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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딴 길로 새보자면, 동단편집에 포함된 작품 중에서도 인상 깊은게 제법 많았다. <어둠의 그늘>이나 <충적세, 그 후> 같은 작품은 이문열의 장점인 기초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문열의 기초는 과장 좀 보태 이태준 이후로 최고라 부를만한 수준이라 조심스레 평가해보고 싶다. 이렇게 잘 읽히고 널리 읽히는 글이야말로 참 좋은 글이 아니겠는가.


무릇 문학이란 것은 그 깊이가 깊어야하고 제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야하는건 맞고, 그런 면에서 보면 이문열보다 위로 칠만한 작가들이 수 없이도 많겠지만, 우리네 부모님도 익히 아시는 이문열이란 작가의 그 접근성 하나만큼은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만연으로 펼치는데 텁텁함과 답답합이 묻어나오지 않는건 정말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기초가 탄탄한 작품들을 내비두고 금시조 일작만 따로 꼽아 소개하는 까닭은, 금시조라는 작품 안에 이문열 특유의 전통과 새로움을 오가는 주제와 참여와 예술에 관한 논쟁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글은 전통과 젊음이 공존하는 글이다. 아마 그가 젊은 시절에 쓰지못한 힘이 중년의 글에 섞인게 아닌가 한다.



금시조는 늙어버린 제자 고죽의 시점으로, 과거 스승과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예술관에 대한 스승과 제자의 대립을 다루는 소설이다. 그렇다하여 예술관에 대한 대립으로만 주제를 호도하면 그 또한 틀린 말일 것이고, 예술과 경지에 관한 견해의 화해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인 석담은 일찍이 고죽의 재능을 알아보지만, 그 얕음 역시 동시에 깨달았기에 그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후에 고죽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서야 긴 고민 끝에 문하로 받아들여줄 뿐이다.


그에게 고죽의 천재성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자신이 건들기도 어려운 형태로 이루어졌기에 덧대여도 난 치는 방식이 


물物을 빌려 마음을 그린다는 스승에게 서화는 수단이다. 그 말에 의하자면 저잣거리 화공에 비해 서화가 나은 대접은 받는 일은, 오직 서화 안에 담긴 그 뜻 덕분이다. 스승은 전통을 중시한다.


그에 반해 고죽은 예술 그 자체를 중시한다. 스승을 따라 전통을 숭상하며 새로움을 잠깐이나마 배격했던 주인공이지만, 정작 스승의 뜻대로 고매한 서권기와 문자향을 연마하려 들진 않는다. 


".....선생이 알 듯 말 듯한 미소에 젖어 조는 듯 서안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이제는 다만 지난 영광의 노을로서만 파악되는 어떤 유현한 세계를 넘나들 때나 신기가 번득하는 눈길로 태풍처럼 대필을 휘몰아갈 때, 혹은 뒤꼍 한 그루의 해당화 그늘 아래서 탈속한 기품으로 난을 뜨고 거문고를 어를 때는 그대로 경건한 삶의 한사표로 보이다가도, 그 자신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반년도 안돼 굶어 죽은 송장을 쳐야할 것 같은 살림이나, 몇몇 늙은이와 이제는 퇴락해버린 고가나, 고된 들일에서 돌아오면 그를 맞는 석담 선생의 무력한 눈길을 대할 때면 그것이야말로 반드시 벗어나야할 무슨 저주로운 운명처럼 느껴졌다."


저 문장에서 익히 알 수 있듯, 고죽이 스승에게 보내는 감정은 애증이다. 서화에선 따라갈 수 없는 어르신이지만 그가 없으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늙은이. 스승의 그런 면모는 젊은 고죽에게 많은 미련을 심어준다. 


이는 예술관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제자의 참여하는 오롯한 예술과 스승의 뜻을 담는 경지적 수단. 


사실 칩거하면서 뜻을 담는 석담도 이상한 놈이고, 참여하면서 오롯한 예술을 부르짖는 고죽도 정상은 아니다. 칩거하는 예술이 옳고, 참여하는 뜻이 바르다. 두 인물의 차이점은 확신이다. 석담은 자기 생각을 부정한 일이 추호도 없었지만, 고죽은 죽기 직전까지 그 생각을 고쳐가며 고뇌했었다.


모순이 있는 예술이라도 자신의 길로 삼아 걸어나갔던 석담과 달리, 고죽은 그런 모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그 예술이 완성될 수 없었다. 이런 이가 해내야하는건 창작된 사조를 따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새 사조를 창조해내는 일이다.


끝끝내 사회적인 참여를 이루지 못해 망연자실해 하는 그의 앞에서 사자성어 중 3개를 적고 힘이 부친다며 회한을 토로하는 스승의 모습은 자랑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예술이 먼저라는 너는 붓을 놓았지만, 뜻을 전한다 말했던 나는 멀쩡히고 쓰고 있노라. 기만을 이기지 못한 고죽은 폭팔하고 결국 벼루를 얻어맞고서 쫓겨나온다.


