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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랭한 인내로 건네는 풋사과, 단요가 말하는 '좋은 어른'의 윤리

 

단요 작가는 그간 여러 저작을 통해 일관된 문제의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왔다. 그의 작품에는 종종 사고로 인해 감각의 회로가 평범한 이들과 달라졌거나, 신체적·정신적 경계 위에 서 있는 지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매혹과 병폐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신학적 질문을 던지며, 때로는 통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단순히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보통’의 범주에서 비껴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성정체성이나 감정의 작동 방식, 혹은 신체적 조건 때문에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는 청소년들에게 이 소설은 하나의 실존적 거울이 된다. 작가 자신이 통과해온 고민의 흔적은 독자에게 특정한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 세계 어딘가에 또 존재한다”는 감각을 전하며, 각자의 세계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여지를 만들어준다.

따라서 이 책을 ‘교육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흔히 쓰이는 수사적 표현처럼 도덕적 훈계를 늘어놓거나 매끈한 교훈을 설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교육의 실천에 가깝다. 성인의 시선에서 읽을 때 이 소설은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좋은 어른의 조건을 다정함과 따뜻함이라는 수식어에서 찾지만, 작가는 그러한 태도가 언제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때로는 쉽게 건네는 위로나 온기가 상대의 문제를 대신 떠안는 방식으로 작동하여 자립을 방해하거나, 결국 베푸는 이의 자기만족이라는 수사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수하고 방황하는 타인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그를 즉시 끌어올리려는 조급한 연민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힘이 생길 때까지 곁을 지키는 지독한 인내다. 상대를 대신 움직여주는 '교육적'인 척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시간을 허락하는 것. 소설은 바로 이러한 기다림이 타인을 돕는 가장 정직한 교육의 방식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기분보다 원칙을, 감정보다 성찰을 앞세우는 화자의 시선 속에서 구체화된다. 소설 속 화자는 장례식장에서 실제로 슬픔을 느끼지 않더라도 예의를 갖추어 함께 울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감정을 가장하는 위선이 아니라,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족한 감정을 성찰과 의지로 보완하려는 시도다. 여기서 작가는 감정의 순수함보다 타인에게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소설이 말하는 교육이란 매끈한 정답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산산조각 난 세계를 살아가는 고독”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마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고, 때로는 ‘잘 읽히는 오역’과 ‘원문에 충실한 직역’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과정을 서둘러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의 파편을 꿰맞추어 가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자신의 뒷마당에 자라는 풋사과를 따서 시장에 내놓겠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여긴 웬디스예요”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 거칠고 덜 익은 맛이 필요한 사람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단요의 문장은 바로 그런 태도를 보여준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이야기나 모범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기보다, 조금 비틀리고 마모된 상태로도 사람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한다. 우리는 완벽한 감정을 지니지 못했더라도 건실한 직업인이 될 수 있고, 누군가의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 역시 거창한 구1원이나 뜨거운 위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풋사과’를 끝내 익혀낼 때까지 곁에 남아 있는 태도라는 것을 이 소설은 묵묵히 증명해낸다. 그리고 나는 조금 설득당했다.


best 구절3


"다시 말하지만 나는 누가 불쌍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은 잘 모른다. 전혀 몰라. 하지만 네가 좋아지길 바란다는 것만큼은 진심이고,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이고, 중요한 건 내가 뭘 느끼느냐, 뭐가 진짜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뭘 해줄 수 있느냐, 내 능력이 어디까지 닿느냐 하는 거야. 본질이니 진정성이니 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부차적인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감정이 사라진 것 그 자체로 잘못이라 보는 건, 뭐라고나 할까, 휴대폰에 특정 부품이 없다고 불평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냐. 부품이랑 기능은 별개야."(186-190p)


하지만 내가 아는 바 내면에 대한 진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분석적인 문장들과 펄떡거리는 세계 사이에서 스스로의 팔 힘으로 건져 올리는 것이다. 백과사전이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산들바람을 맞는 느낌을 알려줄 수 없고, 반대로 나무에 올라타는 경험이 그 나무의 생육을 알려주지 않듯이. 그런데 두 갈래의 이해는 세계를 각자의 렌즈로 저며놓은 결과물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온전한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진다. 진단 기준에 쓰인 낱말들은 내 느낌으로부터 너무 멀다고 주장하다가, 그 느낌을 표현할 최선의 방편이 바로 그 낱말들이었음을 깨닫는 시점이 있는 것이다.

버베나 향기라는 단어에는 어떤 냄새도 없지만, 버베나 꽃향기를 가리키려면 그런 단어라도 필요하다. 동시에 버베나 꽃이 아무리 향긋하더라고 내 코는 막힐 수 있으며, 식물학 교과서에는 꽃사과나무가 5미터가량으로 작게 자라는 교목이라 쓰여 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그 5미터가 세상 무엇보다 커 보일 수 있다. 그 각각은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 자그마한 교목 둘레를 서성이는 중이고, 그걸 뛰어넘을 엄두를 내지 않음으로써만 겨우 평안해졌다.(209-210p)


그때 딱 한 번 맞은 뺨이 화상처럼 홧홧했다.

작은이가 그 후로도 계속 나를 때렸더라도 나는 이서를 손찌검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건우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뿐이었다.

그러니까·····.

작은이는 그 뺨 한 대로 자신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내게 손대지 않은 것이 철저한 인내의 산물이었음을 알려주었다. 노인이 보여준 그 인내가 나 역시 인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상담사들이 뭐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로 나한테 도움이 됐다. 정확히 나처럼은 아니더라도 나만큼이나 망가진 사람이 있음을, 그 사람이 무언가를 이겨냈음을 알게 되는 것.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흠결 가득하기 때문에 도리어 가치 있는 모본을 발견하는 것. 나는 부뚜막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숨을 씨근거렸다. 그러고는 내가 정말로 많은 것들을 이겨냈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사고를 겼었지만 죽지 않았고, 시골에 처박혀 장애인이 되었지만 혼자 대학에 갔고, 취업 길이 절반쯤 막힌 상태로 밥벌이를 찾았으며, 믿고 따랐던 여자 친구가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했을 때도 충성을 바쳤다. 충성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며 종종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엔 잘되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으면서 나를 이겼다. 그러니까 건우 문제도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건우도 나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378-3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