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처음에 그녀는 순결의
옷을 입고 나타났고,
나는 아이처럼 그녀를 사랑했어.
그녀가 알 수 없는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증오했어.
그녀가 호사스럽게
치장한 여왕이 되어 나타났을 때
내 분노는 너무 쓰고 허무했지.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고
그녀가 상실했던 순결의
도포를 다시 몸에 감았을 때
나는 다시 그녀를 믿기로 했어.
그녀는 마침내 도포를 벗고
벌거숭이로 나타났어.
오, 내 삶의 열정이여!
벌거숭이 시여, 영원하라!
후안 라몬 히메네스.
20세기 스페인의 '순수 시(벌거벗은 시)' 대가로, 현재까지도 스페인의 국민 시인으로 꼽힌다(고 생각된다)
스페인어권 시, 나아가 문학이라면 보통 격동적인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릴 테지만,
20세기 스페인도 라틴 아메리카만큼이나 역동적인 세계였다
그 역동 속에서도 '순수'를 보유하려던 히메네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역설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하기야 사람들은 격정적이고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순수'를 찾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밌는 건 낭만주의에 가까워보이는 히메네스도 (마치 예이츠처럼) 현대에는 '모더니즘' 시인으로 분류된다
가을의 순수
초승달은 아직
소나무 사이로 불타고 있다.
한 때의 찌르레기들
말없이 지나간다.
유리 상자처럼 폐쇄된 장미 정원.
오직 구관조 한 마리 남아
휘파람 분다.
깨끗한 오솔길은 동쪽으로
나 있다.
모든 것은 붉게 타는 화염 속에 펼쳐진 듯
여명 너머 흰빛과 자줏빛이 넘치고 있다.
하늘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한기!
이슬은 어떻게 나무에서
벙어리 되어 떨어지는가?
비단과 황금을 탄 액체의
꿈같은 그 이슬은 어디서 오는지?
이처럼 시선집 대부분이 굉장히 '순수'하게 정제한 듯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시인 특)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신경쇠약 걸림
이라서 히메네스도 단순히 또랑또랑하게 순수를 노래했다기보단
상당히 음울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도 자주 사용한다
죽음 3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들에게, 우리들에게,
한 여자의, 한 남자의
의도하지 않은 심각함.
그들은 삶의 광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연극에서처럼
잠시나마 거짓을 믿는다.
그리고 진실인 것처럼
서로를 사랑한다.
슬프지 않은가?
진실인 것처럼이라니...
그들은 유일한 그 길로 가지만
다시는 그 길로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부는 무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점령,
절대적 안식,
진실은 또 다른 진실 때문에 슬퍼진다.
이 시선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유고 시 중 하나인데, 꽤 의미심장한 배치다
서정에 있어서 기쁨과 슬픔이란 게 상당히 양가적인지라,
이와 같이 둘 사이를 오가는 정서가 시에서 자주 보이는 듯하다
음울하고 어두운 시는 이외에도 꽤 있지만,
생각하기에, 히메네스가 '위대한' 국민 시인으로 꼽히는 데에는,
아무래도 이보다 더 '스페인적인' 시편들 때문은 아닐까?
10월
나 흙에 누워 있었어, 끝없이 펼쳐진
카스티야의 들판을 바라보며,
가을은 노란빛 달콤함으로
기우는 해을 담아내고 있었어.
완만한 쟁기질은 검붉은 밭에
평행선을 만들고, 활짝 벌린
소박한 손에서 던져진 씨는
흙의 갈라진 내장으로 들어갔어.
나는 심장을 뜯어내,
넓은 고랑 위에 던져 버렸어.
사랑으로 충만한 내 심장을.
심장을 뜯어 땅에 묻으면
봄이 찾아와 영원한 사랑의
나무를 세상에 보여 주리라 믿으며.
나름 목가적인 시라고 골랐는데
다시 살피니 상당히 멘헤라스럽게 읽을 여지가 많지만 넘어가자
멘헤라 아닌 시인은 없다
어쨌든 히메네스는 시인 특) 요양하러 고향 내려감 패시브로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 모게르에 머무르며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이때 하필 갑작스런 부친상을 치르게 되느라... 더더욱 고독했을 것이다
히메네스는 이 시기에 시상의 원형인 초기 시들을 써 내렸다
목가적인 풍경도 여기에서 일부 발원한다
소리 나는 고독
한여름의 신성한 시간
장미들이 고통스런 푸른색을 찾아 떠날 때,
비행기들이 마을을 굉음으로 장식할 때,
계집아이들 우물가에 모여 합창을 한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정원은 신선하고.
피아노에는 장미가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책들이 꿈을 꾸고,
유리는 먼 햇빛으로 푸르름과
여름의 순수한 영광을 수없이 만들고 있다.
열린 발코니로 순수한 미풍이 들어와
가구들은 우울한 광택을 발산한다.
내 달콤한 미소를 즐기려는 것일까,
노란 책 위에 아카시아 가지 하나가 나를 보네.
위에서 말한 목가적 풍경, 양가적 서정, 그리고 순수. 가 고루고루 드러난다
이후에도 히메네스는 20세기 유럽 문학 특) 친구들이랑 친목질함(로르카, 달리 등). 미국 망명함 등, 파란만장한 시대를 보냈지만,
그의 시편들은 끝까지 낭만-모던의 색채를 잃지 않으려 했다
이와 같은 '시적 순수'에 대한 아집 그 자체야말로, 20세기 모더니즘 이행기 시인들이 다들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순수'는 아니었을까?
+ 역자에 따르면 일부러 관념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쳐냈다고 하니, 그것들도 꽤나 궁금해지는 부분임
사실 스페인 문학이 본래 '순수'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인지라,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니, 히메네스가 도리어 스페인 문학사에서는 특이한 시인이겠다 싶었음
이 또한 20세기 모더니즘의 자장이랄까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