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 (저자 서문)
이제야 겨우 서곡만 완성된 이 작품에 대해, 그 의도를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이 비현실적인 장소를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단 언급해 두고 싶다. 책을 펴자마자 서두에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영구운동 시계탑을 내건 것은 nowhere, nobody의 장소에서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작은 실험실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이 작품이 단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현실―― 이 단어는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나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하다. 그곳은 허망과 진실이 혼돈스럽게 하나로 얽힌 좁고도 바닥을 알 수 없는 잿빛 영역이며, 엄밀히 말하자면, 세계상의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가려는 시도가 한 발을 내디디려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 있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꿈과 각성 사이에 가로놓인 폭 좁은 지점이다. 나는 그런 지점을 사랑한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런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디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초조해한다. 나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디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한 발을 내디뎌야만 한다.


내게는 일종의 비뚤어진 논리벽이 있다. 가슴을 치는 하나의 감명보다 사고를 자극하는 하나의 발상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성벽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차가운 추상명사로 보인다. 물론, 거기서부터 우주의 끝까지 퍼져나갈 만큼 뛰어난 발상은 깊은 감동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수면에 떨어진 돌 하나가 점차 퍼져나가는 무수한 파문을 그려내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능하면 하나의 거대한 단음, 하나의 응집체, 하나의 발상만을 추구한다. 만약 이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퍼질 수 없는 하나의 단어로 결정(結晶)되고, 게다가 그 한 단어를 단호하게 외칠 수 있다면―― 그 말라르메적인 소망이 단 한 순간이라도 내게 채워질 수 있다면, 이런 지루하고 긴 작품 따위는 헛되이 계속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 한 단어만을 구한다. 하지만, 아마도 그 출발점이 잘못되어 있는 내게 그 하나의 단어, 그 하나의 우주적 결정체는 항상 머리카락 한 올 차이 너머로 달아나는 그림자이다. 가공의 한 점이다. 마침내 숨이 차서 몸을 우뚝 멈춰 세우는 나는, 어느 때는 신음하듯 영탄하고, 또 어느 때는 한없이 초조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정리된 단어가 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때 가시 같은 감탄사가 되어 내게서 뛰쳐나온다. 즉, ach(아아)와 pfui(에잇)! 내게 있어 영혼으로부터 뛰쳐나오는 감정은 이 두 가지밖에 없으며, 오직 그것만을 나는 남용한다.


이러한 꺼림칙한 사태는, 물론, 나 개인의 일그러진 능력에 기인함에 틀림없다. 동시에, 거기에는 우리가 처한 불행한 위치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대심문관』을 읽을 때 내가 피부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황량한 장소이다. 이리저리 설파하며 현하(懸河)와 같이 변증하는 대심문관에 대해 그리스도는 끝까지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는다. Dixi(설교를 마쳤다)라는 말이 내뱉어졌을 때, 그리스도는 처음으로 오랜 세월의 서리가 내린 듯한 대심문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위대한 우수에 휩싸인 대심문관의 영혼이 그때 뇌격을 맞은 것처럼 진감(震撼)한다. 그 영혼은 확실히 진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무언의 입맞춤 속에는 명상과 순교와 유혈로 쌓아 올려진 수천 년의 역사가 결정(結晶)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대심문관』 작가의 고뇌가 아무리 깊고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우리와 비교하여 훨씬 강렬하게 행복하게도) 팔을 내리치면 쨍 하고 부딪쳐 튕겨 나오는 수천 년의 견고한 실체 위에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만약 우리들이 하나의 바닥 모를 무게감을 지니고 계속 침묵하는 그리스도를 그린다고 한다면, 그 작품 속에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올려진 역사마저도 창조해 내 보여야만 한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거대하고 폭넓은 인류사 속에 던져진 한 마리의 가련한 미물처럼 데모크리토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짐들 사이를 쫄쫄거리며 갉아먹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하나의 짐에서 넝마조각을 끌어내듯 황급히 내달려, 한 줌의 단편만을 입에 물고 춤추었던 우리는 아직도 그 하나하나의 맛을 상세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찮은 소크라테스인 동시에 하찮은 소피스트의 무리이며, 한순간 합리적이고 또 한순간 비합리적이며―― 요컨대 단순 소박한 대혼란(てんやわんや)인 것이어서, 일관된 논리적 사고의 지속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신의 위치이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엄연하고 확고한 실체 위에 입각해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바람 같은 기분에만 맡기는 단순한 대혼란의 무리라면, 거기에는 또 불행한 사태도 행복한 경지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불행은, 우리가 그 발상을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는 대혼란의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일정한 수용 능력이 갖춰져 있다는 그 한 점에 있다. 대심문관의 논증을 스스로 구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우수는 피부로 감득된다―― 이것이 우리를 미래로 끌고 가는 불행이다.


