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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날 책 읽어도 느낀바 어느 하나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용한 일임에 틀림없다. 내가 책을 읽고나서, 늘 눈물을 지으며 감명하는 순간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순간이다. 이른바 숭고한 휴머니즘이다. 나는 나름대로의 휴머니즘을 실천하기로 결정했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타인에 대한 이해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일단 주변 사람들부터 이해해보고자 노력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를 알아보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건 특정 질문에 대해 어떤 답변을 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더 확실하지만 이건 특정한 상황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 이건 내 능력 밖의 소관이다)
그러나 휴머니즘 실천이란 나의 야심찬 의도는 결과적으로 썩 즐거운 결과를 낳지는 못한 듯싶다. 휴머니즘의 실천 수단인 나의 일련의 질문들을 통해 그 사람을 알아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보고 싶었던 나만의 산파술이, 사람들로부터 썩 달갑지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 그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정신적으로 벌거벗는 일은 꽤나 부끄러운 일이다. 내면을 남김없이 드러내거나 혹은 답변을 하지 못해 자기 자신은 그런 일은 생각해본 적 없노라는 무기력에 가까운 답변은 대답하는 사람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나만의 산파술은 악취미로 전락한다. 미안하게도 나만의 휴머니즘 실현은 누군가를 괴롭힐만한 면책특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대 산파술의 아버지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본다. 가장 만만하면서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대답을 거부하지 않고 무엇이든 말해주는 그런 존재들 말이다. 그래, 이게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 말이다. 그래서 마음의 밑바닥을 보고 싶은 인물, 그 인물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만의 휴머니즘을 발전시켜보고자 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서사적으론 세계의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케이건 드라카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보통의 일대기와 달리 <눈마새>의 케이건 드라카의 과거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단편적으로 주어지는 정보로 추리해 나가는 수밖엔 없다. (그렇기에 오류를 빚을 가능성이 높다)
<눈마새> 속 세계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 부족(인간, 레콘, 도깨비, 나가)이 섬기는 4명의 신이 각기 하나의 윷이 되어 윷놀이를 해야만 한다. 윷놀이란 유희를 해야만 세계는 강물처럼 흐른다.
세계가 흐른다는 것은 세계의 개별자들이 바뀌고, 누군가는 땅 속으로 사라지며 변화와 소멸 끝에 또 다른 무언가가 창조되는 하나의 큰 과정이다.
그러나 <눈마새>의 세계는 어느 순간인가부터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어떤 가치도 변하지 않고 재생산되지도 않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다. 그 원흉은 바로 케이건 드라카다.
정보를 끼워 맞추면 그의 진짜 정체는 신이 육화된 모습이자, 케이건 드라카라는 자아가 합쳐진 신과 인간이 합쳐진 전대미문의 인간이자 신이다. 그는 몇 세기를 살았고 한때 나가를 믿은 유일한 자다. 그는 자신을 위해 팔을 잘라 건네준 나가 요스비를 보고, 희망을 품었으리라. 인간과 나가 두 종족은 공존할 수 있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공존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그는 나가를 믿어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것은 처참한 배신뿐이었다. 고귀한 신분, 그리고 사랑하던 아내도 잃어버린다. 나가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그렇게 나가 살육자가 된다.
소설은 결국 케이건의 복수를 위한 정보들과 행동들로 차곡차곡 쌓인다. 모든 갈등이 해소될 최정점의 공간이자 마지막, 케이건은 나가의 심장탑에 이르러 모든 나가를 없앨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그가 불러일으킨 거대한 회오리가 심장탑을 덮친다. 그가 수백년동안 별러온 복수를 성공했을까?
그러나, <눈마새>의 최종 갈등 장면, 아무런 심리 묘사 없이 건조하게 사실과 행동, 대사만이 심장탑을 휩싸는 상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란 대단히 제한적이지만 결국 케이건이 나가를 멸망시키지 않았단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곳엔 별 일 없었다.
그래서 케이건은 왜 복수를 이루지 못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서사 속에 감춰진 인물의 심리가 진짜 ‘별 일’이기 때문이다. 그 심리는 행간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17장 말미와 18장에 흩뿌려진 정보들을 조합해보면 그리미 마케로우의 모습을 한 여신의 부름에 따라 케이건 드라카는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은 나늬임을 상기한다. 케이건 드라카는 신과 자신이 내린 선물인, 아내가 좋아하던 원추리 화관을 쓴 데오늬 달비를 보고 자신의 아내 여름을 떠올린다.
그러자 수백년간 얼어붙은 그의 마음은 녹아내리고 나가를 멸족하겠다는 의지를 잃는다.
직후 자신과 같이 증오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또 다른 자신인 갈로텍과 마주한다. 케이건은 아직도 복수를 원하는지를 묻고 갈로텍은 복수를 원한다고 말한다.
갈로텍의 답을 들은 케이건은 심장탑을 떠나 어디론가 향한다. 그의 마음 속 회오리는 이미 멎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케이건은 인간의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차있다는 벽문에서 미움이란 글자를 지운다. 대금을 부는 채로 말이다. 작품 내내 대금을 부는 건 갈로텍 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때 케이건이 대금을 분다는 건 케이건이 갈로텍을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본다. 복수로 가득찬 지난 날의 자신과 같은 존재의 분노와 증오를 받아들인 셈이라는 해석과도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손자의 후손인 <손빈병법>의 창시자 손빈은 자신을 음해해 앉은뱅이로 만든 원흉인 방연을 죽인다.
정의가 이뤄지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렇기에 고대에서부터 빠지지 않는 이야기 소재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일차원적인 통쾌함 이외에도 이는 우리 세포 속에 각인 된 정의에 대한 보상의 심리가 만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분명 한 사람은 일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고통 속에 그의 세계는 멈춘다. 그의 세계는 흐르지도 새로운 세계를 만나지도 못한다. 분노와 증오 속 오직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시간과 세계는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오왕 부차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땔감 위에서 잠을 잤고, 월왕 구천은 부차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돼지쓸개를 핥으며 인내의 세월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들의 삶은 복수에 대한 일념 하나로 오로지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의란 자기가 받을 몫을 받는 것이다. 원초적 감정으로 봤을 때 케이건은 나가의 목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정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자신만의 몫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도 남을 위해서 말이다.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않는 자, 남에게 받을 목숨이 있지만 그 목숨을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돌려주는 자,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상으로 용서는 밋밋한 결말이다. 최후의 1인, 더 강한 자를 가리는 게 아무래도 더 재밌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해본다면 용서가 밋밋한 결말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시시해지거나 밋밋하다고 할 순 없다. 용서에 얽힌 한 사람의 심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용솟음의 단계, 내 몫을 받아내느냐 그를 위해 포기하느냐는 인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무게는 달라진다.
케이건은 나가에 대한 복수를 내려놓음으로써 스스로 지옥에서 벗어나고 그러자 그의 시간은 다시 흐른다. 용서를 통해 격렬한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멈춰있던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로써 비로소 알 수 있다. 세계가 변하기 위해선 증오와 같은 감정이 차지할 자리가 비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케이건 드라카의 대답은 해묵은 분노의 감정을 내려놓고 타자의 분노인 ‘눈물’을 마시겠다는 선택이다. 복수를 하려는 군자의 눈물을 삼킴으로써 그는 ‘눈물을 마시는’ 자가 된다. 케이건 드라카는 오히려 그 자신이 눈물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눈물을 삼켜낼 수 있게 된다. 케이건 드라카는 눈물을 마시는 진정으로 숭고한 새가 되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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