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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인정 받지 못하다 노년에 들어 인정 받은 쇼펜하우어. 그가 20여년 넘게 고독에 빠져있을 때 받은 ‘철학 전체를 뒤엎으려하는 괴짜’라는 표현은


나를 연신 울게 만든다. 모두가 물질, 현상의 세계를 말할 때, 유일하게 물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의지를 통해 모든 학문을 분해한다. 


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천재처럼 다가온다.




일도 해야 하고, 독서도 해야 하고, 그를 뒷받침 하는 체력도 있어야 하고, 이 셋만으로도 삶이 빡빡하네


시간은 분명 공짜였는데, 어느덧 ‘몰아서 무언가를 한다’라는 개념은 사라졌고, 잘 안분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책 읽은 것조차 사치인 시기가 다가오니... 


아직도 늦지 않았지만 시간에 빗대어 비교하려는 욕동과 아쉬움, 그리고 일찍이 책을 접한 타인들에 대한 부러움의 시선은 감출 수도 없고, 어쩔 도리 또한 없네



어제 체력 방전으로 감상을 제대로 못 적은 것도 있고, 3월에 읽은 책들의 주제들이 상호 연관성이 강하다고 판단이 듦


그래서 3월에 읽은 책들이 내게 준 생각들에 대하여 큰 구분 없이, 순서 없이 주절주절 적어보고자 함



1. 철학을 감각하는 이유의 근원은

어느 날, 철학이 로캉탱이 느낀 마로니에 뿌리처럼 다가온 것일까. 강자들이 갖는 지적 호기심이 내 안에서 발현된 것일까.

아니면 약자로서 느끼는 삶의 고단함, 부단함, 불평등, 부조리와 맞서기 위해, 또는 회피하거나 합리화 하기 위해 제시된 것일까.

병약했던 파스칼, 부유했으나 사랑받지 못한 쇼펜하우어, 가난하고 왜소했던 칸트. (물론, 다소 편향적인 예시)

우리는 도대체 왜 가려움을 느끼는 걸까? 안타까운 건 현대의 철학들은 모든 현상을 현상세계의 형식으로 분해 하고 있고,

어쩌면 위대한 철학가들 마저, 본인 스스로의 철학함을 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덮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숭고함은 죽었는가)


2. 현상세계와 치통

위와 같은 배경으로 설명된다면 나는 세계의 패배자다. 사회 생활에 곧잘 적응하고 있고 동화 되었지만, 사람들을 사귀는 것에 대한 진심은 죽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신체는 현상세계를 감각하는 데에 특화가 되어 있고, 때문에 우린 물질에 익숙하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하는 나 또한 물질에 익숙하다.

하지만, 내가 자랄 시기에는 칸트의 윤리가, 그러니까 선의지나 정언명령이 정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헌데, 사회는, 세계에는 도덕법칙이란 것이 마치 무너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무너졌다고, 나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저 “너희들은 못 느끼겠지만 나는 감각하고 있어!” 라는 말을 하기 위해 치통을 한껏 뽐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3. 자기기만과 반발심리

그러한 자기기만에 직면했을 때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 클레망스이다. 나는 내 자기기만을 목격하기 전만 하여도 충만하였고 당당했다.

그러나, 그 의롭던 청년이, 센강에서 투신한 여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은 상황을 목격한 뒤로 정체되었듯이, 나 또한 내 치통을 목격하고 모든 것이 뒤집혔다.

가파른 길에서 통제하지 못하는 짐을 잡으려 뛰어가는 사람을 돕고, 장애인 근로자를 욕하는 어린 아이들을 훈계하고, 야심한 밤에 피떡이 되어 살려달라고 말하는 타인을 위해

달려가던 그 행동들은 ‘치통’이란 단어로 재단되었다. 나는 클레망스처럼, 보이지 않는 조소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일임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다만 덜 극적이고, 일상적인, 소소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 정언명령이 설령 해체되었다 하여도, 내 의지가 이기심의 원리라 할지라도, 의도가 불온할 지라도

궁극적으로 내가 물질적으로 얻는 것을 철저히 배척하며, 감정으로, 감각으로 느끼는 데에 만족한다면, 이 현상세계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적어도 없는 것이었다.


