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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에 비하면 분량이 긴데, 전반적으로는 사후에 대한 얘기, 혼의 불사불멸에 대한 얘기였음.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주장은 조금 위험해 보임.


"생전에 우리가 지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몸과 어울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몸과 함께하는 것을 되도록 피하는 것이오."


<<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엄밀하게 이행하게 된다면, 갓 태어난 아기를 즉시 죽이는 것을 긍정하게 됨.
물론 덕에 의하면 누가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일 수 있을까? 싶지만 그건 뒷전으로 하고 갓 태어난 아기의 입장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죽는 이 상황이 소크라테스의 논리에 의하면 불의한 일이 아니라 가장 농밀한 순수함인 채로 몸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아기에게 있어서는 훌륭한 사건이었다고 해석하게 될 여지가 있음.
즉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긍정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삶 자체를 부정하게 됨.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자,살을 긍정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 언급된 내용을 기억하는데 어떤 저서였는지 기억이 안남. 크리톤인줄 알았는데 뒤져봐도 안 나오네.
신의 관점에서 피조물을 창조했는데 그녀석이 갑자기 지혼자 자,살하면 심정이 어떻겠느냐?
하면서 자,살을 부정했던걸로 기억함.

이렇게 검토하면 논리가 일관되지 않고 뒤죽박죽인데, 소크라테스가 재판 초반만 하더라도 
아무도 죽음을 알지 못한다, 죽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고 변론 후반의 사후에 대한 설명이 빈약한 점(해당 감상문에서 지적함)을 보면
플라톤 대화편들을 하나의 정교하고 유기적인 체계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함.

그런 점에서 크리톤은 내용의 완성도가 높고 내용이 합리적이라서 좋음. 대화편 랭크를 매기면 S티어를 줄거임. 참고로 변론은 E 정도

다시 파이돈으로 돌아오면, 혼과 몸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먼저 감각은 불완전하고 생물체로서의 몸뚱아리는 존재 자체가 일종의 방해물이기 때문에 철학자의 혼은 몸에서 벗어나려 하며, 사물에 대해 순수한 지식을 갖고자 한다면 몸에서 벗어나 대상 자체를 혼 자체로 관찰해야 한다면서 죽음을 긍정함. 더 나아가 지혜는 사후에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함. 
또한 생전에 몸에서 멀어지며, 몸의 본성에 오염되지 않게 하며, 몸으로부터 정화하며, 순수한 채로 죽음을 맞이해 순수한 것에 도달하는 것을 진리라고 정의함.

여기서 갑자기 덕에 대한 얘기로 길이 새면서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데, 애초에 내가 플라톤 대화편들을 읽는 목적도 플라톤의 미덕에 대해 알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중요함.

이 책의 주요내용은 죽음과 혼에 대한 것이지만, 나는 미덕을 중점으로 접근할거임.

아까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의 논의에 의하면 이제 지혜는 사후에 얻을 수 있게 되어버림.
즉 저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어디에서도 순수한 지혜를 찾아낼 수 없음.
그럼에도 진정한 미덕(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은 오직 지혜와 함께한다고 함. -> (이게 문제임. 그러면 인간의 삶에서 미덕이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거지? 이승에서는 순수한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데?)
즉 지혜는 일종의 정화의식이고, 절제, 정의, 용기는 정화도구로 볼 수 있음.
또한 이후 혼에 대한 논의를 할때 혼은 이미 지혜를 갖고 있다고 언급함.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대한 설명은 내가 생각하는 지혜랑 꽤 달라보임.
혼이 몸의 방해에서 벗어나 헤매기를 멈추고 같은 부류의 것(순수하고 항상 존재하고 죽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과 접촉하여 변함없이 항상 같은 상태가 지혜라고 함.
나의 해석을 첨가한다면 지혜란 '혼의 순수한 사유상태'라고 생각됨.
이렇게 해석한다면 지혜의 유무보다는 지혜의 농도, 정도로 접근하여 위 문제를 어느정도 타협 가능함. 가능한 몸보다 혼에 귀를 귀울이며 다듬는다면 삶 속에서도 지혜로움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겠지.
참고로 소크라테스적 흑백논리가 대화편 전반에 깔려 있는걸로 느껴지는데, 예를 들면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에 대한 내용(이와 유사한 모든 방식에 대해)은 온도의 정도로 치환 가능하며, 이거 메논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여서 그때도 언급할듯.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용기에 대한 역설이 흥미로움.

"철학자가 아닌 사람이 죽음을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 큰 재앙이 두렵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철학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용감한 것은 모두 두려워하기 때문일세.
하지만 누가 두려워하고 비겁하기 때문에 용감하다는 것은 분명 불합리하네."


<< 이런 얘기를 한 발단은 진정한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와 일반적인 대중에 대해 미덕의 진정성을 구분하기 위함이고, 구분하려는 이유는 삶에서 혼을 갈고닦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큰그림에 대한 작업으로 보임.
예를 들어 기사가 열세의 전투상황에서 도망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나, 명예를 더 우선시한다면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논리는 현재의 소크라테스에도 두려움의 말장난으로 적용 가능함.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적당한 벌금형으로 살아남을 수도, 몰래 탈옥하여 다른 나라에서 여생을 살아가는 것도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나, 미덕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최선의 원칙을 어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혼을 더럽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등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음.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고 반박하게 된다면, 역으로 그것을 이용해 위의 기사에 대한 예시에서도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마치 미덕을 그저 우선시 하듯이 그저 명예를 우선시했을 뿐이라고 반박할 여지가 있음.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유사하게 절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역설을 얘기하는데, 이 역설은 조금 더 조잡한게 용기는 용기<->두려움의 대비가 있어서 어느정도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을 쾌락과 무절제에도 적용하여 조금 억지스러운 혼합물이 되어버림.

