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이 엊그제 같았는데 올해 1분기가 끝나가고 있다. 저번 달과 비교했었을 때 읽은 책의 권수는 동일하지만 이번 달 동안 뇌리에 진하게 남을 만큼 좋은 책들을 연거푸 읽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한달을 보냈다. 남은 9개월 동안 더 다양한 책을 읽고 내 나름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총합 독서 권수 200권 달성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지난 한달 간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 만엔 원년의 풋볼 (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
일본 시코쿠 지방 에히메 현 태생의 소설가, 사회운동가이자 1994년 일본에서는 두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며 일본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1935 - 2023)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만엔 원년의 풋볼을 읽어봤다. 내가 오에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작품은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인 개인적인 체험(個人的な体験)으로 작년에 읽어봤었다. 길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그 책에 담겼던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작가가 실제로 자폐아 아들을 양육하면서 직접 겪기도 했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켜 극복하고자 했던 주제의식이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서 오에 겐자부로에 흥미가 생겨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가의 어떤 책을 다음으로 읽어볼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마침 작가가 개인적인 체험을 발표하고 3년만인 1967년에 차기작으로 출간한 이 책이 대표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이번 기회에 이 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이 책은 일본 시코쿠 에히메 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제지업으로 명성이 있는 토호 가문이었던 네도코로 가문의 100년에 걸친 비극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네도코로 미쓰사부로는 도쿄에서 대학 영어 강사를 하고 있었던 지식인이었지만 추남인데다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던졌던 짱돌이 오른쪽 눈에 맞아 결국 실명까지 하고 만 상처많은 인물이다. 거기에다 막역했던 친구가 안보투쟁 시위에 나갔다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다쳐 투병생활을 하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떠났고, 처음으로 얻었던 아기도 머리에 큰 혹이 나버려 사실상 불구아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 이에 충격받은 아내도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바람에 그는 매우 낙담하여 폐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미쓰사부로와는 반대로 미남이고, 격렬하게 학생운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륙을 방랑하다 돌연 일본으로 귀국한 동생 타카시가 형에게 자기를 따라 시코쿠 지방의 시골마을로 낙향하여 새 생활을 해보는 게 어떻냐며 제안한다. 자포자기한 채로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귀향한 주인공은 꽤나 달라진 마을의 풍경을 목도한다. 원래는 일본으로 징용되어 힘들게 벌목을 했던 조선인 노동자가 패전 후 자신의 임지를 불하받아 이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해 시코쿠 지방 여럿에 슈퍼마켓 체인을 세워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과거엔 피지배민이었지만 현재는 마을의 일상생활을 장악한 그에게 '슈퍼마켓 천황'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마지못해 순응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수치심에 마음을 애끓이며 반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타카시는 고향에서 지내며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던 100년 전 농민 반란을 일으켜 시코쿠 일대를 뒤흔들었던 증조부의 동생의 일화에 큰 감명을 받았고, 또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 마을 주민과 조선인 노동자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때 린치를 당해 일찍이 숨을 거뒀던 또다른 형인 S의 삶에도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상의 과거사를 자신의 운명처럼 여기며, 지역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청년들을 모아 풋볼(미식축구)부를 결성하여 체력 단련을 시키고, 이렇게 꾸린 조직을 바탕으로 슈퍼마켓 천황을 상대로 반란을 기도하고 주인공 또한 이 사건에 휩쓸리게 된다는 게 이 책의 주요 스토리라인이다.
작가는 본인의 고향이기도 했던 시코쿠 에히메 현의 시골마을 배경으로 막말 시대와 메이지 유신에서 청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패전 후 미일안보조약 갱신으로 촉발된 안보투쟁에 이르기까지 격동과 혼란의 일본 근현대사를 우의적으로 구현하였다. 주인공의 가족인 네도코로 일가가 4대에 걸쳐 휘말렸던 피비린내나는 비극을 통해 오에는 근대화된 일본이 장밋빛 전망만을 좇으며 무난히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폭력을 대물려 가며 다사다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작중 기괴하면서도 암울한 분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곧이어 들어선 냉전 체제에서 당대 일본인들이 겪었던 패배의식과 정신적 공황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전후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외세인 미국에 대한 비유도 인상적이었는데, 거시적으로는 미국 그 자체에 대한 묘사도 있지만 미시적으로는 슈퍼마켓 체인을 차려 시골 동네를 자본주의와 소비만능주의로 물들이는 외지인 '슈퍼마켓 천황'의 모습을 빌려 일본에 끼친 영향력과 외세에 온 나라가 흔들리며 일본인이 느꼈던 당혹감을 독자들로 하여금 피부에 와닿는 방식으로 느끼게끔 만들어준다.
