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설령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면 없는대로, 느루 쓰느라 마디게 태워 끄느름해진 연탄난로가에 서성대며 알던 사람 소식을 두루 묻든가, 담배라도 한대 끄고 나서면 욱죈 가슴이 조금이라도 풀릴 성싶기만 했던 것이다
처자를 앉헤놓구 눅순잔채상을 남으손에
얻어 먹습네다……
관촌수필을 한 번이라도 읽었던 독붕이들은 우수수 쏟아지던 낯선 방언의 향연에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위에 인용된 대사는 둘 다 관촌수필 속 <화무십일>의 일부다
이처럼 이문구의 소설에는, 지문으로든 대사로든 '방언'이 '등장'하며,
이러한 방언 활용을 통해 작품의 전체적인 기조를 형성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어쩐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문구는 이 난삽스럽고 복잡한 방언들을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었을까?
우리가 입말을 그대로 옮기면 글이 엉망이 되는 것처럼,
방언도 그대로 옮기면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옮겨진 방언은 무엇일까?
그건 정말 방언(어떻게 언어 앞에 정말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을까?)일까?
1.
(언어와 상징권력)
국문학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프랑스 아저씨가 나와서 놀랐을 수도 있겠지만
문학에 나타난 '방언'을 이해해보려면 부르디외의 말에 한 번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겠다
(의외?의 사실이랄 건 없지만 부르디외 자신도 프랑스 남서부 깡촌 출신 촌놈이었다)
일단 문학이란 것 자체, 그보다 디테일하게, 언어적으로 '문학어'란,
사회적인 의미에서 항상 표준화된 '규범'으로, 입말이 '깎여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게 무슨 말인고? 여기 담긴 함의는 입말을 문어로 옮길 때 발생하는 문제와 더불어
글을 쓴다는 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무언가를 생성한다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디시에 "이문구는 꿀잼작가란 말입니다"라고 남길 때
이 문구는 '이문구 재밌는 작가지'라는 말에서 인터넷 환경에 맞춘 변용을 거친다(어휘 '꿀잼' + 일종의 밈적 구절인 '~란 말입니다'. 이거 말고도 다른 변용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중요한 전제는 인터넷이란 환경에서 소통하기 위한 말만이 따로 나타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걸 공식적으로 표명할 때에는, 또 '이문구는 흥미로운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변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문구 재밌다'라는 문장은 발화하는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된다
그렇다면 이게 뭐가 문제란 걸까? 문제는 '적절한 발화'를 위해서 '표준화'된 무언가 필요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부르디외의 분석(그리고 더불어 바르트나 데리다 같은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어, 특히 문학어는 입말을 문서로 확정시키면서 확고한 규범을 지니게 된다
이에 의해 '문학장에 허영될 수 있는 말-표준어(/그리고 은연중에 생기는 '허용될 수 없는 말'-방언)'이 생겨나고,
'말'은 반드시 문학적인 규범을 따라 '깎여야' 한다
아아주 범박하게 정리해보았는데, 이문구 얘기 보러 왔더니 웬 개소리를 적어놔서 송구할 따름이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표명하고 싶은 요지는 이것이다 — 작가가 글을 쓰려면, 허용되지 않은 것을 '허용될 수 있도록' 깎는, 그러한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전체 요지는 이것이다. 이문구는 문학을 통해 방언을 그대로 기록하는 작업을 한 게 아니라, 플로베르처럼 문학에 새로운 언어를 발명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2.
이제 '관촌수필에는 방언이 없다'라는 개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약간은 이해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즉 이문구가 관촌수필에 '옮겨 쓴' 것은 방언이 아니라, '방언을 본뜨기 위해 새로 만든 구문들'이다
느루 쓰느라 마디게 태워 끄느름해진 라는, 위에서 제일 처음 썼던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이 말, 얼핏 봐서는 맛깔난 충청도 사투리를 그대로 옮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혹시 여기 나온 어휘들을 사전에 검색해본 적 있는가?
검색해본 결과, 해당 구절에 나온 어휘는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등록된, 표준어다
우리가 충청도 방언이라고 생각했던 구절이, 사실은 사전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표준어로부터 구성되어 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타날까?
혹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지금 글을 적는 '나', 즉 서술자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는가?
이 '나'는 <일락서산>부터 시작하여 '관촌'이라는 장소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여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겠다. 이 '나'는 '관촌'과 (시간, 공간적으로 둘 다) 얼마만큼 가깝고, 또 멀까?
어쩌면, '나'는 한편으로는 관촌의 말과 기억 안에, 한편으로는 읽는 사람들이 있는 관촌 바깥에, 두 발을 걸치고 서 있는 건 아닌가?
즉 서술자는, '관촌 사람'이었으면서도 '말을 옮겨주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번역자'는 아닐까?
3.