그것은 앞으로 끌고 가는 불행이다. 고난의 미래로 발을 내디뎌야만 하는 불행이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손발을 기어이 움직여야만 하는 불행이다. 나 개인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대심문관』의 작가로부터, 문학이 하나의 형이상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에게 노려보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의 가혹한 눈빛을 느낀다. 끊임없는 그의 감시를 나는 느낀다. 그저 그 작품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책임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한 걸음을 그럼에도 내디뎌야만 한다는 것은. 나는 마침내 적어도 하나의 관념 소설이라도 날조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그러나, 그 무모한 시도가 얼마나 파리하고 약한(羸弱) 것인가. 예를 들어, 내가 이 작품 속에서 다룬 《허체(虚体)》라는 어리석은 관념을 꺼내보아도 좋다. 이 단 한 단어에 도달하기 위해, 내게는 나름의 고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그 단어가 백지 위에 적히고 나면, 그것은 다른 여러 관념 속에 거품처럼 사라져버려 더 이상 흔적조차 없다. 미풍 속에 흔들리는 한 그루의 고사목만큼의 지속적인 표현력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무게감 없는 관념의 무름(취약함)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그 무르고 부서진 장소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이러한 황량한 장소에 놓였을 때 선인들이 어떠한 방법을 취했는가를 보았을 때, 내게는 하나의 자세가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 어떤 것은 그곳에서 지상에 밀착하는 선태식물(이끼)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어떤 것은 처음부터 고사의 의태(擬態)를 취하고 서 있었다. 의태―― 그렇다. 특수한 풍토 속에 어쨌든 한 그루의 나무줄기를 뻗은 형태로 서 있는 그 자세에 의태라는 명칭을 붙여도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죽은 시늉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었던 그들의 정신에 깊은 흥미를 느꼈을 뿐만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러한 자세에 친근성만을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유감스러운 친근성이었다. 왜냐하면 베이컨에 의해 이미 수 세기 전에 격파된 동굴의 우상이 여전히 우리들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나는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또 동시에, 그럴듯하게 죽은 척해 보이는 은신술(隠れ蓑)을 나 자신 설령 신의 눈을 속여서라도 고안해 내야 한다는 자포자기적인 충동을 느꼈다는 것과도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그 유감스러운 자포자기적 심정의 분석에는 여기서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내가 굳이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 결말의 자세뿐이다. 그 결과, 내가 취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이었다. 즉, 극단화와 애매화와 신비화――.


앞서 서술했듯 나에게는 일종의 비뚤어진 논리벽이 있다. 적어도 철저해질 수 있는 데까지는 파고들고 싶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얼버무려서라도 빠져나가고 싶다. 얼버무린 것이 간파당하더라도 어떻게든 잿빛 베일을 씌워두어라. 이상이 나를 지탱하고 있는 체계이다. 이런 미덥지 못한 중세의 주술적 방정식에 따라 어찌 됐든 나만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자세였다. 명석함과 엄밀함―― 아직 내 정신을 장식하고 있지 않은 그 협화음을 갈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경우, 뒤에 나열된 두 가지 방법은 말하자면 비교적 단순한 의태법이어서 거의 설명이 필요 없다. 즉, 작품 속 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als ob(마치 ~인 것처럼)의 남용, 반복의 남용, 어느 기간까지의 심리 묘사 생략, 탐정 소설적 구성 등등이다. 그러나, 첫 번째로 거론된 극단화의 방법에 대해서는, 비현실의 장소를 이 작품이 출발하는 장소라고 말한 이상 그 대요를 설명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고는 본래 사물의 근원과 극한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더듬어 가는 것이므로, 굳이 극단화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사고 본연의 길을 그대로 더듬어 가면, 종종 이른바 사고 실험의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리라. 나의 은밀한 소망은 그러한 실험을 여기서 행하고 싶다는 것 하나에만 걸려 있다. 그러나, 비뚤어지고 하찮은 논리벽밖에 갖지 못한 나는 그저 나만의 극단화 원칙을 일그러진 형태로 관철할 뿐이다. 종종 내가 행하는 그것은, 만약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망상 실험(ヴアーソ・エキスペリメント)의 영역에 속한다고 규정해도 좋을 부류의 것이다.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어리석고 무력한 실험 수행 때문이야말로 비현실의 장소에서 나는 출발해야만 했던 것이다.