하지만 오에는 시골마을 공동체로 대변되는 일본 민중들에 대해서도 마냥 온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작중 마을 사람들은 어떤 사태에 직면하면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려 하기보다는 자기연민과 자가당착에 빠져 분을 삭이다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태를 키워오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인들이 근대화를 거치면서 마주한 부조리를 해결해나가기 보다는 국수주의와 차별의식에 기대하여 애먼 약자에게 분풀이를 하고 외국을 침략하며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 점을 꼬집는다. (물론 이를 일본인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는 인류의 보편적인 습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민들이 슈퍼마켓 천황에 반감을 품는 큰 요인 중 하나가 다름아닌 그가 외지인이라는 점에서 일본인들에게 만연한 폐쇄성을 잘 드러낸다. 더불어, 그 반감의 대상이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조선인이라는 데서 작가가 일본의 과거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어찌보면 일본이로서 가장 트라우마를 느끼고 수치심을 느낄만한 소재를 거침없이 다룬다는 점에서 작가의 대담함과 소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내가 비록 일문학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간 내가 읽어본 일본 소설은 물론이요 내가 읽었던 모든 문학책을 통틀어서도 걸작 중 하나로 꼽고 싶은 최고의 작품이었다. 저번에 읽었던 개인적인 체험에서 풍겼던 기괴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흡인력 있는 스토리텔링과 일본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총체성까지 갖춘 걸작이었다 보니, 이 책이 작가가 32세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썼던 책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오에 겐자부로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 - 1927)와 더불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인 작가로 간직할 것 같다. 오에 특유의 긴 문장과 그로테스크한 묘사 때문에 이 책을 가볍게 추천하기에는 분명 부담스럽다. 하지만, 괜히 본작이 전후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는 게 아닌 만큼 일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언젠가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2. 바다 (The Sea)
아일랜드 웩스포드 태생의 소설가, 극본가이자 아일랜드를 넘어 현대 영문학에서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직가 존 밴빌(John Banville, 1945 - )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그에게 부커상을 안겨준 장편소설 바다를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내가 외국에 있다보니 영어 책을 더 쉽게 접할 수 있다보니 고전 영문학을 읽는 걸 넘어서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 - )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 - 2023) 같은 현대 영문학 거장 작가들에게도 흥미가 생겼다. 이런저런 영어 소설책을 뒤져 보면서 우연히 존 밴빌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인터넷에서 밴빌의 작품을 추천하는 게시글도 본 기억이 나서 언젠가 그의 작품을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서점을 둘러보다가 이 책이 다른 서점보다 괜찮은 가격에 판매를 하고 있는 걸 봤다. 지금 아니면 이보다 싼 값에 이 책을 구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기회에 이 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이 책은 맥스 모든이라는 고령의 미술사학자가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아내와 사별하여 실의에 빠진 채,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해안가 마을인 밸리리스로 돌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작품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지만 본작은 그중에서도 꽤나 특이한 구성을 갖췄다. 보통 다른 작품의 경우 화자가 과거를 시간대에 따라 차근차근 회상하며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이 책은 화자가 그때그때 생각나는대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보니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단편적이고, 이야기도 비선형적으로 전개된다. 꽤나 파격적인 구성을 띈 작품이다 보니 저도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야기의 맥을 짚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점차 책장을 넘길 수록 기억의 편린들이 맞춰져 나가는 것이 제법 흥미로웠다. 시간대에 따라 정리정돈되어 있는 형태의 과거 회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다분히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뚜렷한 시간대 구분없이 뒤섞여 있는 본작의 과거 회상이야 말로 가장 현실적인 방식의 회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불어 주인공이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감퇴되는 걸 반영한 듯이 작중 몇몇 에피소드 중에서는 화자가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주인공의 과거를 관망한다기 보다는 같이 작품 속에 뛰어들어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격적인 구성과 더불어 이 책이 가진 확연한 특징으로 매우 유려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이 있었다. 