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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6권은 5권 말미에서 시작된 형상 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구간입니다. 사물을 봄, 사물의 보여짐, 더 나아가 존재의 힘; 이는 전부 태양이 빛을 발할 때 가능해지므로, 각각의 형상(또는 이데아)을 지성으로 인식하고,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능력을 부여하는 형상으로서, 존재의 근원이 되는 ‘좋음‘을 제시합니다. 더 나아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인식의 네 단계를 제시하며 점차 인식의 수준이 상승해가는 것을 선분으로 비유합니다. 6권은 플라톤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인 철학의 방법론(선분의 비유)이 등장하는 중요한 구간이고, 논의가 어려우므로, 이 구간이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7권으로 진도를 나가시기를 권장합니다. 6권에서 인식의 기초를 다지지 못하면 후기 플라톤의 형상 이론으로 나가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1.서광사의 박종현 선생님 판본을 읽고 요약한 내용입니다.
2.부족한 제 실력 탓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용으로만 봐주세요.
3.원전을 읽어보시고 직접 논의를 따라가시길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본문>
1. 진정한 철학자의 성품과 통치자의 자격
5권에서 탐구한 결과 철학자의 본질(ousia)은 실재(to on)를 인식하여 얻은 앎(episteme)을 가진 사람이란 결론을 얻었다. 이것을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가 가진 특징을 이야기했다.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배움을 좋아하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며, 거짓을 멀리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며 사치를 멀리할 것이다. 학문에 대한 욕구에서 온갖 종류의 즐거움을 느끼므로 저속하고 세속적인 즐거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는 온순한 성격을 갖고, 배움에 능숙할 것이다. 철학자가 가진 이런 성품은 그 자체로 능숙한 통치자의 면모를 보일 것이다.
2. 철학자가 쓸모없어 보이는 이유: 선장의 비유와 소피스테스
아데이만토스는 철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탐구하다가 사회적으로 무능해지거나 나빠진다는 것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에 대해 그런 의견이 생기는 이유를 밝혔다. 우선, 사람들은 철학자가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이고 기술(techne)도 지식이란 것을 알지 못해서, 통치술을 기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각자의 의견(doxa)만 고집하며 반대편을 축출하려는 선동의 행위를 하는 것을 언급했다. 이를 설명하며 눈과 귀가 어두운 선장의 자리를 탐하며 스스로 항해술을 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 큰 선원들을 예로 들었다.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을 가진 자, 즉 철학자를 찾아서 도움을 청하지 않아 철학자가 쓸모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성향에 있어 철학자는 일반인과 다른 사람이기에 진정한 철학자의 자질을 갖지 못한 사람이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철학자를 흉내내면 나쁘게 되기 쉽다고 했다. 성품에 있어서 철학자 고유의 성품(앎을 추구하고 기개로 본능을 절제하는)이 타락하면 나쁘게 되기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인으로 소피스테스를 꼽았다. 소피스테스는 진정한 앎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주제를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통솔하는 행위에만 관심을 갖는 자들이었고, 이런 대중의 흥미와 다른 것을 추구하거나 관심을 갖는 시민을 배척했다. 결국 이들은 대중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지혜’라고 부르며 아첨했고, 이로 인해 대중은 진정한 철학적 가치를 비웃게 되었다. 만약 철학자의 성향을 타고난 데다가 잘 생기고 부유하면 대중은 그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기대해서 타락하게 만들어 진정한 철학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회 풍조에 환멸감을 느낀 소수만 남은 철학자들은 해결책을 찾아 정면에서 맞서기 보다는 마치 폭풍우를 피해 숨어있는 사람처럼 자기 혼자서만 지혜를 추구하는 것으로 타협해 은둔할 것이다. 철학자의 은둔과 지혜를 비웃는 사회 풍조가 철학자를 쓸모없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3. 가장 중요한 배움: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
