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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은 소설의 완성도에 대한 갑론을박은 차차하더라도, 한국 근대 소설의 효시로서 독보적 위치를 점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신소설과 3.1운동 이후 문학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데, 신소설(이해조 이인직 등)이 한국 문학이 달릴 길을 깔았다면, 이광수는 첫 스타트를 끊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물론 시 분야에서는 육당 최남선이 1907년에 먼저 달리긴 했으나 일단은 소설 분야에선 그를 최초로 봐도 좋을 듯 하다) 




때는 1920년대, 영어 교사 이형식은 신여성인 김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옛 은인의 딸 박영채가 무려 7년 만에 기생이 되어 나타나는데... 


즉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기에 정실 히로인은 누구인가?가 이 소설의 주 재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을 연재 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무려 100년이 지나 한 데로 묶은 것을 보고 있고, 이광수 씨가 신문화의 추종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히로인이 저절로 신여성인 선형으로 확정되었겠구나 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래도 갑자기 나타난 히로인에 약혼까지 한 사이인 영채가 초반엔 주 포커스를 받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둘의 약혼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은 의무에 의해 강제로 맺어졌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개인의 판단과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간의 정 또한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온 자유 연애여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이 영채를 만나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영채가 기생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채가 처녀인지 아닌지 골머리를 싸매는 장면이 초반에 자주 등장한다. 지금이야 이런 '유니콘' 같은 캐릭터성은 만화 갤러리의 유저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이 발간된 것이 1920년대 이전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형식의 캐릭터성은 나름 시대를 앞서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채가 옛날에 헤어졌던 순수한 처녀로 남아 있을지, 아님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한 기생 계월향으로 변해버렸을지가 이형식의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형식의 우려와 다르게 영채는 사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던 것이었고, 그를 위해 정조를 지키고 있었으나, 배 학감에게 겁탈당해 정조를 잃고 절망해 유서를 쓰고 살111자 하러 평양으로 떠난다. 그것을 본 형식은 평양에 도착하지만 정작 평양에 도착하니 기생 계향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계향과 갑자기 왜 어울리느냐 하면, 그것은 영채와의 관계가 전근대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남들이 맺어주는 것이 아닌 개인의 판단에 의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형식과 영채의 관계는—둘 사이 호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부모에 의해 맺어진, 전근대적 관계다. 즉 형식이 신시대의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이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일제가 들어오며 조선 왕조가 무너졌다. 그 시대의 문인들은 무너진 옛 질서에서 가치를 찾아내려 했는데, 대표적으로 새 시대를 열어갈 소년들에게 거는 기대를 담고 있는 육당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예로 들 수 있다. 비록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무너지긴 했으나, 역설적으로 서양에서 온 신문물을 접할 수 있게 되어 조선 시대의 전근대성에서 벗어나 새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육당을 비롯한 문인들은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형식이 영채를 멀리하는 것은 구시대의 관계를 '무정'하게 끊어내야만 새 시대를 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형식은 그 무덤 밑에 있는 불쌍한 은인의 썩다가 남은 뼈를 생각하고 슬퍼하기보다 그 썩어지는 살을 먹고 자란 무덤 위의 꽃을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였다.

그는 영채를 생각하였다. 영채의 시1111체가 대동강으로 둥둥 떠 나가는 모양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슬픈 생각이 없었고 곁에 섰는 계향을 보매 한량없는 기쁨을 깨달을 뿐이다. - 277


나는 내가 옳다 하던 것도 예로부터 그르다 하므로 또는 남들이 옳지 않다 하므로 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 보고 그것을 내버렸다. 이것이 잘못이로다. 나는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린 것이로다. -282



이것은 형식 뿐만이 아니라 영채에게도 적용되는 것인데, 영채가 형식을 찾아야 하는 것과 그를 위해 정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는 의문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으러 가는 영채는 기차에서 여인들과 만나 깨달음을 얻는데,



"사람은 제 목숨으로 삽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지아비가 어디 있겠어요. 허니깐 영채 씨의 과거사는 꿈입니다. 이제부터 참생활이 열리지요." -384



이 장면 또한 형식의 깨달음과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무정한 결단 후에 자신을 위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여학생이 장광설을 토하는데, 메세지를 넣기 위해 너무 작위적으로 쓰여진 부분 같다.


이후 구시대의 족쇄에서 벗어난 둘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파트에서 이 소설의 가장 많이 비판받는 부분인 '뜬금 메시지 주입'이 나온다.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 527



조선에 한바탕 물난리가 나는데, 형식과 영채 병욱 등 깨어난 개개인이 연합해 구호 작업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으로 형식과 영채간의 사적 감정은 공적 감정을 통해 해소된다.

즉 이광수는 개인의 계몽이 단순 개인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연대까지도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며 끝난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 -537




평론가 김우창은 <한국 현대 소설의 형성>에서 <무정> 결말부의 근대화 이념 제시를 '역사상 가장 기이한 현상의 하나'로 평가했다. 이광수는 조선이 식민지 통치 하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땐 이광수가 그걸 잊어버린 것은 아닌 것 같고, 나름의 희망과 기대를 품어 이런 결말을 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또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 '정'이 남녀 관계 사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선 같은 성별간의 정 또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영채와 같은 기생인 월화와의 관계가 있는데, 둘은 단순 친구이자 같은 운명을 지닌 그런 이해자 이상의 그런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둘의 유사성행위가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채가 깨달음을 얻는 것도 일본인 부인과 여성인 병욱에 의해서다. 병욱은 아예 엔딩에서 같이 유학을 떠나는 사이가 된다.

그런가 하면 형식 또한 은희경이라는 남학생에게 일종의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서술이 등장한다. 

이광수의 데뷔작 <사랑인가>가 일본인 남학생을 짝사랑하는 조선인 남학생을 주제로 하는 퀴어 소설임을 생각하면 무정 안에 들어있는 퀴어성도 나름 주목할 만한 요소인 듯 하다.



총평하자면 왜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였는지 알 것 같다. 잘 읽힌다는 것이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이다. 이는 <무정>의 스토리가 우리가 흔히 보아 왔던 삼각관계 스토리라는 것도 있겠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비판적으로 말하자면 특색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문체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그 이유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서두에서 말했듯이, <무정>은 한국 현대 소설의 형성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에, 이 소설을 마냥 폄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광수는 이 작품 말고도 다른 작품도 읽어볼 예정이다. 특히 <흙>이 상당히 기대되는데, 최인훈을 매료하고 이문구가 소설가가 되게끔 한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독붕이들이 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정> 이후 춘원의 다른 소설에 대한 나름의 기대를 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