4. 삶에의 의지의 부정, 그러나 긍정에 기반한

사물 자체를 의식하게 된 계기가 현상, 표상인 신체임을 안다면, 우리는 한껏 이해에 가까워진다.

‘신체에 종속되어 사물 자체를 보지 못한다니’가 아니라 ‘신체가 있기에 사물 자체에 닿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이러한 현상에서 출발해, 이기심의 원리를 깨닫고, 모든 것이 하나인 의지 자체가, 개체화의 원리로, 다수성의 원리로 나뉜 것을 깨달을 때를

의미한다.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삶은 고통임 그러니까 부정하셈ㅋ’이 아니다. (정말 쇼펜하우어 철학을 전문으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5. 대립성, 양가성이 주는 자유의 감각

칸트가 연 인식의 시대. 자연 법칙의 진리가 우리를 짓누르는 게 아닌, 우리가 우리의 법칙으로 자연을 본다라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만드는가!

삶의 무수한 부조리, 부당함, 나의 감각, 감정, 격양, 진노, 고함! 이 모든 게 그저 ‘이해함‘의 반대인 ‘이해하지 못함(감정)’일 뿐이라는 건 맥빠지는 일이다.

인식함으로서 현상을 바라보면, 우린 양가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의 현상이 필연적으로 두 개, 복합적으로 다수의(다수의 이해관계의) 현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스피노자가 말하는 심신일원론처럼 말이다. 현상세계에 국한되나, 이것은 문학/비문학으로 이야기 될 수도 있고, 경험/독서로도 이야기 될 수 있다.


6. 비문학 대 문학, 소설 대 시

간간히 올라오는 주제인 이 뜨거운 감자는, 의지로서 모든 현상을 분해한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저자가 하지 않았지만,

구태어 따지자면 문학이, 시가 더 아름답다. 허나! 이것은 단순히 언어 형식에서 뒹굴 것 같냐, 뒹굴지 않느냐는 관점에 입각한 견해일 뿐이지,

실제 저자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통찰에 있다. (그가 괴테의 작품을 사랑한 것처럼)

앞서, 사물 자체를 중시하나, 현상 세계에 관계될 때에 비로소 사물 자체를 느끼는 우리의 삶을 말했다. 그렇기에 이것들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용하다.

어쩌면 이 문제는 본문 1번, 2번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보증된 지적 증명서, 또는 유년기의 충분(또는 강압, 과도적)한 탐구가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이미

성찰이 있었을 것이며,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의 세계에서 인정 받고 싶은 심리라고 나는 본다.)


7. 칸트와 종교

난 칸트 입문서인 ‘윤리형이상학 정초’와 ‘형이상학 서설’밖에 읽지 못했다. 때문에 그가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지, 발언을 삼가는 입장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외관상 그가 세우려는 의무는 유신론과 유사하다. (신이 있기에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리고 현상세계 밖의 예지세계가 존재하고,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윤리욕(윤리+욕이란 말은 좀 모순적이지만)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선의지, 정언명령이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다. 칸트가 부여한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를 오인한다.)


8. 명예욕에 관하여

몽테뉴의 에세만 보아도 명예욕에 대해 무상한 것이라고 본다. (이거 읽은지 좀 오래 돼서 부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그리고, 명예욕에 관한 현대사회의 평가와 입장은

굉장히 비판적인 것 같다. (물론, 정확히는 모든 평가는 대상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일 뿐이다.) 허나, 명예욕을 바라는 이들에 대한 비난을 앞다투어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고민에 빠진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 자체, 의지의 객관화, 이념, 경쟁, 다툼이 사실이라면 우린 단계에 따라 감각하지 못할 뿐, 일정 영역을 차지하는

식물조차도 경쟁의 대상이다. 헌데, 식물도 아닌, 동등한 인간이 한정된 자원 속에서 고귀함, 숭고함을 믿고 희생을 택한다 말한다. 그를 구태어 비난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따금 사람들이 현상세계에 종속되어 있는지, 그 이상을 바라보는 것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이해를 바라는 것이 칸트의 선의지, 정언명령을 정통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아님에는 분명하나, 학자가 아닌, 사업가적 마인드로 관조할 때 이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이 관계에 익숙할지도 모른다.)