일찍이 자이나교(耆那教)의 성전에 접했을 때, 내게는 하나의 기묘한 비전이 떠올랐다. 자이나교란 인도 예로부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계율이 엄격한 한 교단으로, 일찍이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사실 등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법칙에 따라 그 소박한 교의를 내 나름의 영역까지 극단화해 본 것이다. 그때 떠오른 비전이란 이러하다. 그 교단은 그 무렵 아사(餓死) 교단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입는 것, 마시는 것, 먹는 것은커녕 호흡조차 그 신도들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단의 신도들이 모여 틀어박혀 있는 어느 높은 산에 오르다 보면, 그 도중의 여기저기에 미라화되거나 풍화된 사람들의 시체가 무수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당 교단의 시조인 대1웅(大雄)만은 깊고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서 그 명상적인 눈을 빛내며 살아 있었다. 보리수 아래서 석가모니가 정각을 얻고 무궁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문득 떠올린 것이 이 대1웅이다. (사실에 있어서 그들의 연대는 유감스럽게도 약간 어긋나 있어 그들은 서로 알지 못했지만, 나의 극단화 법칙은 여기서도 시간적, 공간적인 사실의 구속 따위는 무시한다.) 히말라야를 닮은 아름다운 흰 눈을 덮어쓴 그 높은 산에 다다른 석가모니는 깊고 어두운 동굴 속 대1웅의 앞까지 조용히 나아간다……. 이것이 내 비전의 출발점이다. 이 석가모니와 대1웅의 대화 장은 작중 인물이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 작품의 마지막 근처에 나타날 것이며, 이 작품 전체의 관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이 비현실의 장소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그 설정에는 등장인물들이 필름의 음화(네거티브)처럼 어둡게 처리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그러한 네거티브한 작중 인물들의 중심에 앉아 있는 것이 전(全)부정자 대1웅인 것이며, 그들은 그의 관념의 부분을 각각 짊어지고 걷고 있을 뿐이다.


자, 그렇다고 치고――.


우주의 끝에서 끝까지 울려 퍼지는 하나의 거대한 단음의 폭을 검증하는 것,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비전에 다름없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모든 선인들을 이끌고 걷게 한 하나의 광원에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영광스러운 용어가 너무나 어두운 나의 영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의 용어로 그것을 하나의 '가공 응시(架空凝視)'라고 이름 붙여도 좋은 것이다. 나의 영혼은, 광대한 진공의 한 점에 우뚝 멈춰 선다. 나는, 가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정신 체조, 나는 여기에 설정된 작은 실험실이 가지는 의미를 그 이상으로 예정하고 있지 않다. 거대한 사이클로트론이나 다이나모가 선회하는 현대에, 거창한 증류기나 플라스크를 어수선하게 늘어놓고 효과가 전혀 없는 낡아빠진 연금술에 착수한 이상, 그 밖에 덧붙일 만한 의미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본 권을 서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혼란스럽고 숨이 차오르는 능력을 가지고 어찌 됐든 세 개의 주도음(主導音)을 이곳에 두드렸다는 이유뿐이다. 제1에서 제3 주제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이 작품이 다루는 것은 5일간의 사건이지만, 지루하게 긴 스타일로 계속 쓰고 있기 때문에, 이 서곡을 끝내고서야 겨우 첫째 날 저녁에 도달했을 뿐이다. 철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뛰어다니고 싶어 하는 작중 인물들의 기척을 엿볼 때, 전도의 아득함에 다소 공황의 감정을 금할 수 없다.

(쇼와 23년(1948년) 10월 진선미사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