이후 대립되는 것에서 대립되는 것이 생긴다는 얘기는 합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내용인데, 갑자기 옮아간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이 있음. 전자는 단순한 비교인데 후자는 아예 상태변화이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납득하기 어려움. 
소크라테스는 수면상태와 기상상태를 비교하며 이 옮겨감에 대한 비유를 구체화시켰지만, 큰 것과 작은 것을 비교하는 거랑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은 다른 얘기임.
죽음을 잠드는 것에, 삶을 깨어나는 것에 대입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매일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하기 때문에 혼과 몸의 매커니즘 이론의 직관적 표현에 적합하므로 이걸 중심으로 잡은걸로 보임.

"만약 대립되는 둘 사이의 생성과정이 마치 원을 그리듯 언제나 서로 균형을 이루지 않고, 생성이 한 점에서 그와 대립되는 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거나 굴절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모든 것이 같은 모습을 띠고 같은 처지가 되어 생성하기를 멈출 것이라는 점을 자네는 알겠는가?"


<< 이 문장은 그 자체로는 그러려니 하지만, 두 가지 우주종말 가설 모델이 연상되어서 재밌음. 

배움은 상기 이론에 대해서는 흥미로운데 메논까지 다 읽고 한번에 생각해보고 싶음. 경험론이나 선험적 지식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논의되고 있어서 정말 신기함.

소크라테스는 혼을 신적인 것, 불멸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으로, 몸을 인간적인 것, 죽게 되어있는 것, 형상이 다양한 것으로 두어 대비하는데, 이걸로 혼의 편에 미덕이라는 기준을 마련하여 도덕을 제시하는 게 플라톤의 철학이라고 생각됨.
내용에 대해서는 삶에서 혼이 몸에 어울리고 익숙해지면 죽고 분리된 후에도 오염되어 있는 상태라고 하는데, 이것은 혼이 '변하지 않는 것'에 위배되는 게 아닌가?
즉 도덕을 강조하기 위해 혼의 격을 신적인 것에서 인위적으로 끌어내린 것으로 느껴짐. 더 나아가 직관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정말 혼이 신적인 것이라면, 소크라테스의 혼과 연쇄살인범의 혼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느껴짐. 물론 그렇게 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혼과 개념 자체가 달라짐.
재밌는 점은 심미아스의 뤼라 비유에 반박할 때, 서로 동일한 혼에 대한 얘기가 잠시나마 등장함. 여기서 조화의 혼은 지도가 불가능하며 몸의 느낌에 휘둘리고 수동적인 노예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모순적이라고 해석함.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혼이 일종의 설계와 의지력을 통해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반박함.
나의 혼과 소크라테스의 혼에 대한 대립은 혼에 인격을 포함할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라고 생각됨. 엄밀한 신적인 것으로서의 혼이라면 인격이 배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혼이 정말로 변하지 않는 순수한 것이라면, 혼과 몸이 분리되는 순간 방탕한 삶을 살아왔든 선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왔든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삶 속에서의 혼 단련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음.

현생에서 못되게 살면 다음 생에서는 그에 걸맞는 생물로 태어난다는 얘기는 불교적인 느낌이 있어서 흥미로움.

지혜는 사후에나 얻을 수 있고, 진정한 미덕은 지혜와 함께하며 진정한 철학자가 아닌 이들은 실제로는 용기나 절제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점과 달리 절제와 정의는 습관과 수련으로 얻을 수 있으며, 평범한 시민의 미덕이라고 얘기한 점은 혼란스럽게 느껴짐.
이것도 전부 삶 속에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위한 장치라고 봐야겠지. 아무튼 그렇게 혼을 훌륭하게 계발하면 다음 생에서는 말벌 개미같은 유순한 사회적 동물 속으로 들어가거나, 도로 인간 속으로 들어가 점잖은 사람이 된다고 함.
여기서 윤회에 대한 별개의 의문이 생기는데, 그렇게 훌륭하게 혼을 계발해야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의 혼은 정의와 절제가 훌륭하게 계발된 상태일텐데, 실제로는 그런 인간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 의문스러움.

대립되는 것 자체는 대립되는 것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이론도 흥미로움. 당연한 소리같아 보이지만 일반적인 불은 뜨거움의 성질을 지녔으므로, 차가운 불은 존재할 수 없지 않느냐? 같은 느낌임. 미덕 이론에 적용시킬만한 직관적이고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함.

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소크라테스의 대지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 이 시기 사람들의 문화적 색채가 강해서 이질적으로 들리며, 비현실적으로 느껴짐.

"... 생전에 몸의 쾌락과 장식은 이롭기보다는 해롭다 여겨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거부하고 배우는 즐거움에 열중함으로써 자신의 혼을 남에게 빌려온 장식물이 아니라 절제, 정의, 용기, 자유, 진리 같은 혼 자체의 장식물로 장식한 다음 운명이 부르면 언제든 저승으로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말일세."


<< 결국 이 문장이 소크라테스의 도덕철학 한줄요약인듯