좌우로 열렸습니다. 군인들이 흙발로 떼 지어 들어와, 침대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뭐야, 이건』 하고 한 명이 외쳤습니다. 『부인인가?』 하고 다른 한 명이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보, 이런 여자가 부인일 리가 있나! 부인은 진작에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렇게 말한 군인에게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 것 같습니까? 나으리를 피신시킬 시간을 벌고, 긴장한 자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마음속은 분노와 비참함으로 들끓으면서도, 저는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평생 그렇게 괴로운 미소를 두 번 다시 지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도 알몸으로, 사내들의 시선에 몸을 내맡긴 채!

아사코: 대단하구나. 너는 훌륭했어.

키쿠: 제 미소를 받은 군인은 젊어서 그런지 곧바로 눈을 피했습니다. 다른 군인이 제 알몸에 손을 뻗으려다 상관에게 저지당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욕설이 제게 쏟아지고, ……

모리: 상관은 도망친 내 뒤를 쫓으라며 병사들에게 집 안 수색을 명령했겠군.

키쿠: 그렇습니다. 다행히 비밀 문은 눈에 띄지 않았고, 군인들은 다른 방을 향해 밀려들며, 우르르 침실을 빠져나가면서 한 명씩 욕설을 남겼습니다. 『이게 대신의 첩인가』 『파렴치한 년』 『암퇘지』 ……그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그뿐만 아니라 한 명이 제 몸에 침을 뱉고, 다음 사람이 그걸 따라 하고, 세 번째 사람이…… 아아! (운다)

카키미: 왜 그래. 키쿠 씨, 도대체……

키쿠: (울면서) 세 번째 사람의 얼굴이 멈춰 서서 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게 쇼이치였어요.

(일동 암연)

(잠시 후) 쇼이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픈 얼굴로 벌거벗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서 아들의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고, 또 그럴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쇼이치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앞선 군인을 따라 제 몸에 침을 뱉고는 가버렸습니다. ……영원히 가버렸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벌거벗은 잠자리에 침을 뱉고. ……그리고 다음 날, 쇼이치는 自殺했습니다.

(일동 침묵. ――오랜 시간동안)

키쿠: 그 후 며칠간 그 혼란 속에서 나으리께서 하신 일은 참으로 훌륭하셨지요.

모리: 나는 재빠르게 처리했지. 네가 잘 아는 대로다.

키쿠: 쇼이치의 自殺을 알게 된 건, 2, 3일 후였습니다. 반란군으로부터 유해가 인도되어……

모리: 너와 유해가 대면할 기회를 내가 최선의 노력으로 만들어 주었지.

키쿠: 나으리께서는 줄타기라도 하셨겠지요, 그 날렵하심이라면. 사람이 자신의 슬픔에, 자신의 고통에 채 깨닫기도 전에 얼른 수술을 끝내버리는 메스 솜씨.

모리: 나는 네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네 아들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평생 아들의 묘를 지킬 수 있도록 네게 거액의 돈을 주고, ……그리고 너를 바로 고향으로 돌려보내 평생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시켰다. ……알고 있다. 너의 원망과 한탄은 알고 있어. 날이 갈수록, 달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더욱 욱신거리는 그 원한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그때 내가 한 일은, 내가 특별히 냉혹하고 무참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 아닌 그 누구라도, 그 입장에 있었다면, 그 지위에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일이다. ……뭐,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너의 명예도 지켜진 것이다. 네 침대 위 벌거벗은 모습을 쓴 신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신문들은 모두 예의가 바르더군. ……그리고 목격자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청년 장교들은 사형을 당했고, 군인들은 전선으로 보내져 전사하도록 처리되었다. ……역사는 이미 쓰였다. 안 그런가? 그렇지? 이제 아무도 역사를 다시 쓸 수는 없어. 말하자면 너는 시기를 놓친 10일의 국화(十日の菊)가 된 셈이지.

키쿠: 정말 그럴까요, 나으리.

모리: 정말 그렇냐, 라니?

키쿠: 아니요, 나으리 말씀대로 역사는 다시 쓸 수 없는 것일까요? 설령 다시 쓰지 못한다 해도, 그때의 틈새를 나중에 꿰매어 메울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저, 시골 마을에서 지난 16년간 조그만 담배 가게를 하면서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요.

