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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들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 돈 키호테
2.  프랑수아 라블레 -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3.  로렌스 스턴 - 트리스트럼 섄디
4.  헨리 필딩 - 톰 존스
5.  자크 디드로 - 운명론자 자크
6.  오노레 드 발자크 - 인간 희극
7.  귀스타브 플로베르 - 마담 보바리, 부바르와 페퀴셰
8.  프란츠 카프카 - 성, 소송
9.  로베르트 무질 - 특성 없는 남자
10. 헤르만 브로흐 - 몽유병자들
11. 비톨드 곰브로비치 - 페르디두르케
12. 제임스 조이스 - 율리시즈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 메모
 


1부 연속성의 의식
 
21쪽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일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있다.
 
24쪽
소설의 기술에서는 실존적 발견과 형식의 변형을 분리할 수 없다.
 
31쪽
예술 가치론: 예술의 영역에는 가치 판단을 위한 정확한 기준이 없다. 각각의 미학적 판단은 개인적인 판단의 몫이다. 그러나 자기 주관성에 갇혀 있지 않고, 하나의 판단은 다른 판단에 맞서 인정받고자 하며, 객관성을 열망한다. 집단의식 속에서 소설의 역사는 라블레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내내 이렇게 영속적인 변형 속에 있다.
 
34쪽
발자크 또는 도스토예프스키(최후로 발자크의 소설적 형식을 따르는 위대한 신봉자)의 장면들은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 너무나 희귀한 아름다움, 그러나 확실히 실재하며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에 갖게 되는 (또는 최소한 스쳐 가는)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중략)... 그것은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 즉 삶의 갑작스럽고도 농밀한 아름다움이었다.
 
36쪽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의 엠마 보바리와 레옹 사이에서 일어난 이별 장면을 인용하며) 문학에서 가장 에로틱하기로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전적인 진부함, 즉 위험하진 않지만 성가신 사람의 끈질긴 수다에서 시작한 것이다. 연극에서 위대한 행위는 또 다른 위대한 행위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오직 소설만이 사소한 것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
 





2부 세계문학
 
50쪽
유럽의 예술사가 보여주는 역동성과 긴 호흡은, 그 다양한 경험이 고갈하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이루는 국가들의 존재 없이는 생각하기 힘들다. /나는 아이슬란드를 떠올린다. 13세기와 14세기에 수천 쪽에 이르는 작품이 여기에서 태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전설과 영웅담을 담은 '사가(saga)'이다. 프랑스인이나 영국인도 이 시기에는 아직 모국어로 그런 작품을 써내지 못했다! 이 점을 끝까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유럽 산문의 첫 번째 위대한 도약은 오늘날에도 인구가 불과 3만 명을 넘지 못할만큼 무척 작은 나라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53쪽
프랑스인들은 국가 이름을 구분하는 데 익숙지 않기 때문에 나는 종종 카프카를 체코 작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는 1918년 이후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었다. 물론 이는 난센스다. 카프카는 독일어로만 글을 썼고, 자기 자신을 독일 작가로 또렷이 간주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체코어로 자신의 책을 썼다고 잠시 상상해보자. 오늘날 누가 카프카를 인정하겠는가?
 
54쪽
예술 작품의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콘텍스트가 두 가지 있다. 그 나라의 역사(이를 小 콘텍스트라 부르자)와 그 예술의 초국가적인 역사(이를 大 콘텍스트라 부르자). 우리는 음악을 大 콘텍스트 상에서 고려하는 데는 익숙하다. 반대로 소설은 모국어에 연결해 있기에 전 세계의 대다수 대학에서 오직 小 콘텍스트 상에서 연구된다. 유럽은 자신의 문학을 역사적인 통일성으로 사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여러 번 되풀이하건대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다.
 
55쪽
지리적인 후퇴는 관찰자를 지역적 콘텍스트에서 멀어지게 하며, 소설의 미학적 가치를 유일하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인 세계 문학의 大 콘텍스트를 파악하게 해준다. 그 미학적 가치란 소설이 해명할 수 있던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양상들이며, 소설이 발견해낸 형식의 새로움이다. /이는 어떤 소설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원래 쓰인 언어를 몰라도 된다는 뜻인가? 물론 그렇다!
 





3부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
 
87쪽
소설에서 고유한 독특성이나 독자적인 예술성을 보지 못하면, 소설의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소설은 자신만의 기원, 그리고 그에 고유한 리듬이 있는 자신만의 역사를 갖고 있다. 소설은 자신만의 도덕을 갖고 있으며 작가의 '자아'와 특수한 관계에 있으며 창조의 지속적 순간을 지니며 모국어를 뛰어넘어 세계로 열린다.
 
90쪽
소설의 기술을 그 심리적인 매혹(성격에 대한 분석)에서 은밀하게 벗어나 실존적 분석(인간 조건의 주된 양상을 밝히는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 향하게 한 전환은 실존주의의 유행이 유럽을 사로잡기 이삼십년 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소설 기술 자체의 발전 논리로 이루어졌다.
 
