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뵐플린 - 파노프스키로 견적 잡아뒀는데 어쩌다 보니 제네바 학파에 하이재킹당함





각각의 개별적인 죽음은 우주적인 열기와 명상의 힘, 깊이 등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될 것이다. 물질적인 지속성이 세계에 반환된 육체의 성분을 새로 태어나는 다른 육체의 껍데기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불멸에 대한 네르발적인 선택은 매끄럽고 이음자리가 없는 세계에의 필요와 긴밀히 연결된다. 그것은 동질로 구성된 물질로, 존재에서 존재로 삶을—불을—전달케 하는 진흙이다.


그러나 이같은 전달이 진정 이행되는지, 마지막 순간에 가서 어떤 장애물이나 간격이 존재의 지하적 진전을 방해하게 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여기에 믿음과 의혹이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종족 적인 모호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인물이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다. 블랑쉬 박사의 집에서 라브류니박사를 면전에 둔 제라르나, 감람산 위 神의 면전, 아니 신의 부재와 마주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아들의 이미지이다:


오 나의 아버지시여 ! 내가 나의 깊숙한 곳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 당신인가요?

Ô mon père ! est-ce toi que je sens en moi-même?


만일 아들의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모든 것은 허사요, 아들인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에게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아,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죽으려 하기 때문이요!)


─장-피에르 리샤르, 시와 깊이 中


헤겔이 위대한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개중 하나는 세속화된 구2원을 끝까지 밀어붙여 나선형의 원환으로, 바깥이 아닌 내부에 침잠시켜 접합시켰다는 점임. 헤겔이 반-기독교도라면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충실한 기독교도라는 걸 전제로 삼은 post-기독교도라는 점이며, 바로 그래서 헤겔의 위대함은 예수라는 독생자에 독점된 '매개'를 (문자 그대로) 만물에게 해방/구속시키는 순간 가장 눈부시게 타올랐음.


어쩌면 블랑쇼의 논평처럼 헤겔(그리고 마르크스)은 가장 비-유대적인 사상가일거임. 유대성의 핵심은 유예와 도약으로 대변되는 무매개적 직접성이니까. 그렇기에 낭만주의-신비주의-상징주의가 기독교 내부에서 국지전을 벌이다가 2차대전을 거치며 유대성이라는 빚진 탈출구로 새어간걸까? 네르발의 낭만주의는 신비주의 언어로 택갈이한 기독교 신학이며, 말라르메의 분투는 시 자체를 절대적인 매개자로 만들려 한 성사/모독일테니. 그럼 첼란과 자베스는, 그 영원한 추방과 어긋나는 글자들은 독특하고 이질적인, 유일무이한 상처가 아니라, 필연적인 세포사멸일까?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 사별을 견뎌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그 죽음 때문에 상심한 마음을 결코 달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게서 어머니를 다시 본다고 믿었다. 내가 당신에게서 아내를 앗아갔다는 사실을 잊지 못한 채로 말이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을 때면 한숨과 부들부들 떠는 듯한 흔들림으로 쓰라린 회한이 애정의 표시에 뒤섞여 있음을 항상 느껴야 했다. 아버지의 애정 표시는 그래서 더욱 각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장 자크야, 네 어머니 이야기를 해줄게” 하고 말하면, 나는 “네, 아버지, 이제 또 울어야겠네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그 말끝에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탄하며 말했다. “아! 내게 네 엄마를 돌려다오. 아내 잃은 나를 달래다오. 네 엄마가 내 마음에 남겨놓은 빈자리를 채워다오. 네가 단지 내 아들이기만 하다면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겠느냐?”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고 40년이 지나 둘째 부인의 품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입으로는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


뷜송 양과는 허물없지는 않으면서도 친밀하게 지냈다. 반대로 고통 양 앞에서는 가장 친밀한 때조차도 들뜨고 흥분되었다. 나는 그녀와 너무 오래 함께 있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거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두 사람 다 걱정했다. 하지만 한 여자에게는 더욱 친절했고 다른 한 여자에게는 더욱 복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뷜송 양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고통 양이 내게 불길에 뛰어들라고 명령했다면 즉시 복종했을 것이다.


─장 자크 루소, 고백 中


루소의 서브미시브는 그 유명한 스팽킹 씬보다 뵐송과 고통 에피스드, 요컨대 가까이 다가가면 욕망이 소멸하고, 멀어지면 욕망이 살아나지만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고전적 이중구속에서 훨씬 잘 드러남. 그리고 이 이중구속은 오늘날의 통속적 BDSM 구도(의지와 행위성의 양도)보다는 mommy-sissy 같은 경계선상의 키워드에서 꽤 생산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기도. 이중구속을 역할극으로 번역해서 관리 가능한 형식으로 주조하지만, 바로 이 번역은 여성성을 강도의 문제로 조직하게끔 하는 위계를 앵커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암컷-되기는 유예되어야만 한다는 2차 이중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