물론 미문을 자랑하는 소설은 여태까지 많았지만 이 책에 적힌 문장들은 맥스 모든이라는 인물의 기억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예리함과 섬세함으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주인공이 미술사학자인 만큼 자연 풍경과 본인이 느꼈던 감정을 감각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묘사하다 보니 기억 속 한 장면에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나 있다. 또 괄목할만한 점으로 작가가 바다라는 상실의 알레고리로 사용하는 점이 있다. 주인공이 아내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부터 어렸을 적 겪었던 마음의 상처까지 주인공의 감정이 동요하는 순간에는 바다의 움직임에 빗댄 감정 묘사가 함께 하고 있다. 파도와 같이 노호하는 격정적인 감정을 글자로 음미하면서, 글에 취한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새삼 깨달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비록 내가 영어를 모어로 삼고 있는 원어민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글맛과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던 것 같다. 다만 파격적인 구성을 갖췄다는 점은 정말 흥미로웠어도 책을 마지막까지 읽었을 때 이야기의 얼개가 딱들어 맞는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좋게 말하면 참신하고 나쁘게 말하면 난잡한 서사 구조 때문에 이 책을 가볍게 추천하긴 망설여지지만 문장이 워낙 아름답기도 하고 분량도 부담스럽지는 않아서 기회가 된다면 일독을 권장한다.
3. 광장 / 구운몽
함경북도 회령군 태생의 소설가, 극작가이자 6.25 전쟁 이후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추앙받는 작가 최인훈(1934- 2018)의 소설집인 광장 / 구운몽을 읽어봤다. 최인훈은 1960-7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소설가였지만 젊은 세대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대표작인 광장이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이 되어 있고 수능과 모의고사에도 지문으로 출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생활했다보니 고등학교 국어 교육을 전혀 이수한 적이 없었서 최인훈이라는 작가의 명성만 풍문으로 들었지 실제로 접할 기회는 없었다. 문학 좋아하는 사람치고 현대 한국문학의 으뜸으로 꼽히는 작가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은 내 나름의 컴플렉스가 되었다. 그렇게 마음 속 빚을 간직하기만 하다가 어느날 들렀던 중고 서점에서 거의 새책이나 다름 없던 상태였던 이 책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최인훈의 작품을 읽어볼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이 들어 냉큼 사와서 이번에 한 번 읽어봤다.
먼저, 광장은 익히 잘 알려졌듯이 철학과 3학년 대학생인 이명준이 해방이 얼마되지 않아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의 현실속에서 사상적으로 방황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명준은 인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두가지로 나눠서 정의하는데, 하나는 개인적으로만 소유하며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공간인 밀실이 있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도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공간인 광장이 있다. 해방 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주인공은 광장에는 온갖 악덕과 쓰레기로 가득차 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밀실의 크기를 키우는데 골몰하는 사람들이 넘처나는 남한의 사회상에 큰 염증을 느꼈다. 거기다 어렸을 때 모습도 잘 안비치던 아버지가 월북을 해서 대남 선전을 하는 바람에, 연좌제로 명준 본인도 경찰서에 끌려가 위압적인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에 학을 뗀 명준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북녘으로 향했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각 개인에 생각과 욕망에 따른 주장이 아니라 공산당에서 내려다 주는 구호만 반복하는 허수아비들로만 광장이 있고 개인이 가진 밀실의 크기는 숨막히듯이 좁혀가는 북한의 사회상에도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남북 모두의 이념에 한계를 느낀 명준은 기존에 주어진 이항대립의 구도를 넘어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이상을 좇아 사상적인 방황을 이어나간다. 당시로서는 꽤나 고학력자였던 철학과 대학생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보니 다소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청년 이명준의 고민은 해방 후 혼란을 겪었던 현대 한국인들의 생각을 적절히 표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분단이 오래되지 않았던 시절에 쓰인 작품이어서 그런지 남북 분단에 대한 관점이 분단이 70년을 훌쩍 넘긴 현재 한국인들보다 훨씬 유연한 것 같았다. 