97쪽
소설가를 매혹시키는 역사란, 인간 실존의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고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도 보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 기능하는 역사다.
 
103쪽
현실을 주의깊게, 집요하게 들여다보면볼수록 모든 사람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실제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오랜 응시 속에서 현실은 점점 비상식적이라서 비이성적이고, 그래서 비개연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108쪽
필딩은 소설 예술이 아직 또렷한 정체성도, 이름도 없던 시대에 소설을 산문-희극-서사적인 글쓰기라고 명명했다. 이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희극은 소설의 요람 위에 몸을 기울이고 있는 신화 속 요정 셋 가운데 하나였다.
 
109-112쪽 곰브로비치의 작업실에서 바라본 소설사
그는 특히 라블레를 좋아한다 / 발자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 보들레르를 좋아한다 / 프루스트에게 매료당하지 않는다 / 동시대의 소설가중 누구와도 닮은 데가 없다 / 19세기 폴란드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 폴란드 문학에 대해서 대체로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 1920-30년대의 아방가르드를 좋아한다 / '참여문학'을 혐오한다 / 1950-60년대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특히 '누보로망'과 신비평(롤랑 바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곰브로비치에게 모더니즘이란 새로운 발견을 통해 물려받은 길을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114쪽
<백년의 고독>에는 장면이 없다! 그것은 취한 듯 흘러가는 너울같이 서술 속에 통째로 녹아들어 있다. 나는 이런 스타일을 보여주는 예를 달리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으면서, 이제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환상을 이야기하는 서술자에게 소설이 마치 수세기를 거꾸로 되돌아온 듯하다.

116쪽
어느 날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소설을 발견했다. 빈의 위대한 옛 작가 두 명의 소설처럼 사색이 넘치는 <죽음의 천사>(1974)에서 사바토는 말했다. 수백 가지 분야로 세분화한 과학으로 인해 분할되고, 철학에 버림받은 현대 세계에서, 소설은 인간의 삶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는 망루로서 최후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4부 소설가란 무엇인가?
 
120쪽
서정성의 개념은 존재 방식의 일종을 가리키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정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영혼과 그 영혼을 들려주고픈 마음으로 빛나는 사람의 대표적인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나는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생각해왔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이러한 가설을 근거로 하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서정적인 태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중략)... 소설가는 자기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123쪽
(<마담 보바리>를 쓸 즈음) 플로베르는 서른 살이었다. 딱 서정성이라는 번데기를 찢고 나올 시기다.
 
127쪽
진부하기만 한 서술과 낡아 빠진 상징으로 유명세를 얻은 소설은 소설사에서 제외당한다. 실제로 세르반테스가 새로운 소설 기법을 개척한 것은 바로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파괴적인 행위는 소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소설이라면 그 어디에서나 비춰지며 이어진다. 이것은 소설이란 예술을 증명하는 표시이니까.
 
129쪽
진정한 열정으로 만든 소설이라면 당연히 영원토록, 즉 작가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자 한다. 이러한 야망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지만, 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따라서 무익하고, 그러다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을 만들어 내는 소설가는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성실성이 지나친 야망이라는 기둥에 고약하게 묶여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소설가에게 내려진 저주다.
 
132쪽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단독자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광학 기구의 일종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기구를 독자에게 건네어 이 책이 없다면 아마 자기 자신 안에서 보지 못 할 것을 볼 수 있게끔 도와준다. 독자가 책이 말하는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133쪽
작품은 미학적 설계도를 따라 작업을 아주 길게 거친 다음에야 나온다. ...(중략)... 소설가라면 누구나 솔선하여 부차적인 건 몽땅 다 잘라내야 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핵심의 윤리를 권장해야 한다!
 
138쪽
어린 소년이 눈먼 할머니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때때로 그 어린 녀석이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 조심해, 나무뿌리야!" 그럼 그 나이 든 부인은 숲길을 걷는 줄 알고 폴짝 뛴다. 행인들이 이를 보고 어린 녀석을 나무란다. "이놈, 네 할머니를 그런 식으로 모시다니!" 그러자 어린 녀석이 대답한다. "내 할머니예요! 내가 하고픈 대로 할머니를 모실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조세프 카이너는 "자, 저 그리고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이야기를 맺었다. 나는 미숙한 혁명의 심술궂은 시선 하에서 당당히 작가의 권리를 외친 이 사건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140쪽
소설이라는 예술의 탄생은 작가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맹렬한 옹호와 이어져 있었다. 소설가는 자기 작품의 유일한 주인이다. 그 자신 또한 자기 작품이다.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늘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르반테스의 유산인 소설의 기술은 더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5부 미학과 인생
 
147쪽
행동하는 자는 이기기를 원한다. 승리자는 타자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므로 행위의 포기는 행복과 평화에 유일하게 이르는 길이다.
 