그 이후로 삶을 반추하던 고죽은 인생을 천천히 되짚어가며 스승이 말했던 금시조를 목격하게 된다. 헌데 고죽이 본 금시조와 석담이 이르는 금시조는 별개의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석담이 금시조를 보았다는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석담에게 금시조란 오르고 싶었던 경지지만, 그가 실제로 그 경지롤 목도했을지는 미지수다.


여튼 고죽이 보게된 금시조는 석담이 이르듯 용을 물리치려는 뜻을 담지 않는다. 오직 하늘 위로 나아가려는 비상의 의지만이 엿보일 뿐이다. 참여를 외치는데 뜻을 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진실로 금시조를 보았다 말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이제 죽음을 직감한 고죽은 자기 작품을 모두 되짚는다. 어떤 것은 석파의 난초를 모방하고서도 따라가지 못했고, 어떤 것은 추사의 글을 베껴써놓고도 딴 곳에 가있었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했지만 아직 손바닥 안이였고, 그 어느 곳에도 오롯한 그만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던 예술을 완성하지도 못했고, 경지라 불리우는 금시조에도 완벽히 닿지 못했다. 스승의 뜻에도 부합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도 뒤떨어지는 용렬한 작품들 뿐이였다. 그가 행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끝까지 완성되지 못하였던 제 사조의 난산이자 유산(流産)을 기리며, 그리고 서화계에 남겨주지 못한 미적 유산을 위하여 유산으로 불리울 제 글을 모두 한데 몰아넣는다. 그리고 끝까지 애착 가지지 못해 미련남겼던 자신만의 새 사조를 전긍정하기 위해, 그전까지의 어렴풋이 흉내냈던 그릇된 서화를 부정하며 불태운다.


고죽이 다 타버리는 작품들을 보면서도 일말의 후회를 머금지 않은 일은 유작으로써 그려낸 불꽃, 그 안에서 보게된 것이 다름 아닌 금시조(金翅鳥)였던 까닭일지니. 스승이 말했듯 찬란하고도 힘찬 비상을 해올리는 그것을 보며, 고죽은 일흔 두 살의 긴 생애 끝에 만족스레 웃고 떠나게 된다.




이문열이 전통에 관해 슬프기까지한 애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같은 작품에서 익히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였다. 그 작품을 읽으면서도 느꼈고, 금시조를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전통에 관한 제 심득을 전해주는 이가 있다는게, 그것도 이 수준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가 자신의 늦은 등단 시기에 한탄하며 붓인지 펜인지 모를 제 고색창연함을 꺾어버렸다면, 속담에서 이르듯 낭중지추라 하였으니 필담으로라도 언젠가 만나뵜음즉한 글이긴 했을 것이긴 했다마는, 펼치지 못한 재능에 아쉬움이 보다 깊게 남았을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마치 러시아문학에서 체호프가 요절하듯 현대 국문학 단편의 가장 큰 한 획이 그어지지 못한채 사라져버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그런 일이 없어 중단편집을 읽을 수 있다는게 참 즐거운 일이였다.


그 단편집 안에 금시조 같은 단편이 있었던건 또 얼마나 큰 행운이였나. 그 깊이와 수준의 차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내겐 금각사보다 기껍게 느껴지는 작품이였음을 말하고 싶다. 


결말부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번째로 스승의 견해를 받아들임을 통해 화해해 그의 말대로 금시조를 본 일이라던가. 이 감상을 쓰기 위해 참고했던 논문엔 그리 적혀있었다. (소설을 보는 관점, 양선규)


작가인 이문열의 참여적 성격을 생각해보면, 스승에게 귀의한다는 형식이 옳을 수도 있겠지마는, 그렇게 된다면 초헌이 이해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고죽 자기 자신을 깎아내린 것에 반발하여 그를 사이비라 표현했다는 초헌이 서사에서 무의미한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런고로 주인공 고죽의 철저한 자기부정은, 베드로를 연상케하는 태어나지 못한 제 사조에 대한 긍정이요. 스승과의 화해인 동시에 새로운 사조를 추구해낸게 아닌가 한다. 단 한 순간에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금시조의 형태로 그려진 사조. 그것은 분명 감동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런걸 보면 단편 작가로서의 이문열은 당대의 어떤 작가보다 뛰어나지 않았나 한다. 어려운 주제에도 읽음이 즐거웠던 것은 그런 역량의 증명과도 같지 않았을까. 


2권을 덮고도 3권을 펼쳐나가고자 함이 즐거운 작가다. 질리는 일 없이 3권도 읽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건 그거고, 최인훈 전집을 사놓고서 1월경에 샀던 이문열 중단편전집 6권 중 2권을 읽고 있는건 참 슬픈 일이다. 학교도 다니고 월독도 하고 증바람도 하고 오버워치도 하고 술도 마시고 감상도 쓰고 하다보니 이 모양이다.. 


고죽에게 예술이 천성이였다 하면, 나에겐 게으름이 천성인가 한다. 제 스스로도 그 의견을 차마 부정할 수 없을 성 싶어 일단 작달막한 감상이라도 남겨본다. 내일이면 이 게으름이 조금이나마 없어지길 바라고 있다.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