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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가루들을 쏟았는데 그것들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정렬되어 있는 걸 봤을 때 나오는 반응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그게 가루들 전체에 있어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이들과, 그 어떤 종류의 목적도 그보다 더 미시적인 움직임들의 결합으로 분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 사실 더 재밌는 것은 과학계에서 이 두 생각을 주제에 따라 혼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모든 생물학적 집단의 변화를 유전자 단위의 보존과 증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리처드 도킨스가 정작 그 집단의 변화에는 거시적으로 복잡성을 향한 추동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미시 과정의 철저한 우연성을 믿는 동시에, 거시 과정에서는 목적론적 현상이 일어나는 창발성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컴의 면도날의 원칙을 따라, 미시 차원만으로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면 거시 차원의 설명이 추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 예는 구체적으로 들자면 참 많다. 일단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설명하는 예시들을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모노는 당시까지 생명과 비생명을 구분하는 기준들을 가져와, 이 기준을 만족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미시적인 과정들을 제시한다. 자신의 일부를 보존하면서 자신을 복제하고, 어떤 의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체계. 이 체계는 사람을 비롯한 온갖 동식물을 설명할 수 있는 조건이지만, 그 형태는 어디까지고 앙상해질 수 있다. 크기가 작지만 다른 생명처럼 세포로 구성된 세균은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세포에 자신의 유전자를 끼워넣고 이를 복제해 조립해내는 것으로 동작하는 유전자로서의 생명체 바이러스는 다른 생명과의 유비를 어렵게 만든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독자적인 생명체로서 여겨질 수라도 있지만, 바이러스가 사용하는 이 과정은 당연히 일반적인 단백질 합성 과정에서도 사용되며 분자 단위로 동작하는 복제-재생산-억제의 정교한 피드백 루프를 낳는다. 개체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늘어난 수가 자신을 복제하는 과정을 강화하거나, 반대로 억제하면서 수가 조절되는 자동적인 알로스테릭 분자들의 기제.
이것이 어떻게 처음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한번 그 구조가 정립되고나면 남은 것은 그 구조를 보존하면서 스스로를 복제해나가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무작위적 변화에 따라 조금씩 강화되거나 열화되는 일뿐. 그 이상의 구조적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모노는 그 처음을 순전한 우연의 몫으로 돌린다. <우연과>에서 드는 좋은 예시는 면역 체계로, 문제를 일으키는 항원이 신체에 들어왔을 때 면역 체계는 그 항원에 맞는 항체를 파악하여 복제해 항원에 대응하도록 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항체는 항원과는 무관하게 생산된다. 체내에는 무수히 많은 무작위적인 항체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으며, 면역 체계가 하는 일은 항원 샘플을 하나 들고 가 이 무수히 많은 항체 중 어느 하나가 부디 항원에 들어맞기를 기도하며 대조하는 것뿐이다.1) 그리고 놀랍게도, 대체로 어느 하나의 항체는 그 항원에 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모노는 그저 무작위성의 깊이를 충분히 늘리는 것만으로 이러한 능력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
모노가 <우연과>에서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합목적성이다. 이것은 사이버네틱스가 내건 주제인데, 의도 없는 객관적 과정만을 통해서 의도를 가진 주관적 결과를 낼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 언급한 도킨스의 '복잡성을 향한 추동력'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체될 수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 하우스>에서 마치 더 복잡한 생물을 만들어내려고 나아가는 듯한 진화 현상을 그런 방향성이 전혀 없는 전제만으로 모사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복잡성이 낮아질 수 있는 최저치-단세포 박테리아-가 있는 한에서, 더 복잡해지거나 덜 복잡해지는 확률이 반반이기만 하더라도 무작위적 선택이 계속될수록 그 분포는 점차 최저치의 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다. 이 시뮬레이션은 가장 복잡해진 개체가 왜 하필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추가로 요구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부수적이다. 사실, 이것은 대부분의 거시적 분석이 다 그렇기도 하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누군가는 망할 것이고 누군가는 흥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게 누구이고 어떤 방식으로 그리 될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데, 생물의 수명이 한정적인 이유라든가(현재를 보상하며 미래에 대가를 지불하는 변이들이 진화 과정 중 누적되었을 것이다) 암이 생기는 이유라든가(종양을 유발하는 유전자와 억제하는 유전자가 동시에 활성/불활성화되는 우연적인 돌연변이가 무수히 많은 세포 증식 속에서 어딘가 하나는 생겨나고야 만다) 그 밖의 여러 거시적인 모형이 존재한다. 이 모형들은 전부 그 이상의 의미론을 요구하지 않는 앙상한 검소함을 보여주며, 세상의 다른 모든 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안겨주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에 대한 반박이자 강화로서 우연적인 기제들이 실제로 '얼마나' 우연적인지를 다루는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있는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기반 위에서 사람의 신비로움을 사람을 구성하는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 이상으로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에게 그 말은 사람이 신비롭지 않다는 뜻으로 들릴 테고, 모노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이기도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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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 자세한 설명은 필리프 데트머의 <면역>을 참고할 만하다. 면역학이 끔찍할 정도로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서로 통일되지 않는 여러 기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마 이런 면역 체계의 특성 때문이지 않을까.
2) 이것은 현대 AI의 대표인 트랜스포머와 그 파생물의 기치이기도 하다. 오픈AI와 앤트로픽, 구글 등 AI 업계의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모은 <The Scaling Era>에서 연구1원들은 모노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저 무작위성의 규모를 늘리는 스케일링만으로 충분한 지능-혹은 문제 수행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비슷하게, 2차원에서는 서로 손댈 수 없이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료를 차원을 높여 분별력이 만들어질 수 있는 깊이를 만드는 것으로 각각의 자료를 분리할 수 있는 가상의 테두리를 그을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에서 SVM과 FFN를 다루는 부분을 참고.
글을 너무 잘 쓰시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사다 아키라는 이 책이 거품이 많이 끼였다고 프랑수아 자코브 <생명의 논리, 유전의 역사>를 대체제로 추천하더라 나야 뭐 안 읽어봐서 둘 다 모르지만
체크
4글자만 더 적지 그랬냐
소수임?
거시적 분석이 필요하지 않냐는 뭐 그렇다 아니다 할 수 없지만 허구성이 있을지라도 필요한게 아닌가 싶기도
ㅅㅂ 생각해보니까 평상시내가하는얘기랑반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