소크라테스는 현실의 정치 체제가 철학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며, 이 때문에 철학적 성향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왜곡된다고 말했다. 철학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청년기가 되기까지는 교육에 힘쓰고 청년기 이후부터 혼의 단련을 시작해 삶을 충분히 경험한 이후에 중년기부터 철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학자의 실재를 인식하여 지혜를 추구하는 성향을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서 사람의 본성을 지혜롭게 만드는 정화의 작업을 한 뒤에 법률이 기초할 것이고 철학자의 정치 체제가 그려질 것이다. 이것은 이루기 어렵지만 최고 통치자에게 철학자의 자손이 태어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의 온순하고 차분한 성향이 체육으로 길러진 활발함과 상충할 수 있고, 변화에 더디게 반응할 수 있다. 따라서 괴로움과 욕망으로 온갖 시험들을 받게 해야 하며 여러 학문적 가르침도 받아야 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를 배우는 것이다. 좋음을 모르는 채로는 다른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이 때문에 무엇이 진정 좋은 것인지에 대한 의견(doxa)만 가질 수 있으며 앎(episteme)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음의 이데아와 다른 이데아, 그리고 이를 관측하는 방법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를 들었다. 태양이 각각 사물들에 빛을 비춰서 사람의 시각은 보는 힘을 얻고, 사물들은 보이는 힘을 얻어 존재의 힘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과 같이 균등하게 빛을 발하고, 사람의 지성은 이데아를 보는 힘을, 이데아는 보이는 힘을 얻어 본질의 근원이 된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물들 각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태양에 의해 빛을 받을 때 비로소 무엇인지 알 수 있듯이, 좋음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이데아들 각각이 무엇인지 의견(doxa)만 가질 수 있지만, 좋음에 의해 이데아를 지성(nous)으로 알 수 있게 된다.
4. 인식의 지도: 선분의 비유와 변증술적 도약
감각의 것들(ta aistheta)과 지성의 것들(ta noeta)을 구분하며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를 사용했다. 감각에 의한 것과 지성에 의한 것에 각각 A와 B의 선을 긋고 그 사이에 둘을 구분하는 C의 선을 긋는다. 감각에 의한 것(AC), 지성에 의한 것(CB) 사이에 각각 존재론적•인식론적 근거를 구분하는 선(D, E)을 각각 긋는다. 감각에 의한 것에서 하위의 것은 A: 그림자, 상(영상, 모상), 또는 상상(짐작, eikasia)이고, 상위의 것은 DC: 실물들(생물, 인공물) 또는 확신(믿음, pistis)이다. 지성에 의한 것에서 하위의 것은 CE: 수학적인 것들(도형, 선, 숫자) 또는 추론적 사고(dianoia)이고, 상위의 것은 B: 이데아 또는 지성에 의한 앎(인식, noesis, episteme)이다. 그림자(A)는 실물(DC)을 감각적으로 반영하며, 수학적인 것(CE)은 이데아(B)를 지성적으로 반영한다. 즉 A:DC=CE:B의 관계가 성립하며, 상상(eikasia)-믿음(pistis)-추론적 사고(dianoia)-지성에 의한 앎(noesis)의 인식 단계를 형성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림자는 실물의 하위 단계에 종속되고 수학적인 것은 이데아의 하위 단계에 종속된다. 그런데 수학적인 것들을 이미 명백한 것(직관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데아를 탐구하려고 하면, 마치 그림자(또는 상상, eikasia)를 통해 실물(또는 믿음, pistis)을 탐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본질을 실물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림자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도형들(수학적인 것) 또한 결국 이데아를 ‘닮은 것(의견)’이므로, 허상을 통해 본질을 탐구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추론적 사고(dianoia)’이지 ‘지성을 통한 사고(noesis)'가 아니다. 이는 혼이 가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위의 닮음을 빌려서 상위를 인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수학적인 것(추론적 사고, dianoia)으로 이데아(또는 지성의 것, idea, noesis, episteme)를 보려고 하는 것이며, 그림자(또는 상상, eikasia)로 실물(또는 믿음, pistis)을 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지성에 의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가정의 원리로 가정을 아래에 그대로 둔 채 변증술적 논변(dialektike)의 힘으로 감각을 배제한 채 형상(또는 이데아, eidos / idea)만으로 결론(종결)을 향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가정에서 시작해 원리를 탐구하는 학술적인(추론적인) 사고는 의견과 앎 사이 단계이기에 진정한 지성(noesis)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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