150쪽
아젤라리스트(웃을 줄 모르는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라블레가 고안한 그리스식 신조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희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희극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 희극을 도박이나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하여 희극의 끔찍한 본질을 폭로하니까.
 
161쪽
지옥(이 세상의 지옥)은 비극이 아니다. 비극적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 공포,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6부 찢어진 커튼
 
174쪽
비극에서는 비극적 운명이 전면을 차지한다. 플로베르의 소설에서는 길을 잃은 빛처럼 무대 저 안쪽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비극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176쪽
플로베르는 '상황들의 정수'에 도달하고자 했다. 상황들의 정수, 모든 인간사의 정수에. 그는 어디에서나 어리석음이라는 요정이 여리게 춤추는 모습을 본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요정은 선과 악도, 지식과 무지도, 엠마와 샤를도, 당신과 나도 있는 그대로 훌륭하게 받아들인다. 플로베르는 이 요정을 존재의 커다란 수수께끼라는 무도회에 초대했다.
 
180쪽
어리석음은 비극적 영웅의 위대성을 조금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어리석음은 '인간 본성'과 뗄 수 없이 어디서나 항상 인간과 함께 있다. 침실의 어슴푸레한 빛 가운데서든, 환하게 비춰진 역사의 길에서든.
 
194쪽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이지 이것은 확실하다. 아, 너무나 확실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거짓 증거들만 눈에 띈다. 실존적 증거들이 확실할수록 덜 드러난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7부 소설. 기억. 망각
 
201쪽
출처불명의 온갖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한 주석들은, 작가의 심리에 대해서 진부한 얘기만 쉴 새 없이 쏳아 놓다가, 막상 예술 작품 앞에서는 무력한 이 문학 이론이란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또 우리가 기억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준다.
 
203쪽
인간은 망각의 힘과 기억의 힘이라는 곧장 작동하면서 상호 협력하는 두가지 힘에 의해 과거와 단절하기 마련이다. ...(중략)... 우리가 늘 신뢰하고 순진하게 지표로 자발적으로 삼는 역사 그 자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확실한 것이 속하는 좁은 가장자리 이면에는, 무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다. 대략적인 것, 꾸며 대는 것, 변형된 것, 단순해진 것, 과장된 것, 잘못 이해된 것의 공간, 즉 쥐처럼 서로 교미하여 그 수를 엄청나게 불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非진리의 무한 공간이.
 
208쪽
소설가는 황폐화시키는 망각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만 할까? 소설가는 독자가 결코 자신의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오로지 건성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 곧장 잊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설을 잊을 수 없고 파괴당하지 않는 성채로 만들어 갈 것이다.
 
212쪽
소설 하나를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려면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한다. 그러면 단순히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각색을 통해서 위대한 소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화려한 무덤을 꾸미게 될 뿐이다. 그 무덤 앞 대리석 묘비의 짧은 글귀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218쪽
망각의 잊을 수 없는 충격은 노예의 섬을 꿈의 극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실제로 마르티니크인들이 그들만의 삶을 상상하고, 그들의 존재론적 기억을 창조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꿈에 기댄 것이었으니까. 망각의 잊을 수 없는 충격은 민담 작가들을 정체성을 탐구하는 시인들의 반열로 끌어올렸고, 나중에 그들의 환상과 광기와 더불어 숭고한 구전 유산을 소설가들에게 물려줬다. 이 소설가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을 가깝게 느꼈다. 그들의 소설은 아주 독창적이고 그들의 섬뿐 아니라 소설의 현대적 기법, 세계 문학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219쪽
현대 유럽은 더 이상 철학과 예술을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거울로 삼지 않는다. / 그러면 그 거울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야 우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까?
 
225쪽
카지미에시 브란디스의 <제3의 앙리>에 참 웃기는 구절이 나온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어느 폴란드 망명자가 자기 나라 문학사를 가르친다. 아무도 폴란드 문학사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장난삼아 세상에 있지도 않은 작가들과 작품들로 구성한 문학사를 꾸며낸다. 대학 학기가 끝나 갈 무렵에 그는 이 상상의 역사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는 본질적 기준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닫고 이상하게도 실망한다. 그는 일어나지 못할 사건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저지른 장난은 폴란드 문학의 의미와 정수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228쪽
편지라는 것은, 서신 교환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횡설수설하다 어느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마음대로 넘어갈 수 있는 고백이다.
 
230쪽
예술 작품이 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오면 훌륭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232쪽
나는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혀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예술이 한번도 말해지지 않은 무엇을 그만 찾고 다시 유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예술은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개인이 기쁜 마음으로 순순히 획일적인 존재가 되도록 도우라고 요구하는 집단의 삶에 봉사할 테지. / 왜냐하면 예술의 역사는 덧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커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