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쇼와 일왕의 죽음, 혹은 동유럽 공산당 정권의 붕괴에 촉발되어 역사나 시대의 '종언'을 둘러싼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기억에 생생하다. 한편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로 대표되는 속류 헤겔주의적인 '종언'론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반(反) '종언'론이 다양하게 주장되었다.


후쿠야마는 "이것(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중요한 변화 ―――인용자 주)은 다음과 같은 역사의 종언을 의미한다. 즉, 인류의 이데올로기적인 진전은 종점에 달했으며, 구미의 민주주의가 인류의 통치 형태로서 궁극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역사는 끝났는가")라고 말했고, 아사다 아키라는 이를 비판하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모던의 시작이며,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의 시작이기도 하다고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의 끝이란 곧 역사의 시작에 다름 아니다"("역사의 끝 역사의 시작")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나는 '종언'론에도, 각종 '종언' 비판에도 똑같이 납득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느꼈다. 헤겔주의적인 '종언'의 주장에는 어딘지 모르게 권력적인 악취가 배어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인 체하며 역사나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자는, 스스로를 푸코가 『감옥의 탄생』에서 서술한 판옵티콘의 감시자 위치에 두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역사나 시대가 '종언'했다고 여겨지는 지점은, 종언 이전의 사람이나 사물,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특권적인 전망대이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며, 그리고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종언 이전의 사람이나 사물, 사건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즉자태(即自態)이다. 그것들은 저 특권적인 전망대에서 보여짐으로써만 대자화(對自化)되며,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 또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파악되고, 위치지어지고,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그것들은 조망자에게 소유되고 지배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종언'론의 구도이며, 역사나 시대를 완료된 것으로 파악하고 위치지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자는, 결국 지나간 역사나 시대의 궁극적인 지배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종언'론을 말하기 시작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애잔한 권력 지향이나, 무력감의 이면인 자기 특권화의 충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종언'을 외침으로써 의제적으로라도 역사나 시대나 세계를 소유하려고 작위(作為)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혼탁이나 의미의 산란,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취약한 정신이 억지로라도 세계를 정제하고 투명하게 만들어버리려는 도착적인 관념적 욕망이 그곳에 있다.


'종언'론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나는 대체로 이상과 같은 감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종언' 비판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해도, 지금 새삼스레 어떤 일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특히 동유럽 공산당 정권의 붕괴에 촉발되어 다양하게 회자된 '종언'론에 대처하기에, 이 같은 비판은 근본적으로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내 자신의 발상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언' 비판의 언설에서 나는 무언가 반응이 없는, 미덥지 못한 것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공산당 정권, 혹은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진리국가=수용소국가의 존재 그 자체가 1917년부터 1989년까지 20세기의 대부분의 시기를 차지하며, 사실상 '종언'론을 제도적으로 체현해 온 것이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명백하듯, 역사적인 진리를 잉태한 당이란 다름 아닌 헤겔의 대타자(für uns)이며, 요컨대 저 특권적인 전망대와 다를 바 없다. 역사의 전망대가 판옵티콘의 감시탑 그 자체로 실현되는 필연성은, 진리국가가 동시에 수용소국가로 조직된 사실에 의해 분명하게 입증된 바와 같을 것이다.


