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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은 인생과 같다. 장엄한 대서사시, 다양한 인간군상, 그리고 이성을 잡아먹는 절대적 허무. 처음 이 책을 읽은 것이 2년 전 이맘때쯤이었는데, 다시 서랍에 박혀 잠자던 책을 꺼내 펼쳤다. 책장을 넘기면 펼쳐지는 해양 모험의 세계, 그리고 악명 높은 고래 설명 백과사전까지. 사실 처음 책을 읽을 때도 남들은 재미없다고 하는 고래 백과사전 부분이 나름 흥미진진했다. 고래와 바다를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이라고 해야 하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면서 경외하는 본능이 있다. 나에게는 바다가 그 존재이다.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는 하늘엔 뿌려놓은 별들이 가득하고, 밑으로는 한 길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마무시한 파도가 넘실댄다. 수평선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견시 선원은 왜 먼 옛날부터 바다 괴물 전승이 널렸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인간 따윈 한 입 거리도 안 된다는 듯,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다는 공포를 넘어 굴복하여 숭배하게 만든다.


작가 허먼 멜빌도 포경선 승선 경험이 있는 선원 출신이었다. 정박도 하지 않는 배를 타고, 평평해지는 법을 모르는 바다 위를 둥실둥실 뜨는 배는 그 자체로 고역이다. 거기에 책에서도 묘사되듯, 매번 잡을 때마다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고래잡이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래와 바다를 신처럼 동경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터져 나오는 경외심과 두려움의 결과물이 그가 심혈을 바친 『모비 딕』이다.



절대적 존재와 필멸의 인간


이 소설의 핵심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절대적 존재 앞에서 유한한 인간은 어떤 반응을 하는가.’이다. 흰고래 모비 딕은 포경선을 공격하고 다니며 침몰시키고 유령처럼 잡히지 않는 향유고래이다. 모비 딕은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각각 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고래에게 다리를 잃은 후로 악착같이 쫓아 복수하려는 선장 에이허브는 무모할 정도의 집착을 보인다. 포경선은 기본적으로 수익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선주와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 안전 운행이 기본이다. 그런데 에이허브만은 피쿼드호에서 본인 목숨을 포함, 배를 던지면서까지 모비 딕에게 복수를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이다. 스페인 금화를 돛대 기둥에 못 박아 연설하는 상징적인 장면은 그가 얼마나 모비 딕에 미쳐있는 인간인지 보여준다.


1회차에 읽었을 땐, 에이허브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 나간 독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2회차 독서를 해보니, 그가 모비 딕에 미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우선 그의 이름인 에이허브부터 성경에서 폭군으로 유명한 아합의 영어 이름이다. 기독교 모티브를 많이 쓰는 멜빌의 소설에서 이 이름은 중요하게 해석된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이 이름을 절대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테지만, 작 중에서 언급되듯 선장의 어머니도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태생부터 광기를 물려받은 운명의 장난이다.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를 접한 인간들은 미치거나,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 에이허브는 모비 딕에게 다리가 절단될 때부터 이미 인간을 뛰어넘게 된다. 모비 딕에게 영혼이 종속된 존재, 작살줄 따라 고래를 쫓는 포경 보트와도 같다. 그가 모비 딕을 쫓는 이유는, 그러지 않고는 실존의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모비 딕과 함께 운명을 함께해야 하는 에이허브는 고래를 증오하면서도 고래를 옆에 끼고 있어야 하는 모순적 존재다.


이슈마엘과 기타 인물들.


한편, 이슈마엘은 에이허브와 같은 인물이면서 방식이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아들로 쫓겨나 광야를 떠돌던 성경 속 이스마엘처럼, 그는 떠돌이 인생이다. 우울해서 미칠 거 같을 때 총과 총알 대신 배를 탄다는 첫 장의 고백처럼, 의미를 찾아 설명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인간상이 이슈마엘이다. 작 중 화자의 시선이자 홀로 살아남아 피쿼드호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는, 광야의 외톨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이 작품을 어렵고 곤란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질퍽한 만연체이다. 특히 영어 원문은 끝도 없는 관계대명사 사용과 문장부호로, 번역가를 괴롭히는 소설이라고 한다. 이 만연체도 결국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에이허브와 마찬가지로 모비 딕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목격한 이상, 그는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다. 취객이 지껄이듯, 끊임없이 뱉어내고 토해내야만 존재할 수 있다. 특히 유명한 고래를 설명하는 백과사전 파트는 독자를 괴롭히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고래의 종류부터 크기, 생태, 역사, 문화 등을 총망라하는 이 정보들은 간혹 틀린 정보들도 많고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하지만 이 역시도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슈마엘은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고래를 설명하고 해부하려는 인물이다. 신과 같은 존재를 인간과 동등한, 설명 가능한 존재로 끌어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중략) 고래에겐 얼굴이 없다고.’