북한을 똑같이 사람사는 동네로 보기 보다는 적대국을 넘어 그냥 무심하게만 바라보는 이국의 땅으로 여기는 요즈음의 관점을 비교하면서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같이 수록된 중편소설인 구운몽은 독고민이라는 극장 포스터 화가가 한창 젊었던 시절 첫사랑이었던 숙이라는 여인의 편지를 받고 거리로 나갔다가 겪게 되는 기이한 일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옛 연인을 따라 나섰을 뿐인데 난데없이 시인 무리들에게는 고명한 문인으로, 회사 임원진들에게는 사장으로, 발레리나 무리에게는 무용 선생님으로 착각을 받게 되고, 어안이 벙벙했던 그는 당연히 이들의 착각을 부인한 채 도망쳤다가 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또 조용한 도심속에서 정부군과 혁명군이 서로 교전을 하며 라디오 방송으로 선전을 하는데, 갑자기 혁명군의 수괴가 독고민이라는 사실이 방송으로 폭로되면서 주인공은 졸지에 정부군한테도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개연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보이는 추격전 이야기는 일정한 패턴을 두고 반복되는 양상을 띄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확실성과 부조리로 가득찬 미로를 헤매고 있는 듯 하다. 더불어, 초자연적인 현상이 작중에서 여러차례 벌어져서 독고민이 겪은 일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기 보다는 여러번에 걸쳐서 꾸는 악몽에 더 가까운 인상을 준다. 여러모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 - 1924)의 작품이 연상되었다. 또, 일견 황당한 부조리극으로 볼 법한 소설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전쟁으로 황폐화된 조국에서 돌연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이루며 한껏 자유에 취했다가 2년도 넘기지 못해 군사 쿠데타로 민주정부가 엎어진 상황에 처해 당대 한국인들이 느꼈던 정신적 불안과 분열이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의 심리적 불안을 몽환적인 체험에 빗대어 표현한 점에서는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 - 1962)의 소설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도 연상되었다. 이렇게 서양 문학에서의 실험적인 양식을 토대로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명작을 읽고 나서 최인훈이라는 작가의 이름값이 단순히 광장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재확인 하였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내가 사실 한국 문학을 그렇게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간 읽어봤던 한국 소설 중에서도 이 책이 가장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한국인이지만 외국 문학을 더 즐겨 읽으면서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프카, 토마스 만, 모옌 등 세계적인 대문호가 왜 한국 땅에는 없을까 하며 외국을 시샘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작품의 완성도와 사유의 치열함에서 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최인훈의 작품을 읽으면서 제 생각이 짧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토록 탁월한 작가가 후배 한국 문인들에 비해 세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게 안타깝기도 했고, 국내에서도 광장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지만 최인훈을 교과서에 나온 소설 작가로만 기억하기에는 그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통해 최인훈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소설가가 된 만큼 그가 생전에 썼던 다른 대표작들도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작품의 주제가 무겁고 관념적이다 보니 이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작이기에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4. 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Повести покойного Ивана Петровича Белкина · Пиковая дама)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자 근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꼽히며 후세 문인들에게도 끊임없는 존경을 받고 있고, 현대 러시아인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1799 - 1837)의 단편소설집 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을 읽어봤다. 내가 노문학 책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동해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봤었다. 그런데도 정작 근대 러시아 문학의 근본으로 추앙받는 푸슈킨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때 노어노문학과를 전공했었던 지인으로부터 러시아 소설책 2권을 추천받았었는데, 하나는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였고 다른 하나는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공자의 선택이었던 만큼 이걸 잘 기억했두었다가, 어느날 들렀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옛날 판본이었지만 책 상태가 깔끔하고 가격도 착했던지라 최인훈의 광장 / 구운몽과 함께 같이 사와서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봤다.