루카치식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적은 없을지언정, 그것이 최고 수준에서 레닌주의를 철학적으로 기초짓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신이 단순한 실증주의나 객관주의였다면, 그것이 지적 대중의 도착적인 관념적 열정을 도발하고 흡인하여 '혁명'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결과 따위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공산당 정권의 붕괴란 20세기에 맹위를 떨친 헤겔-마르크스주의적인, 한때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최대급 '종언'론의 제도적 붕괴이며, 굳이 말하자면, 그 종언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결국 1989년의 사태는 '종언'의 끝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헤겔주의에 대항했던 '종언' 비판 또한 역시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종언'은 종언을 고했고, '종언' 비판도 종언을 고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종언'에 대해 말하는 것의 의미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이한 장소로 1989년 이후 우리들의 세계는 끌려나온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후쿠야마 류의 '종언'론 같은 것은 애초에 문제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미 '종언'이 끝난 것이며, 종언을 둘러싼 언설 일체가 그 존립 기반을 빼앗긴 것이다. 반복하지만, '종언' 비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의 표층을 뜻밖의 균열이 가로지를 때, 그 흔적을 목도하는 자는 그 불의의 사태에 대처하려는 선의에서 으레 무엇인가의 끝을 예언하고 만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입에 올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착각하고, 거의 무의식 중에 유희의 규칙에 어울리는 홀가분함으로 자신이 지금 사로잡혀 있는 이야기의 주제를 말해버리고 마는 것이다"(『이야기 비판 서설』)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 풍의 '종언' 비판은 그 '이야기' 비판의 운명을 반복하듯, 또다시 우열한 지적 풍속으로 변하여 무슨 일이든 '끝났다'라는 말을 금기어로 삼고 그것을 마녀사냥하듯 사냥해대는 어리석은 풍조를 가져왔다. 그곳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에 의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자신이 어느 레벨, 영역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구획도 그 자체로 시작과 끝(목적)을 찾아내는 것인 이상, 그것이 어떠한 목적론적 배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해 두는 것이다"(『종언을 둘러싸고』)라는 신중한 유보는 무시되거나, 혹은 망각되었다.


레닌은 혁명의 조건으로서 "사람들이 더 이상 어제와 같이 살 수는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혁명의 조건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1989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이 살 수 없으며, 또한 어제와 같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는 장소로 끌려나와 있다. 우리 존재의 기반 자체가 낯선 것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단어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을 '끝났다'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겠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부딪혔다'라는 인상이 더 강한 것 같다.


우리는 무언가에 부딪힌 것이며, 그 경험의 절실함에 대해 이러저러한 '종언'론이나 '종언' 비판의 언설은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가토 노리히로는 예전에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발언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요시모토는 북극의 얼음이 녹아 세계의 수위가 올라가, 지금까지 육지였던 곳이 어느새 대부분 수몰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영역을 넓혀가는 바다 부분과 나날이 넓이를 좁혀가는 육지 부분이 5대 5, 혹은 6대 4로 길항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회'와 인간의 '내면'의 대립은 현실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위가 더욱 상승하여 인간의 '내면'이 '사회'에 의해 9할 9푼까지 침투당하고 뒤덮이게 되는 사태를 앞두고, 여전히 만약 소설가가 인간의 '내면'(고독)과 '사회'의 종래의 관계식에 입각하여 소설을 쓴다고 한다면, 그 소설은 그가 살아가는 세계의 전체 현실 중 남은 1푼을 덮는 데 불과하다. 또한 그렇게 소설을 쓰면서 만약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전체 현실에 입각해 있다고 간주한다면, 그는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로부터 무의식 중에 눈을 돌리고 동시에 깊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너와 세계의 싸움에서는, 세계를 지원하라』)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선뜻 찬동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다. 내면과 사회를 대립시키는 발상이 너무나도 고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러한 내면의 소멸 혹은 부재를 전제로 과거 20년 이상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 아니, 20세기의 정신 자체가 19세기적인 내면의 소멸을 전제로 생겨난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의 정신이란 정신의 부재와 다름없다.


가토의 발상에 대한 의구심은 그 후에 출간된 『일본 풍경론』, 그리고 이번에 다루는 『완만한 속도』로 상당한 정도까지 해소되었지만, 그 위에서 또다시 새로운 의문도 생긴 것 같다.