86장 중

그러나 이슈마엘의 연구는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인간은 고래를 알 수 없다. 매번 그의 측정과 연구는 실패로 돌아가고, 분류하지 못한 채 경외와 좌절로 끝이 난다. 이슈마엘에게 고래란 그런 존재다. 너무나 절대적이기에 이성으로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미칠 거 같은 인간이다.


한편, 스타벅, 스터브, 플래스크 같은 항해사들에겐 고래란 그저 돈벌이 수단이고 사냥감이다. 스타벅은 일등항해사로서 광기에 빠진 선장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신중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은 결국 그를 파멸로 가는 길로 인도한다. 스타벅은 그저 고래에 불과한 존재에게 복수하는 에이허브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리려 한다. 그는 안전하게 항해하여 선원의 목숨과 수익을 챙기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스터브는 세 항해사 중 제일 분량이 많은 이등항해사다. 매사 유쾌하고 쾌활하고 말 많은 그가 고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413장 「스터브의 저녁식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슈마엘이 분석하려 하는 고래도, 에이허브가 복수하고자 하는 고래도, 그에겐 그저 한 입 맛있는 저녁 식사일 뿐이다. 이 장에서 유독 스터브가 고래고기로 스테이크 해 먹는 장면이 해학적이고 탐욕스럽게 묘사된다. 그에게서 고래는 돈이고 고기일 뿐인 유물론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터브 같은 사람들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이지만, 속은 공허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고래를 뜯어 먹는 상어를 꾸짖는 스터브는 그 자신도 상어와 같은 식탐과 야만적 본능을 가지고 있음을 모른다.


태시테고, 대구, 퀴퀘그는 피쿼드호의 작살잡이로, 일반 선원 중 비중 있는 주역이다. 이 셋은 각각 인디언, 흑인, 오세아니아 원주민 출신이다. 모두 당대 미국 사회에서 야만인, 이교도로 불리던 소수자다. 그러므로 백인 기독교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 따위는 없다. 작살잡이에게 중요한 것은 고래에 맞설 용기, 명예뿐이다. 그들은 포경선을 일종의 전장으로 생각하여, 자신들의 전사 혼을 불태우기 위해 고래를 사냥한다.

피쿼드호의 침몰 장면이 이들의 성향을 제대로 그려낸다. 에이허브는 작살줄에 목 감겨 끌려가고, 스타벅은 신을 찾으며, 스터브는 버찌를 먹고 싶어 하고, 플래스크는 담담히 어머니와 돈 걱정을 한다. 세 명의 작살잡이는 돛대 망루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특히 태시테고는 마지막까지 못질하면서 바닷새 한 마리를 지옥의 길동무 삼아 데려가는 장면이 백미다. 이들의 최후는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으로 연출된다. 오직 이슈마엘만이 운명처럼 퀴퀘그의 관을 붙잡고 구조 당한다.


죽음의 관이 생명이 되고, 성경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인 ‘라헬호’가 이슈마엘을 구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남의 생명으로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이 피쿼드호와 고래를 저술하는 ‘목격하고 기록하는 자’의 운명을 이끈 것이다. 결국 고래를 두려워하고 기록하려 한자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어떤 현상에도 무의미한 진공상태를 싫어한다.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하려 한다. 그것이 세속적 유물론일 수도, 명예일 수도, 증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 전해지는 건, 인간의 이성과 기록이다. 비록 불완전하고 허점이 많더라도, 그 시도 자체가 숭고하다.


모비 딕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모비 딕은 단순 고래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존재, 가령 신, 타자, 심지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결국 모비 딕은 정복되거나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경외의 대상으로서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모비 딕은 그저 고래일 뿐이고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 이슈마엘이 그토록 방대한 백과사전 지식을 동원하고도 고래의 얼굴을 정의하지 못했듯, 우리 역시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모든 파도를 다 읽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미지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는 용기다. 비록 불완전한 기록일지라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슈마엘의 태도야말로 절망적인 바다에서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관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