먼저 수록된 단편집인 벨킨 이야기는 다섯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푸슈킨 본인을 작가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30세를 일기로 요절한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이라는 시골 귀족이 자신의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여러 이야기를 소설로 개작했다는 설정의 작품이다. 명목상으로 내세운 이야기의 출처가 제각각인 만큼 각자 다른 성격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비오라는 한 퇴역장교의 몇년에 걸친 미완의 결투를 다룬 단편 발사(Выстрел), 집안 배경의 차이를 극복하고 몰래 결혼식을 치르러 했지만 매섭게 몰아닥친 눈보라로 인해 기묘하게 꼬여버린 두 연인의 결혼 이야기를 다룬 단편 눈보라(Метел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매력인 단편 장의사(Гробовщик), 어여쁜 딸과 함께 여행객들을 접객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 역참지기가 손님 하나를 잘못 들였다가 기구한 운명을 맞게되는 이야기를 다룬 단편 역참지기(Станционный смотритель), 그리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원수 가문의 아들과 만나기 위해 귀족 아가씨가 농사꾼 처녀로 변장해서 연애를 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룬 단편 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Барышня-крестьянка) 이렇게 다섯편으로 책이 꾸려져 있는데 모두 민담적 성격이 강하다. 푸슈킨은 단순히 구전 설화 풍으로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그치지 않고 메타픽션과 믿을 수 없는 화자와 같이 서구 문학에서 보이는 세련된 문학기법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아주 깔끔하게 다듬어 내어 짧으면서도 강렬한 단편소설을 만들어냈다. 민담적 성격이 있는 작품이고 이야기 속에서 러시아 현실에 대한 따끔한 풍자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니콜라이 고골(Николай Гоголь, 1809 - 1852) 연상됐는데, 실제로도 푸슈킨이 고골을 문단에 추천하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사적으로 많은 교유를 하던 사이라서 고골이 푸슈킨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이 수록된 단편소설 스페이드 여왕은 게르만(또는 헤르만)이라는 젊은 장교가 동료 장교 톰스키의 할머니가 한때 도박의 명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녀에게서 도박 기술을 캐내서 단박에 돈을 벌 목적으로 그녀의 양녀인 리자베타라는 아가씨를 유혹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작은 50쪽이 채 안되는 짧은 분량의 작품이지만 여느 장편소설 보다도 짜임새있고 흥미로운 서사를 갖춘 작품이다. 섬세하면서도 과하지 않을 만큼 절도 있는 심리묘사, 비록 길지 않지만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흥미를 잃지 않게끔 하는 몰입감있는 스토리텔링과 재치있는 반전까지 2세기 전에 살았던 작가가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작품이었다. 다른 작가도 아니고 러시아 고전문학에 가장 꼭대기 위에 서있는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인상이 난다는 점이 썩 유쾌한 반전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나는 푸슈킨이 러시아 제일의 시인으로 꼽히니 화려하고 현란한 문장을 구사하겠거니 짐작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의 작품에 적힌 문장은 너무 길지않고 깔끔했고 소설 속 묘사도 딱 이야기에 필요한 수준으로 절제되어 있었다.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이 매우 자세한 묘사, 현란하면서도 긴 호흠의 화려한 문장에다 장광설로 무장한 후배 작가들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그러면서도 이야기 본연의 맛을 매우 잘 살린데다 조금 더 파고들면 근대 러시아의 천태만상에 대한 작가의 깊이있는 사유도 돋보여서 본작에서 거장의 품격도 느낄 수 있었다. 상술하였듯이 이 책은 고전문학은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는 편견을 통쾌하게 깨줄 정도로 재밌기도 하고 이야기의 완성도 높으므로 혹시라도 러시아 문학 입문작으로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 dc official App
만엔원년은 진짜 일문학 최고의 걸작 중 하나임...
나름 기대하면서 읽은 책인데도 그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음. 매카시옹의 핏빛 자오선 읽어본 이후 오랜만에 이야기랑 문장에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음. - dc App
정성리뷰추 다행히 바다는 번역본이 있네… 칭찬일색이었던 미문의 영어 원문이 잘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번역한 게 있음. 미리보기로 번역본도 슬쩍 봤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음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