9. 윤리, 그리고 사랑이란

이 시점에서 칸트의 선의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내 일생은 칸트의 선의지, 정언명령과 같은 의무감과 교육에 노출되어 왔지만, 항상 그것을 배반하는 나의 신체를 목격하였다.

급하면 횡단보도를 무단횡단 하였다. 유불리에 따라 거짓말을 하였다. 변명을 달고 살았다. 힘이 강할 때엔 힘을 과시하였다. 사랑은 분명 숭고한 것이었는데,

그녀가 내 기대와 같지 않으면 욕동이 꺼졌고, 그것을 정조와 숭고로 포장했다. 그러나,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를 만날 때엔 뜨겁게 사랑했고, 사랑 없는 육체적 관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유희로써 포장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아름답지 않았기에 이성을 세웠다는 그 말이, 정녕 나를 관통하는 말인가. 나는 한 때 시를 읊는 이성의 순수한 모습에 호기심과

사랑을 품었으나, 그것들은 어쩌면 교육과 이상이 만든 이미지는 아니었는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는지라는 생각에 잠긴다.


10. 숭고냐, 세속이냐

결혼할 나이에 접어들 때에면 그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아까 감정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정의한 사실을 기억하는가? 나는 내 숭고를 강조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세계와 사회의, 형식의 언어를 배우고, 일종의 계량화, 표현력을 얻으며 세속, 타락을 느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숭고하다고 느끼는 데에는,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는 기저가 깔려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물론 이와 같은 발언이 ‘불행, 가난, 사랑의 불충족’으로 정리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보며, 내가 느낀 바는 그렇다.


11. 결론에 도달해야만 하는 사람들

다른 철학은 몰라도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철학을 접했을 때 느낀 감상은 ‘여기에 파묻혀 죽어도 좋다’라는 감각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가진 신, 의지를 지닌 신이 내게 책문하던 죄의식을, 스피노자가 지워주었다. 나는 이 때 멈췄어도 된다. 그러나, 직전에 읽은 데카르트가 나를 자꾸

괴롭혔다. 의심하는 나만이 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스피노자 이후, 급진적인 천재 철학가인 쇼펜하우어 앞에서도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답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답을 목도하여도, 정답이 아닌 것 같은 의심에 빠져드는 것이 감히 인간의 심리이다. 키르케고르의 절망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칸트의 논리를 신학에 적용한다면, 우린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힘이 우리를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가?


12. 결의론, 그리고 파스칼의 프로뱅시알 서한

이 모든 것들은 표상, 표상상으로서 설명된다. 그리고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언급한 것으로도 설명된다.

인간은 표상세계에 종속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모여서 뛰지 않으면 의욕하지 못하고, 관계하지 못하면 우울하고, 공간 범주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나는 초등학생 고학년, 성경 여름캠프를 목적으로 모여든 이십여명의 인원이, 캠프 직후 바퀴벌레 흩어지듯 사라지는 현상을 보며 감각했다.

통상의 우리는 고행이 아닌, 즐거움일 수 있을 때에  무언가를 믿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선구자들의 발언과 분명 상충되는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쇼펜하우어가 분해한 세계의 타당성이 강력해진다. 


13. 끝으로

나는 독서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모르는 게 많다. 그러니 혹시 누군가를 노여워하게 하는 발언이 있었다면

훈계해줘라. 나는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쭈그려 경청할 것이며, 또한 배울 것이다. (이 때문에 읽는 것들 대부분을 여과없이 일단 수용하는 실정에 있다.)

다만 나는 내가 당최 왜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자기기만에 대한 고백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약자의 불균형인가?

이런 이야기를 할 곳이 없다. 삶을 웃으며 즐길 수 있다. 헌데, 내 삶에는 너무나 가벼운 것과 너무나 무거운 것뿐만이 존재하지

중간의 것이 존재하질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면 너무 피상적이고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현대적으로 해석된 병이 있으리!)



ㅇㅇ 아 진짜 끝이네 퇴근길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거 메모는 못하고 적었는데 몇 가지 빼먹은 게 있는 듯


그래도 그냥 일기마냥 적는 느낌으로 남겨봄 나중에 또 기억이 나면 적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