모리: 나도 가끔 정원에 나가면 뒷산 방향이 마침 네 고향 쪽이라, 그 방향에 떠오르는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조그만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양의 구름이 나타나곤 하지. 저건 키쿠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본 적이 있다.

키쿠: 그렇습니다요.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를 처음부터 다시 고쳐 해본다면……

시게타카: 그러려면 반란군이 있어야 하지. 어떻게든 카키색 군복과 먼지투성이 장화, 소총과 기관총과 권총 더미가 있어야 해. 누가 그 역할을 할 건가.

카키미: 자자, 키쿠 씨도 그만 악몽에 시달린 듯한 소리는 그만하고, 오늘 밤은 특별히 비장의 병을 한 병 더 따서 건배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손에는 이미 다음 적포도주 병을 들고 있다) ……각하, 어떠신지요. 참으로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오늘 밤은 키쿠 씨를 일가의 큰 은인, 각하의 생명의 은인 자격으로, 여러분이 함께 감사의 잔을 올리시는 것이.

모리: 그거 좋은 생각이군.

카키미: 서로 기분 좋게, 기세 좋게 건배합시다. (각자의 잔에 따르며) 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라는 의미에서 각하께서 건배 제의를 하나.

모리: (일어서며) 자, 모두 키쿠와 죽은 쇼이치 군에게 감사의 잔을 올리자꾸나. 키쿠, 정말 고맙다.

일동: 키쿠 씨, 정말 고맙습니다.

키쿠: (안심한 듯이) 감사합니다. (카키미에게) 카키미 씨, 미안하지만 저, 아주 조금밖에 안 마셨는데 너무 긴장해서 이야기를 한 탓인지 왠지 기분이……

카키미: 그것참 안 됐군. 각하, 별실에서 쉬게 해도 되겠습니까?

모리: 그리하게. 그리하게. 오늘 밤은 묵고 가면 돼. 지금 도쿄로 돌아간들 어쩌겠나.

리에: 그게 좋겠어. 오라버니가 저리 말씀하시니까. 카키미, 잠자리도 잘 마련해 주고.

카키미: 자, 그게 좋겠소. 모처럼 저렇게 말씀해 주시니.

키쿠: 그럼 말씀에 기대어 신세 지겠습니다. 갑자기 찾아뵌 데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여드려서.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카키미의 부축을 받으며 오른쪽 무대로 퇴장)


5장 (주신・시게타카・토요코・아사코・리에・후사코)

리에: (고개를 숙이며) 오라버니, 고생 많으셨어요.

모리: 뭐냐. 그거 비꼬는 거냐?

후사코: (단정적으로) 돈이겠죠. 저는 돈일 거라고 생각해요.

아사코: 그건 사람을 모욕하는 거지. 너한테라면 몰라도.

후사코: 큰형님, 그게 무슨 뜻이신지요.

모리: 자자, 그만들 하지.

리에: 저는 말이죠,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라버니의 후처로 들어앉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요.

아사코: 주신도 대단한 미남이시네. 69세나 되어서.

모리: 누님, 실없는 농담은 그만두시지요.

후사코: 큰형님은 또 뭐라 하시겠지만, 전 역시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라버니가 준 돈이 그 당시야 거액이었겠지만, 전후의 신엔(新圓) 교환이니 뭐니 해서 진작에 바닥났을 게 뻔하니까요. 저를 보세요, 저를. ……여러분은 좋으시죠. 어쨌든 친형제 댁에 굴러들어와 계시니까. ……하지만 저는 돌아가신 여주인의 여동생이라는 연줄로 이렇게 형부의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인걸요. 남편 유산은 죄다 신엔 교환이랑 재산세로 날려버렸고, 여기 형부처럼 땅을 많이 갖고 계시다면야 다르겠지만, 전 정말 빈털터리가 되었는걸요. 남편은 바보였어요, 평생 은행에만 다녔으면서 은행을 신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아사코: 하지만 키쿠는 지금도 미인이네. 돈이 없어도 저렇게 젊어 보이면 말이야.

리에: 그야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알 수 없지요. 아들 운운하고는 있지만……

토요코: (폭발하듯) 고모님들 생각은 추잡해요! 추잡하다고요! 저, 이제 참을 수가 없어요.

아사코: 과연 토요코로구나. 훌륭해.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