아마도 가토 노리히로에게 최근 세 저서에서 이야기되는 것 같은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저 '부딪힌' 경험의 절실함일 것이다. 『너와 세계의 싸움에서는, 세계를 지원하라』에서는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대중 이미지론(マス・イメージ論)』과도 상통할 고전적 시민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고도 정보사회나 고도 소비사회에 대해 생각하려는 자세가 인상적이었으나, 『완만한 속도』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종언'의 끝을 둘러싼 주제 영역에까지 도달하려 하는 듯하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역시 필연적인 변모의, 무언가에 '부딪힌' 경험의 절실함에서 아마도 『대중 이미지론』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는 1989년 이후의 우리가 '부딪혀' 있는 경험의 일부만이 다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대중 이미지론』은 이러저러한 '종언' 비판론자들의 비판에 노출되었다. 거기에 어느 정도 보이는, 보드리야르풍이기도 하고 리오타르풍이기도 한 포스트모던론적인 색채가 '종언' 비판론자들의 반감을 도발했을 것이다.


외부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문제는 오히려 명료하다. 보드리야르나 리오타르, 그리고 요시모토 다카아키 논의의 전제를 이루고 있는 과거 20년간의 세계 자본주의의 초고도화와 '모던의 종언'이나 '노동 가치의 종언' 혹은 '고전 근대의 종언'은 결과적으로 동유럽의 반공산당 혁명과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대중 이미지론』의 작업은 확실히 우리가 사고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세계의 변모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세계 자본주의의 초고도화에 촉발된 각종 '종언'론은 그 자체로 1989년 이후 세계의 변모에 대해 충분히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적 진리국가=수용소국가의 붕괴에 의해 '종언' 그 자체가 끝났기 때문이다.


가토 노리히로는 『완만한 속도』에서 내면과 사회를 대립시키고 후자가 전자를 급격히 침식하고 있다는 예전의 논의를, 『대중 이미지론』의 '변성론(変成論)'이나 와카모리 에이키의 라캉론 『정신분석의 공간』을 보조선으로 활용하면서, 카프카의 『변신』을 소재로 삼아 새삼 검토하고 있다. 가토의 잠정적인 결론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계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지금 우리들에게 찾아오고 있는 '세계의 변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 외부 세계의 격변이기는 하겠지만, 거기서 '세계'는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다. "세계가 변한다", "세계가 세계가 아니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외부 세계의 변화가 나에게 미치는, 그것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으로서 현전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세계의 변모에 대한, 바다와 육지의 비율을 둘러싼 과거의 양적인 비유는 이미 극복되었다. 사회가 내면의 영역을 침식하고 있다는 파악의 최대 난점은 모든 이원론적 사고가 그렇듯이 배후에 특권적인 제3항을 숨겨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한쪽에 사회를, 다른 한쪽에 내면을 이항 대립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은 요컨대 누구인가. 양자를 머리 위에서 조감하며 그 세력비를 계량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사회와 내면을 대립시키는 가토의 논의는 이러한 반문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세계가 세계가 아니게 되는 것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에서 현전한다는 인식은 예전에 보였던 이원론의 함정을 면하고 있다. 이전의 논의에서는 인식하는 자가 문제 영역의 특권적인 외부에 위치해 있었으나, 이제 인식하는 '자신' 그 자체가 세계와 자신의 변모라는 문제 영역의 내부에 휩쓸려 들어가 있는 것이다. 『완만한 속도』에서처럼 다시 이야기됨으로써 『너와 세계의 싸움에서는, 세계를 지원하라』에 대해 품었던 위화감은 당분간 해소되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새로운 의문 또한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나 『노르웨이의 숲』의 평가를 둘러싸고 있다. 위와 같은 카프카의 『변신』 독해를 전제로, 가토는 『댄스 댄스 댄스』를 "이러한 '세계의 변성' = '자기의 변성'의 이야기"라고 평가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시작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4부작에서 제3작인 『양을 쫓는 모험』까지의 작품은 "'나는 변하지 않는데 시대(외부 세계)는 변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댄스 댄스 댄스』는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내가 변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 사실만을 안다, 무슨 일일까'라는" 수준에서 쓰여졌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요컨대 "『댄스 댄스 댄스』는 이러한 전면적인 '세계의 변성' 속에 놓인 '나'의, '어디에도 없는 자신'을 탐색하는 이야기이다". 가토는 "이 소설은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유보하면서도 "그러나 여기서 무라카미가 행하고자 했던 것이 적어도 이 '변성된 세계' 속에서 지금까지 누구도 하려 하지 않았던 것임은 분명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의 쥐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종언'의 끝을 예고하고 있었다. 라고, 지금이라면 그렇게 다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양으로 상징되는 '종언'의 이념과, 그것을 부인하고 죽음을 택한 쥐의 '종언' 비판의 대립 구도는 그러나 이미 실효되었다. 그 '부딪힌' 경험의 절실함이, 가토의 지적에 있는 것처럼 작가에게 제4작으로 『댄스 댄스 댄스』를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돌핀 호텔의 이공간에서 화자가 대면하는 양 사나이는 죽은 쥐의 분신이지만, 그는 "무언가가 나와 연결되려고 해. 그래서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찾고,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야. 나는 분명 무언가와 결합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런 기분이 들어. 저기, 나는 다시 한번 시작해보고 싶어"라고 간청하는 나에게 "잘 될지는 모르겠어. 나도 나이를 좀 먹었어. 이제 예전만큼의 힘은 없을지도 몰라"라고 응답한다. 그리고 양 사나이는 마지막으로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추는 거야. 내 말 알겠어? 춤춰. 계속 춤추라고" 하고 조언한다.


