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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길에 관한 명상>은 통일 담론부터 이탈리아 기행, 희곡론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나는 그중에서도 최인훈의 문학론을 주목하려 한다. 예술 이론을 체계적으로 담은 <문학과 이데올로기>를 먼저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으나, 그래도 읽었으니 감상은 남겨야 한다.
최인훈은 인간이 생물로서 지닌 신체와 정보 집적물로서 지닌 신체를 동시에 운용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 두 신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이 어긋남을 극복하려면 생물적 신체와 정보적 신체를 결합해야 하는데, 예술이 바로 그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자연을 활용할 뿐 자연을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예술은 환상이라는 도구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행동이다. 인간은 스스로 환상임을 인지하면서도, 정교하게 닦은 기술로 인간이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을 꾼다.
이 꿈은 치밀하게 계획하고 수정할 수 있는 꿈이며, 전통을 밑거름 삼아 빚어낼 수도 있는 꿈이다.
꿈을 경험하는 기쁨 그 자체가 본질적 가치이며, 현실을 개선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다만 예술의 가치를 현실에서 실천하려면 현실 법칙에 맞는 환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을 간과하면 예술과 현실은 서로를 억압하는 굴레가 된다.
최인훈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을 진화의 완성된 형태라고 정의한다.
그는 50만 년 전 인류나 지금의 인류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보며 이를 생물적 자기동일성(I)이라 명명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형질을 갖추지만(I), 동물과 구별되는 인격을 획득하려면 교육과 사회화라는 문명적 과정(i)을 거쳐야 한다.
문명은 인간에게 무한을 향한 욕망을 심어주었다. 인간은 미래를 설계하고 우주의 기원과 끝을 탐구하는 등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과제를 고민하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된다. 기술과 문명이 진보했음에도 인간은 여전히 미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인간은 문명을 거치며 무한에 도달하지 않고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최인훈은 이어 진화를 완성할 수 없다는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종교와 예술을 비교한다.
예술은 약속된 환상이며, 인간 의식이 상상력 속에서 최종 진화 상태에 도달하는 현상이다(`i=무한).
종교와 예술은 모두 상상력을 빌려 무한을 체험하게 하지만 현실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종교는 환상을 현실이라고 주장하지만(`i=무한) +, 예술은 그것이 약속된 환상임을 분명히 밝힌다(`i=무한)-.
상상력이 작동하면 현실 지각은 잠시 멈추고 기억의 내용이 실제처럼 인식된다. 현실이 자아와 외부 우주를 합친 것이라면, 우리 마음 안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는 셈이다. 예술을 감상할 때 인간은 현실을 지각하는 자아와 마음속 우주를 인식하는 자아, 즉 두 개의 자아를 운용한다. 예술은 환상인 줄 알면서도 인간이 무한에 도달하는 유일한 경험으로 이를 수용하는 행위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순간은 종교적 제의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술품과 인간 의식이 연결되는 상태가 곧 예술 현상이다. 인간은 선대의 능력을 학습하는 특이한 개체 발생(i) 형식을 취한다. 예술적 동일성(`i)은 이러한 학습 능력이 극치에 달해 무한한 세대의 윤회를 개체 속에 압축한 상태다. 예술의 법열과 대아(大我)가 육신 속에 깃드는 환상의 기쁨이 여기서 발생한다.
예술은 생물학적, 기술적 능력으로 해소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환상으로 해결한다. 예술품은 무한히 진화한 어떤 종의 계통 발생 정보(DNA)와 같으며, 감상은 자기 안에서 그 정보를 개체 발생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예술은 진화의 완성을 현재 이 자리에서 이룩한다.
예술이라고 하는 행위는 인간의 진화의 과정을 환상적으로, 즉, 상상 속에서 완성해 보는 특별한 인간 행위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247
최인훈은 이 표에서 i(문명적 동일성)를 부등호로, `i(예술적 동일성)를 등호로 표기한다. 이는 무한을 표현하는 예술의 성격 때문이다. 무한에는 차별이나 복수가 없다. 대상의 형태는 달라도 그것이 지향하는 무한의 질량은 같다. 예술은 나와 세계의 모순을 유지하면서도 나와 세계를 초월해 있는 상태를 자각적으로 운용하는 기술이다.
생물적 동일성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으며 인간 존재의 본질적 기반을 이룬다. 반면 문명적 동일성은 변형된 채 계승되며, 인간이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 생물적 동일성은 인간과 분리할 수 없지만, 문명적 정보로 이루어진 후자의 정체성은 외부 조건에 따라 쉽게 벗겨지거나 부정될 수 있다.
최인훈은 자신이 쌓은 탑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견디기 위해 비평과 에세이, 즉 메모를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문학론은 창작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불안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최인훈은 유동적인 대상을 붙잡기 위해 창작의 의미를 끊임없이 새로 정의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허구의 이야기로 엮는 창작 장르에 못지않게, 그 창작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이론적 파악을 주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늘 견딜 수 없이 불안하다." -28
최인훈에게는 발 붙이고 설 땅이 없었다. 그의 삶은 뿌리 뽑히기와 가치 전복의 연속이었다. 루카치가 별이 빛나던 창공을 그리워할 때, 최인훈은 "너흰 그래도 견고한 바닥은 있지 않느냐" 하고 되려 묻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회령에서 태어난 최인훈은 광복 후 원산으로 이주해 사회주의 체제에 적응했다. 그곳에서 조명희의 <두만강> 감상문으로 문학 선생에게 극찬을 받았으나, 곧 회령에서의 과거를 추궁당하며 자아비판을 강요받았다. 이후 전쟁이 터지자 월남하여 부산과 목포를 전전했다. 이러한 상실은 정치적 타율에 의해 강제된 것이었다. 최인훈은 개인적 수난에서 '인간은 추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보편적 원리를 끌어내 소설과 비평의 밑바닥에 깔았다.
그에게 메모는 정신의 상승을 돕는 도구다. 메모는 쓰이는 즉시 저자의 정신과 분리되지만, 나중에 이를 다시 읽으면 정신은 순간적으로 과거의 수준을 회복한다. 정신은 메모의 도움을 받아 더 높이 도약한다. 최인훈이 제시한 문명 진보 모델은 '높이뛰기 모델'이다. 인간은 정점에 올랐다 추락하기를 반복하며, 상승할 때마다 과거의 경로를 다시 거쳐야 한다. 작가는 매번 새로 뛰어올라야 한다. 과거의 위대한 작품은 기록일 뿐 현재의 자신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추락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한계를 넘어서려는 행위가 곧 창작이다.
우리는 회령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흘러간 시간을 따라가며 한 세계를 만드는 즐거움"을 구현한 <두만강>으로 시작하여, <광장>-<회색인>-<서유기>-<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태풍>을 거쳐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마지막 소설 <화두>까지, 최인훈의 끊임없는 도약과 추락을 볼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10년 넘게 한 소설에 매달린 것과 같이, 최인훈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세상 속의 '나'는 대체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40년동안 해 왔던 것이다.
인생이 유한하고 역사에 불가능이 있는 동안 예술은 인간에게 필수의 위안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억압 없는 행복임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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