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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행간은 미끼고 그냥 아감벤에 대한 툴툴거림



초기 아감벤의 문제의식은 일련의 물음으로 수렴함


인간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경험과 역사와 표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감벤의 답변은 도발적임: 절대적 부정으로서 제3항




<행간>: 시적 직접성(표현하되 자기인식 불가) vs 철학적 분석(인식하되 표현 소거) 사이의 구조적 맹점인 비평 + 직접적 대상의 현존 vs 순수한 허구 사이의 중간자인 유령과 그 유령마저 부재해버린 상태로서 멜랑콜리


<유아기와 역사>: 현대적/단절된/사적/전-언어적 유아기 vs 집단적/서사적/전달적/공동체적 역사 사이의 불가피하나 포착할 수는 없는 이행/기원


<언어와 죽음>: 동물적 발성 vs 인간적 로고스 사이에서 제거되면서 초월론적 근거가 되는 Voice + 논리학 & 윤리학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정초에 실패한 흔적들이 쌓인 부정의 영역으로서 형이상학




아감벤은 이 구조를 기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특징으로 엮음


헤겔과 하이데거는 겉으로는 전혀 다른 철학을 하고 있지만, 둘 다 인간의 언어-존재 관계의 근저에 놓인 말해질 수 없는 부정성을 상정함


그리고 이 표현 불가능성이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으로 만들며, 냉정하게 헤겔-하이데거 이후의 모든 형이상학은 원리적으로 두 사람의 카피캣이라는 현실적인 진단을 내림


아감벤 그 자신의 작업도 이 형이상학의 주박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바로 이 맥락에서 묘수를 던짐



서양 형이상학 전체가 말해질 수 없는 부정성을 근거로 삼는 구조 안에 있다면, 그 구조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 역시 동일한 구조에 의해 포획됨


아감벤은 이 구조에서 탈출하지 않기, 요컨대 구조의 내부에서 구조가 억압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작동시키길 택함


형이상학이 자기정초를 위해 부정하고 은폐해온 바로 그 공백, 두 항의 실패가 만들어내는 제3지대를 수동적으로 기술하는 걸 넘어서 부정적인 역량으로 전면화하기


이 전환 이후가 바로 우리가 아는 정치철학자 아감벤임



<도래하는 공동체>와 <바틀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들뢰즈의 잠재성을 전유하며 '하지-않을-잠재성', 현실화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순수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역량을 제기했고,


호모 사케르의 히트작들에서는 (좀 괴이하지만) 푸코를 끌어다가 개념 도구로서의 생산성은 분명히 입증했음 (예외상태, 벌거벗은 생명, 주권 권력의 역설...)


푸코가 복수적이고 이질적인 권력 관계들의 분석에 머물렀다면, 아감벤은 이걸 서양 형이상학의 구조 전체와 접합시킴으로써 진단의 사정거리를 확대함



문제는 그 사정거리가 지나치게 길어졌고, 처방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니 모든 게 자가당착이 되버림


'작동의 중지', 두 항의 실패가 만들어내는 공백으로서의 제3지대, 그리고 이 공백으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실정적 언어를 마비에 빠뜨리기


바틀비적 마비의 '작동'은 실정적 맥락 안에서 이물질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건데,


사변놀음과 미학의 영역에서는 매혹적이지만, '수행 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제도화'하려는 프로그램으로 만든다?



1. 모든 사람이 바틀비가 되기(리버스 룩6셈부르크?)


2. 바틀비-프로그램 하에 비-바틀비적 이물질들을 제거하기(주권자 바틀비?)




헤겔의 규정적 부정에 맞서 예나 학파의 아이러니를 옹호하고, 서구 전통의 오디세우스적 귀환과 결별하며 떠났지만


그 귀결이란 게 벤야민의 브레이크, 하이데거의 내맡김, 푸코의 대항품행, 그리고 헤겔의 원환를 조악하게 뒤섞은 키메라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헤겔-하이데거 이후의 모든 형이상학은 원리적으로 두 사람의 카피캣이라는 본인의 진단을 입증해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