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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선종 21주기에 기하여,
존경하는 성인의 진정한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며.
- 2026. 4. 2.

<까라마조프 형제들> - 도스또옙스끼, 창비, 홍대화 역
<희망의 문턱을 넘어> - 요한 바오로 2세, 시공사

 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신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신이 없는 이유를 백가지씩 대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무 죄가 없는 아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무고한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증거로 대며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과 그 공간에 직접 가서 신이 할 일을 대신 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고결하고 세상에 필요한 일인가. 만약 신이 침묵하고 있다면, 그 침묵을 깨고 자비를 베푸는 인간의 손길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이다. 과학이 이토록 발전한 시대에서,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은 더이상 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 인간이 진화하였는지 온전한 모습으로 창조되었는지는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안에 신의 빛으로서 언제나 양심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다.

 신이 없다면 인간에겐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이라는 절대적 경외가 없는 인간은 완벽히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말 그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신을 죽이면 말이다. 그리고 이미 신은 반쯤 죽어있다. ‘반쯤’이라는 말. 신을 완전히 죽일 수는 없다. 신을 죽였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에게도 양심의 빛으로서의 신은 살아있는 법이다. 세상이 신을 죽여 낙태를 허용해도, 낙태를 하는 인간의 양심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신은 언제나 양심의 빛으로 인간 속에 살아있다.

 당신은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반 표도르비치가 반문했듯이 말이다.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와 교육이 주입한 도덕적 강박의 잔재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인간은 무리에 속해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시하는 눈을 머릿속에 가두었고 그것이 바로 양심 아닌가. 양심은 신경학적 거부반응일 뿐이다. 우리는 동족의 고통을 볼 때 뇌의 어느 구석이 자극되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신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오만이며 무용한 일이다.’

 나는 이 반문에 대하여 양심에서 신성을 제거한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다시 반문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는 인간을 죽여도 된다고, 어떠한 상황에서는 도둑질을 해도 된다고 스스로 신이 되어 양심을 정의한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컨데 히틀러와 스탈린, 그들은 스스로 양심의 범위를 만들었다. 독일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노동자 계급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불가피한 살육이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양심의 범위를 넓혔다. 라스콜니코프, 이반 표도르비치, 스메르쟈꼬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자유를 넓히는 순간 인간이 마주하는 것은 끝없는 허무이다. 양심을 단순히 기능으로 격하시키는 순간 인간은 고성능 기계로 전락한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파멸하였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끝없는 허무에서 구하고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심의 빛에서 신을 발견해야 한다. 필사적으로 발견해야 한다.

 알료샤는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를 듣고 이반에게 입을 맞춘다. 이반의 이야기 속에서의 예수 또한 대심문관에게 입을 맞추었다. 도스또옙스끼는 불가해한 고통 앞에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개별적이어야 한다. 인류 전체를 추상적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고귀하고 어려운 일은, 내 눈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사랑이다. 그는 신의 힘을 갖고서도 혁명을 일으키지도, 왕을 죽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병자 한 명 한 명을 사랑하여 고쳤으며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그를 살렸다. 그리고 그는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에서도 나오듯이,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능동적으로 거부하였다. 넘쳐나는 빵은 구.원이 아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 말씀이 바로 양심이다. 빵이 없을 때에도 양심을 따르는 자긍심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며 그것으로 사람은 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한정한 빵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에게 극한의 상황을, 신이 침묵하는 상황을 주셨고, 그렇기에 양심을 택할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신성이 있다.

 신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혹은 언제나 침묵한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마땅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는 간구에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그 무응답의 절망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자기 앞의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알료샤가 고통 앞에서도 어린 아이 열 두명의 마음에 사랑을, 아름다움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한다. 아무 죄가 없는 아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무고한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증거로 대며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어렵고 중요하며 아름다운 일은 그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신이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신이 없는 것 같은 공간에 걸어 들어가 신이 할 일을 하는 순간 그 공간에 신이 생긴다. 신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의 빛을, 즉 신을 믿었을 때 실체로 세상에 드러난다. 사랑하는 자 안에는 신이 있다는 토마스 만의 말 뜻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신적이다.

 세상이 전쟁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무고한 어린아이가 죽고 수많은 병사들이 파리처럼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불결하게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까라마조프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다. 신의 뜻은 자신의 옆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료샤를,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기억해야 한다.


알료샤가 손가락을 깨문 아이를 용서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성인께서는 자신의 저격범을 찾아가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알료샤가 죽어가는 아이의 곁을 지켰던 것처럼 성인께서는 나병 환자를 찾아가 그들을 끌어안고 손을 잡았습니다. 알료샤가 까라마조프가의 수치와 죄악을 고백하고 사과하였듯 성인께서는 십자군 전쟁을, 교회의 유대인 박해를 사과하였습니다. 이제 저희가 삶 속에서 성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겠사오니 성인께서는 주님 곁에서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