확실히 『댄스 댄스 댄스』는 가토가 평가하듯이 '종언'마저도 종언을 고하고 세계의 변모가 자신의 변모로서 강요되는 듯한 자각 속에서 쓰인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도는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았다. 가토가 『댄스 댄스 댄스』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노르웨이의 숲』이다.


가토 노리히로는 먼저 나카노 시게하루의 『마을의 집(村の家)』을 거론하며, "벤지는 '파렴치한'으로서 아버지의 '올바른' 재촉, 그 '심정'을 물리친다. 여기에 있는 것은 '올바름'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마고조의 재촉을 '올바름'으로 보고 이를 부인하는, 무근거성의 시선인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을의 집』의 주인공에게서 발견되는 '무근거성'을 보조선 삼아 『노르웨이의 숲』이 검토되어 간다.


가토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숲』이란 "근거 없는 자신에게 있어 '진짜'의 길을 끝까지 더듬어, 주인공이, 또 글쓴이가, 마지막에 '어디에도 없는 장소'에 이른다는 그곳까지 가는 길"을 이야기한 소설이다. 미세한 부분에 이르는 가토의 '읽기'에 대해 소개할 여유가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나는 그 논리에 역시 의문을 느꼈다.


벤지의 '파렴치함'과 상통하는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의, 그리고 작가의 '파렴치함'에서, 바꾸어 말해 나카노 시게하루가,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무근거성'에서 20세기의 전쟁과 혁명의 시대는 생겨났다. 그리고 진리국가=수용소국가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관념적 도착이, 혹은 제도화된 '종언'의 언설이 생겨났다. 『노르웨이의 숲』의 치명적인 약점은 마지막에 주인공이 헤매어 들어가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야말로, 이 인물이 작중에서 끊임없이 조소하고 있는 바리케이드 학생의 공허한 래디컬리즘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인식의 완전한 결여에 있다.