이 점을 미루어 생각해봤을 때, 이문구가 글을 쓰면서 직면했을 어려움을 상상해볼 수 있다
/나는 관촌에 대한 '입말'을 체득하고는 있다. 그렇지만 '우리 공통적인 문학'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입말을, '표준적인 문어'로 살짝 고치는 작업을 행해야 한다
또 하나, 나는 이 입말을 문어로 완전히 옮길 수는 없다. 그것을 안다
그렇지만 나는 '방언'을, '고유한 말'을 문학을 통해 기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이 방언을 허용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를 통해 나는 체득된 기억 속 말과, 그리고 규범화된 사전의 '글' 두 가지를 '종합하여' 써야 한다/
그렇기에, 사실 말하자면 '관촌수필'은 '고유어'를 '문학어'로 그대로 쓰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해내기 위해, 무수히 방대한 '사투리 기법'을 발명한다
이 부분은 누가 논문에서 정리해둔 것을 한 번 따라가보자
(사실 이 글 내용 전체가 해당 논문을 바탕으로 쓴 거다_유승환, <사투리는 어떻게 문학어가 되는가?>)
1.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지문과 대화에서 방언은 서로 다른 수준으로 실현된다. 관촌수필의 지문, 즉 서술자의 언어에는 토착어 및 전통적 한자어가 대거 활용되지만, 정작 방언은 그리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2. 지문을 통한 방언의 실현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갈리는데, 그 중 첫 번째는 관촌의 전통적인 풍속과 관련된 사물을 지시하는 대체불가능한 명사 어휘가 서술자의 언어에 포함되는 경우로, 이는 해당 어휘가 지시하는 특수한 사물 혹은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때 해당 어휘들은 실제의 발화 상황에서 고립된 채 어휘적 수준에서만 실현된다
3. 지문에서 방언이 나타나는 두 번째 경우로 간접화법을 통해 방언 사용자의 언어가 서술자의 언어에 틈입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 경우 방언은, 가령 곁말이 서술자의 언어에 진입하는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방언이 실제로 실현될 때의 맥락을 어느 정도 유지하지만, 그럼에도 서술자가 활용하는 근대 문어와 결합되는 과정 속에서 원래의 음운적, 통사적 구조가 상당 부분 변화한다.
4. 관촌수필에서 방언이 실현되는 경우, 주석 달기라는 표기 전략이 활용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는 관촌수필이 지니는 두 가지 언어 체계 사이의 거리감의 반영이자, 동시에 이를 조정·해소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5. 대화에서 표기된 방언에 대한 표준어 번역어를 지문에서 제시하며 이를 부연하는 방법 또한 활용된다. 이는 주석 달기의 변형된 형태로서, 방언과 근대 문어 사이의 언어적 격차를 보다 자연스럽게 해소하는 방식이지만, 때때로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방언과 표준어 번역어의 대조는 방언이 가진 언어적 질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쉽게 정리해서,
1. 관촌수필 속 방언은 지문과 대화에서 따로 나타나며, 기본적으로 지문에는 사실 방언보다는 토착어와 전통 한자어가 더 많이 나타나고,
2. 이때 '관촌적인 사물이나 대상'은 어휘 수준에서만 실현(ex. 돌살, 대살 ...),
3. 간접화법으로 대화가 인용될 경우 맥락은 지켜지지만, 그 입말적 특성이 상당히 깎여진다.
4. 그리고 방언의 어려움을 전달하기 위해 이문구 스스로 괄호 등을 활용하여{ex. 돌살(石防簾) 대살(竹防簾)} 표기하며,
5. 또한 이런 기본적 표기에서 나아가 간접적으로 그 뜻을 풀어 설명{ex. "아씨 자양왔읍니다유" 머슴살이를 칠년이나 했다던 김무엇이라나 한 그 신랑이 제 스스로 재행(再行)이라 말했던 것이다}하는 식의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다.
4.
상당히 난삽한 글이 되었는데, 결론을 한 번 따져보자
1. 글쓰기에 있어서, 토속 방언/규범화된 문학어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2. 그리하여 토속어를 '옮기는' '작업'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쏟는 것보다는, '정교한 기법'에 따라 움직였다
3. 자신의 방언을 주된 '문학어'로 삼은 작가들은, 규범화된 문학에 방언의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4. 그리하여 이들은 '철저한 자료 수집과 수월한 전달을 위한 기법 발명'을 통해 '새로이 고유적이고 다양한 문학어'를 생성한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문학(이문구 말고도, 백석, 홍명희, 박상륭—이문구는 언어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백석 홍명희 등보다는 박상륭하고 도리어 비슷하다— 등등 방언이 빈번하게 나오는 작가...)을 읽을 때 '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어'보다는(어쩌면 이것을 한 번 거치고서) '이 사람은 '사투리'로 어떻게 '문학'을 하고 있을까?'라는 식으로, 문학 기법적인 것으로서 방언에 접근해본다면 재밌겠다
또 하나, 언젠가 독갤에서 나온 이야기—우리 시대에 '문어'가 '말맛'을 잃고 균질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언어 자체가 평평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작가들의 기법적인 노력이 평평해지는 것인가?
생각해볼 일이다
흥미롭네
좋은 글이네요 - dc App
백석 또한 전국팔도의 어휘를 다 수집하면서도, 이를 철저히 표준어의 규범 위에서 구현했음 - dc App
ㅇㅇ 백석도 일부러 안쓰는 고어 발굴해서 쓴 어휘도 있고, 문장 자체는 ~다. ~것이다. 이렇게 끝나는 건 표준어적 문장구조임
글빨같은 뭔지모를 개소리 주관 운운 쓰레기글 쓰는 애들은 이런 글 좀 본받아라
캬 잘 읽엇다
개추
부랄 뽀개면서 개추를 박았읍니다... 글 더 써줘
박상륭도 좀 그런 면이 있죠 고향만 다를 뿐 김동리에게서 사숙한 술친구란 점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