정신의 부재야말로 20세기의 정신이며, 내면의 결여야말로 20세기의 인간을 정의하고 있다. 정신의 부재가 절대정신의 등가물이나 다름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필연적으로 불러들이고, 관념적 도착과 자타에 걸친 테러리즘의 홍수를 가져왔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경험들을 숙지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비판 또한 진지한 것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미 문제는 그 앞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부딪혀' 버린 경험을 절실한 것으로서 강요해 온다. '종언'의 끝은 '정신의 부재'의 부재를 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토 노리히로는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람은 이 소설에서 무언가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 가령 '능동적인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는 감촉을 받을 텐데, 여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이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세계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길을 더듬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어떠한 '능동적인 자세' 혹은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이러한 악한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 혹은 '자유'로 이어지는 회로를 모두 차단당한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떻게 그에게 있어 '진짜'를 손에 넣는 길을 더듬어 가는가, 그런 것들이 질문되고 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세대가 다른 요시모토 바나나에게는 이상과 같은 질문 자체가 전제로서 봉쇄되어 있다. 『키친』 이래 요시모토가 그려온 세계는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세계" 그 자체이며,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종언' 이후의 감성이다. 『댄스 댄스 댄스』의 주인공에게는 그래도 상실감의 절실함만큼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요시모토의 주인공들에게는 "꿈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누군가조차도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신의 부재는 한때 정신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있어야 할 것,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공위(空位)의 왕좌는 신하에게 견디기 힘든 공허함이나 상실감을 강요할 것이다. 신하는 가짜 왕을 왕좌에 앉히는 기만을 범해서라도 그 공허함이나 상실감을 관념적으로 보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신의 부재'의 부재는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관념적 도착의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분명 정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결여되어 있는 부정적인 사태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아니, 『키친』의 사쿠라이 미카게부터 『N・P』의 가노 후미에 이르기까지 요시모토 바나나의 주인공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황폐함을 의미하는 것일까. 요시모토의 작품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세계"를, 있어야 할 것이 상실된 부정적인 세계라고는 느끼지 않는 인간에게조차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길을 더듬어 가는가"라는 물음이 여전히 고지식할 정도로 고지식하게 살아지고 있다는 사태인 것이다.


그 고지식함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물론 고유한 윤곽을 부여받은 주체나 보편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세계 등등일 수 없으며, 그것들이 상실되었다는 공허함이나 상실감일 수도 없다. 그것은 아마도 정처 없이 부유하다가 문득 피부에 닿는 미묘한 수온의 변화에 놀라며, 그것을 샅샅이 맛보려고 애쓰는 듯한 감성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것은 사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취미라는 말로 불려 온 듯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신작인 『N・P』에서는 이상의 맥락에서 보아도 몹시 흥미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두 명의 어른이 自殺해 있는데, 가령 自殺한 두 어른이 『댄스 댄스 댄스』의 '나'와 동형적인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화자인 후미나 친구인 세 명의 젊은이는 각기 自殺한 어른의 기억에 주박(呪縛)되어 있다.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自殺한 작가의 『N・P』라는 단편집이며, 그리고 책에는 수록되지 않은 98화의 이야기이다.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自殺한 어른 두 명과, 같은 세계를 자명한 것으로 살 수밖에 없는 젊은이 네 명이 대면하고, 혹은 캐릭터적으로 대결한다. 작가의 모험적인 의도는 명백하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N・P』는 『하얀 강 밤배(白河夜船)』나 『티티새(TUGUMI)』의 성취에는 미치지 못한다. 죽음의 쪽에 있는 어른의 리얼리티가 생의 쪽에 있는 젊은이들의 그것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어른은 생기를 잃어 왠지 목각인형 같고, 결과적으로 목각인형의 기억에 주박되어 있는 젊은이 또한 요시모토의 다른 작품 속 인물과 비교해서조차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만다.

  오토히코를 보았다. 눈물에 번진 하늘과 바다와 모래와 모닥불의 흔들리는 불꽃을 보았다. 아찔한 속도로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아름답다, 모든 것이, 일어난 일의 전부가, 미칠 듯이 격렬하게 아름답다.

이상이 작품의 마지막 한 구절인데, 그곳에는 작가가 기대하는 만큼의 리얼리티가 달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똑같이 세계의 변모에 직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른과 젊은이는 당분간 너무 상대방을 신경 쓰지 말고 각자의 과제를 추구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N・P』를 읽고 그런 인상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